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각성한 관객이 온다 

by.박혜은(더스크린 편집장) 2020-04-27조회 2694
사냥의 시간 스틸
돌파구는 그렇게 간단히 열리지 않았다. 극장 개봉 대신 OTT 서비스 넷플릭스를 돌파구로 선택한 <사냥의 시간>(윤성현, 2020)은 "넷플릭스를 통해 190여 개 국에 단독 공개한다"는 보도자료가 나온 지 꼬박 한달 간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4월 23일(목), 드디어 관객을 만났다. 

지난 3월 23일(월)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를 통해 단독 공개된다는 보도자료가 도착한 날부터, 과정이 매끄럽지 않을 조짐은 있었다. 넷플릭스의 보도자료가 도착한 뒤, 여섯 시간 만에 콘텐츠판다가 ‘이중계약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고, 그날 저녁 8시 다시 리틀빅픽쳐스가 ‘이중계약 주장은 허위’라고 강한 반론을 제기하는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팽팽한 공방을 예고했다. 결국 콘텐츠판다는 이미 해외 판권이 팔린 국가에서는 넷플릭스로 영화를 상영할 수 없도록 하는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4월 8일(수) 법원은 콘텐츠판다의 손을 들어줬다. 현재의 '코로나19' 상황이 리틀빅픽처스가 주장하는 '계약해지가 가능한 천재지변'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4월 10일(금) 오후 4시 공개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넷플릭스는 영화 공개를 보류했다. 결국 4월 16일(목) 리틀빅픽쳐스는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며, 콘텐츠판다에 사과를 구합니다"라는 입장문을 발표해 깊이 머리 숙였고, <사냥의 시간>은 전세계 넷플릭스 구독자와 만나게 됐다. 

우여곡절을 차지하더라도 <사냥의 시간>이 극장 대신 넷플릭스를 선택한 건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코로나19 여파로 극장 관객 수가 1/10 수준으로 급감하고, 극장도 1/3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 차일피일 개봉일을 미루던 영화들이 <사냥의 시간>을 새로운 롤모델로 삼진 않을까. 극장에는 사람이 없지만, OTT 서비스에는 언제든 '새로운 콘텐츠'를 볼 준비가 되어 있는 시청자가 기다리고 있다. 기약 없는 기다림만큼 무서운 고문도 없지 않은가. 2020년 상반기 개봉 예정인 30여 편의 영화 중 <사냥의 시간>과 같은 돌파구를 택하는 영화가 등장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일부에선 (극장 대신 OTT 서비스 공개가) “충분히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목소리도 들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반기 개봉을 계획했던 영화들은 다시 극장 문이 열리고 관객들이 극장으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사냥의 시간>에 관한 법원 판결이 나기 전, <더 스크린>이 취재한 개봉 예정 영화 관계자들은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지금은 지켜볼 뿐이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사냥의 시간>처럼 OTT 서비스로 직행할 가능성은 적다는 입장을 전했다. “다들 모든 옵션을 고민하고 있겠지만, 현재 개봉이 밀린 영화들은 모두 극장 개봉을 전제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이 중요” “가능성이 큰 작품들을 극장에서 관객에게 제대로 선보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며 OTT 서비스 직행 가능성이 적을 것으로 전망했다. 

현실적인 상황도 걸림돌이 많다. 한국 영화 기대작은 개봉 전에 해외 마켓에 소개되어 선판매되는 경우도 많고, OTT 플랫폼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프로세스 역시 검증된 바 없기 때문이다. <사냥의 시간>의 경우 넷플릭스가 영화 제작비와 이미 소진한 마케팅 비용을 보전하는 방향으로 판권 계약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즉, 흥행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 적자를 막기 위한 선택이다. 한 제작사 대표는 “(이미 해외 다수 국가에 판권이 판매된) 대형 영화의 경우엔 OTT 서비스가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입장을 대신했다. 또한 영화 관객 수에 따라 수익이 결정되는 극장 상영 방식과 OTT 서비스의 수익 정산 방식이 다른 것도 현실적 제약이다. 
 

다행히 두 달 가량 강력하게 진행된 물리적 거리두기의 결과로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가 확연히 줄어들고, 개인 방역이 일상화되면서 극장들도 조금씩 관객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극장 문을 닫았던 멀티플렉스 극장들도 4월 29일(수)부터 전체 상영관을 정상 운영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관객 호응이 좋았던 재개봉 영화 상영에 이어, ‘마블 히어로 영화 특별전’을 진행 중이다. 재개봉이 흔치 않은 디즈니의 이례적인 결정에는 5월 개봉작 해리슨 포드 주연의 <콜 오브 더 와일드>,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 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의 <언더 워터>를 극장 상영하기 위한 ‘관객 마중물’ 전략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흑백 버전도 4월 29일(수) 극장 상영 일정을 확정했다. 상반기 개봉 예정이었던 한국 영화들도 조심스럽게 5월 이후 개봉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논의하고 있으나 개봉 일정을 공지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다. 마케팅 일정을 고려하면 시간이 많지 않은데, 자꾸 개봉이 밀리는 모양새라면 관객들도 김이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 여름 이전 개봉을 준비하는 영화사 제작자의 고민이다.  

본격적인 한국 극장 해빙기는 올여름, 7~8월이다. 한국 영화계 쇄빙선 역할은 천만 감독들의 신작 세 편이 맡았다. ‘좀비 천만 영화’ <부산행>의 스핀오프 속편 연상호 감독의 <반도>가 여름 개봉을 확정하고 예고편 공개 등 마케팅을 시작했다. <반도>의 제작사 레드피터 이동하 대표는 “물론 상황을 주시할 수밖에 없지만, 계획대로 진행 중이다”라고 여름 개봉을 확인했다. “해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름 시즌 개봉을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국가별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지켜보고 있다. 예고편도 공개하기 어려운 상황인 국가도 있다.”라며 한국 상황보다 해외 개봉을 오히려 변수로 꼽았다. 한국 최초로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를 선보이는 윤제균 감독의 <영웅>도 올여름 개봉을 확정하고 예고편, 포스터 등을 공개했다. 뮤지컬 초연 공연부터 10여 년 간 안중근 역할을 연기해 온 배우 정성화가 영화에서도 안중근 역을 맡아 연기와 노래를 함께 소화한다. 작품의 메시지와 시기성을 고려해 7~8월 개봉이 유력하다. 현재 촬영을 종료하고 후반 작업 중인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도 여름 개봉이 목표다. 배급사 롯데컬처웍스 관계자는 “여름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만 시장 자체가 예년과 비교해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면 여름 방학도 짧아질 것이고. 그래서 개봉 배급 일정은 탄력적으로 전략을 짜고 있다”라며 올해 여름 시장이 예년과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전망했다. 조성희 감독이 연출하고 송중기, 김태리, 진선규, 유해진이 합류한 첫 SF 블록버스터 <승리호>도 여름 개봉을 놓치지 않을 계획이다. 

시장의 보편적 회복 탄력성을 고려한다면 빠른 회복을 기대할 수도 있다. 매년 2억 장의 영화표가 판매되던 한국 극장 시장이 코로나19라는 강력한 외부적 요소로 위축된 만큼, 코로나19 종식에 이어 여름 대형 신작들이 공개된다면 한껏 눌러 두었던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관객 수가 폭증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어제와 완전히 다른 오늘이 시작됐다. 자연스럽게 수많은 ‘플랜 A’는 ‘플랜 B,C,D’로 변경되었다. 코로나19가 ‘극장이냐, OTT 서비스냐, 양자택일을 하라’고 위협하며 극장을 말살시키는 원흉처럼 느껴졌겠지만, 실은 위협보다는 백신으로 여기는 편이 적절하다. 전 세계 극장이 문을 닫고, 오프라인 활동이 일시 정지된 ‘미증유’의 현재는 냉정하게 짚어보면 새로울 게 전혀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변화 속도가 현기증날 만큼 빨라졌을 뿐, 재택근무, 원격 수업, 배달 산업, OTT 서비스는 이미 대세였다. 첨단 정보통신 기술이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확산되고 삶의 모습이 혁신적으로 바뀐다는 ‘4차 산업 혁명’이 우리의 준비 상태와 무관하게 코로나19라는 광범위한 테스트베드를 통해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직접 몸을 이동해 오프라인 공간에 모이지 않고도 일을 하고,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경험하기 전엔 몰랐던 이점도 있다는 걸 체험해버렸다. 한편으론 ‘온라인 연결’이 절대 채우지 못할 오프라인 경험이 얼마나 귀중한 지도 뼈저리게 확인했다. 극장에서 볼 이유가 분명한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그럴 필요를 찾지 못한다면 경험한 바대로 극장이 아닌 플랫폼에서 보는, 관객의 선택은 단호하고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원망도 들고, 안타깝긴 하지만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이라는 가정은 쓸모없다. 동시에 온라인인가 오프라인인가, ‘모 아니면 도’ 식의 양자택일 예측도 쓸모 없다. 지금 더 중요한 질문은 영화와 극장 모두가 ‘최신 영화를 가장 빨리 보여주는 플랫폼 경쟁력’, ‘극장 홀드백’같은 독점적 안전망이 약해진 상황에서 ‘각자의 생존 무기는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여유가 길지 않다. 코로나19보다 더 두려운 건, 이미 각성해 버린 관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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