사라진 시간, 되찾은 경험 정진영의 데뷔작에 대하여 

by.김영진(영화평론가) 2020-07-07조회 1567
사라진 시간 스틸
박찬욱, 봉준호 세대 이후 ‘현대영화’란 정의에 부합하는 한국영화들이 점점 드물어지고 있다는 불만이 심화 되던 차에, 아주 오랜만에 적절한 사례가 될만한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다. 배우 정진영의 연출 데뷔작 <사라진 시간>(2019)이었다. 듣자 하니 네티즌들에게 무자비한 평점 테러를 당하고 있다던데 이 영화가 그런 악의의 폭풍을 견디고 비평적으로 온당한 평가를 받기를 바란다. 

<사라진 시간>은 납득할 만한 이야기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던지는 대담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긴 서두와 본격적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사이에는 어떤 논리적 접점도 없다. 조진웅이 연기하는 형사 형구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연루된 듯 보이는 의문의 화재 사고를 수사하다가 마을회관에서 벌어진 잔치에 억지로 참석해 만취상태에서 깨어난 후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 대하는 마을 사람들을 보고 얼이 빠진다. 스포일러라 더 이상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사실 스포일러라 할 것도 없는 게 이 영화의 스토리에는 ‘왜’, ‘어떻게’를 설명하는 인과관계의 세목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소설처럼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다른 존재가 되어있더라는 설정으로 그냥 죽 밀고 나간다. 
 

그러니 어떤 관객들이 이 영화를 미워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이야기로 위로와 감동을  받고 싶었는데 물 없이 고구마를 먹는 것처럼 체증을 느끼게 하는 설정과 구성이라고 느끼는 게 당연하다. 반면 이야기의 논리보다는 이야기의 전제 자체를 받아들인 나같은 관객은 <사라진 시간>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것이다. (허풍이 아니다. 이 영화를 꼭 봐야 한다고 내게 추천한 영화인들이 있었다.) 형사 형구 역의 조진웅을 비롯해 영화 속 마을 사람들로 나온 대다수 배우들이 근래 한국영화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이 영화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납득하기 힘든 설정의 이야기를 납득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든다. 영화 속에서 형구가 자신은 형사이지 선생이 아니라고 아무리 항변해도 옆집 이웃 해균(전해균)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게 무슨 말씀이냐며 답답해한다. 상황을 되돌리기 위해 끔찍한 사고를 쳐도 그 사고는 실재하지 않고 꿈처럼 지나간다. 형구가 막연히 바라는 것처럼 관객은 이 모든 것이 형구의 악몽이기를 바란다.

물론 이 영화가 그렇게 시시하고 안이한 결말을 내릴 리가 없다. 이 영화는 인과적 논리로 접수되지 않는 이 상황을 마침내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형구의 선택에 기대어 관객의 마음을 가라앉히려 한 다음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지듯이 체념한 형구의 내면에 딱지로 가라앉은 상처와 그 딱지들이 더덕더덕 쌓여 얻어진 고통에의 이입 능력을 조용히 묘사한다. 이상한 마을에 와서 이상한 사건을 겪기 전에 형구는 자기 주관이 강하고 마음 먹은 것이 있으면 우격다짐으로라도 관철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다소 다혈질의 형사였다. 그는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버릇이 있는데 옆에 사람이 있어도 속에 있는 말을 혼잣말로 풀어내곤 한다. 그의 부인은 그런 그의 혼잣말 습관을 타박하면서 당신과 있으면 가끔 나는 없는 사람처럼 느껴진다고 말한다. 박봉이지만 긍지를 갖고 임하는 형사라는 직업을 배경에 두고 형구는 뭐든 판단하고 집행하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유형의 인간이지만 자신의 아파트 단지에서 주차를 하다가 실수로 옆 차를 받은 다음, 이튿날 출근하다가 자신이 받은 차의 앞유리에 끼워둔 휴대폰 번호 메모가 여전히 그대로인 걸 보고 슬며시 그걸 회수하는 그렇고 그런 윤리감각의 소유자이다. 
 

나중에 자기 정체가 바뀐 후에 형구는 자기가 거둔 그 쪽지의 휴대폰 번호를 보고 그 번호로 전화를 걸어 보지만 의당 자신이어야 할 그 휴대폰 임자는 응답하지 않으며 없는 번호라는 메시지만 들려온다. 타인을 수사하고 판단하는 인간이었던 형구는 자신의 정체를 회의하고 주변 세상의 진실에 대해서도 확신하지 못하는 완벽한 카오스의 상태에 빠져든다. 이 끔찍하게 부재하는 의의 앞에서 역설적으로 형구는 늘 깨어 있어야 하며 관성적인 과거의 자아와 결별해야 한다. 그는 예민하게 세상에 반응한다. 후반부의 한 장면에서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죽음에의 충동에 시달리면서도 어떻게든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려 애쓴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 속의 선한 본성과 만난다. 그는 자신의 절망을 스스로 응시하며 동시에 타인들이 감추고 있는 절망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영화 말미에 자신에게 뜨개질을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젊은 여인을 만났을 때 그가 보여주는 무심한 듯 경계를 두지 않는 응대법은 조진웅의 뛰어난 연기 덕분에 (이 영화에서의 조진웅의 연기는 그의 필모그라피에서도 두드러진 것으로 남을 것이다. 극적인 수식을 통하지 않고도 가닿을 수 있는 경지의 인물을 보여준다.) 타인과의 진정한 공감은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한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자. 우리는 이 영화의 이야기를 납득할 수 있는가. 나는 그럴 수 있다고 본다. 이 세상은 눈으로 보고도 믿어지지 않는 것들 투성이지만 우리는 대개 우리가 믿는 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산다. 이 세상이 우리의 합리적 이성으로 조직된 것이라는 믿음에 반하는 것은 셀 수 없이 많지만 우리는 그걸 인정하는데 따르는 우리의 불안을 위로하는 수단으로 더욱 더 안전하고 철저한 인과적 논리의 이야기에 매달린다. <사라진 시간>은 대담한 방식으로 그런 우리의 가냘픈 기대를 깨트린다. 그 대신 굳이 판타지나 꿈의 논리를 빌려오지 않으면서도 다른 세계와의 이상한 접촉을 통해 무너짐으로써 재생하는 자아를 느끼게 한다. 내가 곧 주인공이라는 동일화의 경험을 안겨주는 이야기에 속한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처럼 친구의 입장에서 주인공을 지켜보며 공감하게 하는 것도 해방감을 준다. 이야기의 독재에서 벗어난 시청각적 경험의 확장은 모던 시네마의 오랜 이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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