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강원도의 힘 홍상수, 1998

by.우혜경(영화평론가) 2017-09-06조회 14,558
강원도의 힘 스틸이미지, 강릉역과 여자

홍상수의 열아홉 번째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 독일 함부르크 해변에 서 있던 영희(김민희)를 업고 간 (1부의) 검은 옷의 남자는 그녀를 (2부의) 강릉에 데려다 놓는다. 그곳엔 폐인처럼 지내다 겨우 신작 준비에 들어간 영희의 옛 애인인 감독 상원(문성근)도 와 있다. 사실 홍상수에게 강릉은 낯선 곳이 아니다. 그가 영화에서 공간이 아닌 ‘장소’를 선택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이 선택은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영화 <강원도의 힘>의 주인공 지숙(오윤홍)도 강릉을 두 번 찾아간다. 지숙의 (첫 번째) 강릉행 여정은 상권(백종학)에 의해서 느슨하게 반복된다. 그런데 상권이 지숙과 같은 강릉행 기차를 탔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관객들은 지숙의 이야기(편의상 1부)와 상권의 이야기(편의상 2부)를 포개 놓고 ‘부지런히’ 빈칸을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지숙 일행이 지나쳤던 여자에게 상권은 ‘인상이 깨끗하다며’ 지분대고, 1부에서 사고사로 알려졌던 여자의 죽음은 2부에서 상권의 신고로 인해 살인 사건으로 밝혀진다. 낙산사를 찾은 지숙이 남긴 기와불사 메시지(‘어머니 건강하세요’) 역시 2부에서 상권이 발견하고, 지숙이 집 앞에서 발견한 낙서(‘조금 더 긴 호흡으로 기다리자’)를 상권이 썼다는 것도 관객들은 나중에 알게 된다. 영화는 1부에서 던진 질문을 2부에서 답하기도 하고, 1부에서 무의미하게 보였던 것들의 의미를 2부에서 채워 주기도 한다. 두 개의 시간이 교차하고 공간이 중첩되면서 만들어낸 (반복과) 차이를 발견하고, 그 공백을 능동적으로 메우는 것은 사실 홍상수 영화를 보는 중요한 방법 중 하나라고, ‘부지런한’ 관객들은 이후 17편의 영화를 거쳐오면서 열심히 학습해 왔다. 실제로 그 과정은 너무나 매혹적이라 관객들은 홍상수가 만들어 놓은 미로에 기꺼이 빠져들곤 했다. 
홍상수 영화 포스터
홍상수의 영화들

20편 가까운 영화를 거치면서 홍상수의 ‘차이와 반복’도 발전(혹은 변주)을 거듭해 왔다. 같은 사건이 서로 다른 인물들에 의해 반복 재현되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하고(<오! 수정>) 꿈이나 판타지를 경유하여 반복되기도 하며(<다른 나라에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서로 다른/같은 인물들이 동일한/다른 공간을 반복하면서 차이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강원도의 힘> <생활의 발견>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 어떨 땐 현실이 영화를 반복하기도 하고(<극장전>), 영화만이 가능한 방식으로 ‘시간’이 반복되기도 하며(<자유의 언덕>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유사한 사건을 모르는 척 서로 다른 인물들이 반복하기도(<북촌 방향>), 서로 다른 사건이 같은 인물(배우)에 의해 반복되기도 한다(<극장전>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심지어 최근작 두 편(<밤의 해변에서 혼자> <그 후>)은 홍상수 자신의 현실을 영화가 스스로 반복한다. 그 과정에서 ‘차이-반복’의 틈새는 커지기도, 혹은 작아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영화 ‘내(內)’ 리듬 이외에 홍상수의 필모그래피를 가로지르는 영화 ‘간(間)’ 리듬도 흥미로운 고민거리이지만, 여기에서 논의하는 건 적절치 않을 것 같다.) 그런데 이때 문제는 ‘차이-반복-틈새’라는 ‘운동’을 학습해온 관객들은 그 관성(慣性)으로 인해 (능동적이다 못해) 무리할 정도로 영화의 틈새를 메우려 든다는 점이다. 그리고 차이와 반복 사이에 남겨진 나머지, 잘 의미화되지 않는 ‘잉여’에 대해서는 슬며시 눈감아 버리고 만다. 홍상수는 날카롭게 (마치 퍼즐을 배치하는 것처럼) 이 점을 파고든다. 산에 오르다 지숙이 발견한 금붕어는 상권이 키우게 된 금붕어 일리 없다. 그리고 지숙이 산 채로 묻었기 때문에 상권의 금붕어가 한 마리밖에 남지 않은 것도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를 보는 관객들은 두 개의 사건을 지숙과 상권, 그리고 죽은 태아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고 싶어진다. 두 개의 우연한 독립 사건을 ‘차이-반복-틈새’의 운동 안에 슬며시 밀어 넣은 건 홍상수이지만, 그 안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건 관객들이다. 그러니 홍상수가 영화의 의미를 묻는 질문에 매번 ‘관객들이 그렇게 봤다면 그게 맞는 것’이라고 대답해 온 건 그냥 하는 말의 유희가 아니다. 그러나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운동의 관성에 빨려 들어가는 순간, 운동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간과하기 쉬워진다는 점이다. 이건 마치 자전거 바퀴의 반복적인 회전 운동만을 지켜보고 있으면 이 자전거가 어디로 나가는지 절대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도 홍상수이지만, 핸들을 잡고 있는 것 역시 그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니 우리는 이제 홍상수의 게임의 규칙, 그 처음으로 돌아가 그의 운동이 어디로 향하는지 따져 물어야 한다. 그것만이 쳇바퀴 도는 것 같은 홍상수 영화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20년 가까이 흐른 지금, 그의 게임의 규칙의 출발점이기도 한 <강원도의 힘>을 보는 것이 중요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강원도의 힘>에서 지숙과 상권이 교차/반복하는 여정은 첫 번째 강릉행 일 뿐, 지숙의 두 번째 강릉행은 ‘차이-반복’의 패턴에서 벗어나 있다. 게다가 친구들과 함께 ‘우연히’ 결정한 첫 번째 여정과는 달리 두 번째 여정은 지숙이 오롯이 혼자 결정한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두 번째 강릉행이 첫 번째 강릉행을 ‘반복’ 하는 걸까? 아니, 그렇지 않다. 말하자면 두 번째 강릉행은 앞서 언급한 홍상수 영화의 ‘잉여’처럼 보인다. 이제 우리는 지숙의 두 번째 강릉 행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를 환기하기 위한 조금 자세한 줄거리. 대학생 지숙은 두 명의 친구와 함께 1박 2일 강릉 여행을 떠난다. 민박집을 찾던 지숙 일행은 우연히 경찰관(김유석)을 알게 되고 도움도 받는다. 그날 저녁, 일행과 함께 술을 마친 경찰관은 술에 취한 지숙을 초소로 데려가 섹스를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다음 날, 지숙과 친구들은 서울로 돌아온다. 며칠 후 지숙은 경찰을 만나겠다며 다시 강릉으로 떠나고, 그와 하룻밤을 보낸다. 한편, 강릉으로 가던 지숙 일행의 기차엔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대학 강사 상권이 타고 있다. 유부남인 그는 최근까지 이어왔던 지숙과의 연인관계를 정리하고 후배의 권유로 강릉 여행에 나선 것이다. 길을 묻는 낯선 여자에게 한눈을 팔고, 급기야 술집에서 만난 여자와 하룻밤을 보낸 상권도 서울로 돌아온다. 며칠 후 기다렸던 교수 임용 소식을 듣게 된 그는 지숙에게 다시 만나자고 연락한다. 

목욕탕의 저울, 낙서

첫 번째 강릉행의 끝, 지숙일행은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다음 장면에서 지숙은 공중목욕탕에 가고 탕에 들어갔다가 나와 몸무게를 잰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집 앞에 적힌 (상권의) 낙서를 발견하고 수건을 꺼내 지운다. 다시 숏이 바뀌면 친구의 집에 찾아온 지숙이 다시 강릉에 가기로 했다고 말하며 거짓말을 해 달라고 부탁한다. 걱정스럽다는 친구의 모습을 뒤로하고 지숙은 강릉으로 향한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 지숙은 왜 다시 강릉에 가는 걸까? 가장 쉬운 답. 경찰을 만나기 위해서. 친구에게 한 말에 따르면 강릉에서 돌아온 지숙은 그와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술에 취한 자신을 겁탈하려다 실패한, 한 번밖에 만난 적 없는 경찰을 만나러 (지숙의 말에 따르면) 하루 만에 돌아올 수도 없는 길을 떠난다는 건 무리한 해석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이렇게 해석하게 되면 첫 번째 강릉행과 두 번째 강릉행 사이의 두 개의 장면(목욕탕, 낙서)이 의미를 잃고 만다. 잘 알려진 것처럼 홍상수는 숏을 낭비하는 감독이 아니다. 그러니 이 두 개의 장면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목욕탕 장면. 탕에서 나온 지숙이 체중계에 올라간다. 그리고 자신의 몸무게를 한참을 바라본다. 카메라 역시 그녀를 따라 체중을 바라보다 심지어 그녀가 체중계에 내려선 다음 바늘이 영점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체중계 앞을 한참 지키고 서 있다. 그녀의 몸무게를 보여주는 것이 왜 이토록 필요했던 것일까? 그 대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영화의 후반부, 지숙이 상권과 다시 만나는 장면까지 기다려야 한다. 

2부의 상권 이야기가 한참 지나간 다음, 상권은 지숙에게 다시 연락한다. 그리고 둘은 (이전에 그래왔던 듯) 모텔로 가 섹스를 시도한다. 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하며 섹스를 하려는 상권에게 지숙은 ‘애 떼는 수술’을 했다고 말한다. 그제서야 우리는 지숙이 체중계 위에서 보고 있던 것이 자신의 몸무게가 아니라 자신의 체중에서 제거된 아이의 몸무게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지숙은 체중계 위에서 떠나간, 아니 자신이 ‘살해’한 아이의 몸무게를 참혹하게 바라본 것이다. 우리의 눈엔 보이지 않지만 지숙에게는 너무나 명백한 아이의 빈자리를 홍상수는 이 숏을 통해 보여준 셈이다. 이제 우리는 지숙의 중절수술 시점을 기준으로 첫 번째 강릉행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첫 번째 여정에서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에 대해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와불사, 생매장

다시 처음. 강릉에 도착한 지숙과 친구들은 해변가에 앉아서 노래를 부른다. “내 사랑아 내 사랑아, 나의 사랑 클레멘타인, 늙은 아비 혼자 두고 영영 어딜 갔느냐” 광산 노동자로 일하던 아버지가 딸을 잃고 슬퍼하며 부르던 노래. ‘영영’ 인지 ‘너는’인지 가사를 놓고 반복하며 노래를 하는 친구들을 두고 지숙은 더 이상 부르기 싫다는 듯 가요집에서 가장 행복하고 신나는 노래를 찾아 선창하기 시작한다. (‘오늘 하루 행복하길...’ ) 하지만 죽음에 대한 생각은 지숙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커피숍에 들어온 지숙은 고3 때 자신을 짝사랑하던 동네 친구가 자살을 시도했다는 이야기를 꺼낸다. 간신히 살았지만 병원에 입원한 후 소식도 알지 못하는 그 아이를 지숙은 문득 강릉에 와서 떠올린 것이다. 온천에 가겠다는 친구들과 헤어져 지숙은 (굳이) 혼자 낙산사로 향한다. 그리고 그 길에서 절에서 방생한 거북이 두 마리를 본다. 방생(放生). 불교 경전, ‘금광명경(金光明經)’에 나오는 유수장자는 늪에서 말라 죽어가는 물고기들을 구해낸다. 마치 영화는, 아니 강릉은 죽음으로 이끌리는 지숙을 삶으로 끌어내려는 것처럼 보인다. 낙산사에 오른 지숙은 불상 앞에서 절을 한 뒤 기와불사를 한다. (1부에서 기와불사를 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지만, 2부에서 상권이 지숙의 기와불사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어머니 건강하세요.’ 가족을 향해 남긴 유서와 같은 메시지. 먼저 떠나는 자신 대신 오래 살아남아 달라는 기원. 혹은 죽지 말아 달라는 부탁.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산길에서 발견한 ‘살아 있는’ 물고기를 그대로 매장해버리는 지숙의 단호함에는 어떤 결단의 공기가 서려 있다. 아이를 임신한 지숙은 어쩌면 (아이와 함께 동반) 자살을 하기 위해 강릉을 찾아온 것은 아닐까? 자살이라던 낯선 여자의 죽음은 같이 있던 남자에 의한 살인으로 밝혀진다. 자살과 살인(낙태)의 흐릿한 경계. 지금 지숙을 그 경계에 서서 자신의 죽음을 막으려는 강릉의 ‘힘’과 겨루고 있는 중이다. 

“미안해”

하루밖에 남지 않은 강릉에서의 마지막 밤, 함께 술을 마시던 친구들은 (마치 지숙의 자살을 방조라도 하듯) 지숙을 ‘상투적’이라며 비난한 다음, 그 자리에 혼자 남겨두고 자리를 떠난다. (강릉역에 도착해 길도 알지 못하는 지숙을 덩그러니 혼자 두고 역에 숨어 그녀가 헤매는 모습을 즐겁게 지켜보던 두 친구의 모습을 떠올려보라.) 오히려 그녀의 자살을 막는 건 그 자리를 지키는 경찰이다. 술에 취한 그는 지숙을 ‘초소’로 데려간다. 초소(哨所). 경계와 감시를 하는 곳. 혹은 죽음으로부터 지숙을 지키는 장소. 경찰과 함께 (어쩌면 덕분에) 지숙은 그 밤을 무사히 넘긴다. 이렇게 지숙이 죽음을 넘겼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강원도의 힘>에서 가장 이상한 장면인 이튿날 아침 민박집 앞에서의 숏이 비로소 이해가 된다. 마치 큰 병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킨 듯 지숙이 민박집 앞 의자에 힘없이 앉아 있다. 어젯밤에 사라진 친구들은 지숙의 흐트러진 머리를 대신 묶어주며 지숙 앞에 와서 미안하다며 사과한다. 무엇이 미안해서? 너를 자살하도록 내버려 두어서 미안해. 

“사람을 이런 데서 혼자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이렇게 돌아온 서울에서 지숙은 함께 죽는 대신 아이만 죽게 하는 선택을 한다. (목욕탕 장면) 하지만 죄책감의 시달리는 지숙 앞에 상권의 메시지가 도착한다. (집 앞 낙서 장면) 지숙이 두 번째 강릉행을 결정하는 건 아마도 살고 싶어서였던 건 아닐까? 아이를 죽이고도 끝나지 않는 굴레, 이 ‘긴 호흡’에서 벗어나는 길은 아마도 죽음밖에 없다고 지숙은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의 죽음(자살)을 (다시 한번) 막기 위해 지숙은 강릉으로 향한다. 이 두 장면이 없었다면 이 영화에서 두 번째로 이상한 장면(지숙이 자신을 늦게 데리러 온 경찰에게 이상할 정도로 심하게 화를 내는 장면)은 성립하지 않는다. 강릉에 도착해 경찰의 차에 탄 지숙은 사력을 다해 그에게 화를 낸다. “사람을 이런 데서 혼자 이렇게 기다리게 하는 법이 어딨어요? 아무도 아는 사람도 없는데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내가 얼마나 불안했는지 알아요? (...) 여기서 만나기로 했는데 내가 가긴 어딜 가?” 히스테리에 가까운 지숙의 분노는 ‘불안한 나를 혼자 죽게 하지 말아요. 제발 나를 살려주세요’라는 절박한 외침처럼 들린다. 

그렇게 강릉에 찾아온 지숙을 경찰이 모텔로 데려가 (마치 상권처럼) 섹스를 하려 들 때 지숙은 경찰의 머리를 마구 때리며 거부한다. 머쓱해 진 경찰이 ‘내가 술 깰게’ 라고 말하며 고쳐 앉고, 지숙이 잠깐 화장실에 가자 자살이라도 하려는 듯 베란다로 나가 난간 밖으로 몸을 내민다. 하지만 난간 끝에 매달려 있던 경찰은 이내 다시 주섬주섬 방 안으로 들어온다. 생각해보면 홍상수의 영화에서 섹스에 실패한 남자가 자살을 떠올리는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아니 차라리 섹스와 죽음이 가깝게 붙어 있다고나 할까? <극장전>의 상원(이기우)도 영실(엄지원)과의 섹스가 잘 되지 않자 깨끗하게 죽고 싶다고 말하고 수면제를 사와 (결국 실패가 예정된) 자살을 시도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건 자살시도 자체가 아니라 이 시도가 모두 실패했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실패한 자살의 반복. 경찰이 난간을 다시 기어 올라올 때, 우리는 안도하면서 영화 초반, 지숙이 이야기한 (자살에서 살아 돌아온) 친구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죽음을 생각하며 강릉을 다시 찾은 지숙도 아마 ‘살아’ 돌아갈 것이다. 서울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통곡을 하는 지숙의 울음 속엔 (자신이) 살았다는 안도와 (자신이 살기 위해 결국) 죽어야/죽여야 했던 아이에 대한 애도가 뒤섞여 있다. 

그 후 상권이 다시 찾아와 섹스를 하려 들 때, 지숙은 임신시키려는 것이냐며 “나도 좀 살아야겠어요.” 라고 말한다. 다시 강릉 행을 반복하며 죽음을 떠올리지/실행하지 않겠다는 지숙의 다짐은 병원을 나서며 담배를 끊고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겠다고 다짐하는 동수(김상경)(<극장전>), 죽음의 문턱에 선 영희를 업어 강릉으로 데려온 검은 옷의 남자(<밤의 해변에서 혼자>), 과거의 애인 창숙(김새벽)을 반복하지 않고 출판사를 박차고 나와 눈을 맞으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아름(김민희)(<그 후>)(아직도 나는 아름이 출판사에 다시 방문하는 에필로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과 닮아 있다. 차이와 반복의 운동에서 벗어난 ‘잉여’는 차이와 반복의 운동을 앞으로 나아가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 ‘잉여’들이 홍상수의 게임의 규칙의 단단한 힘의 균형에 균열을 가져오는 것이다. 

상권은 과거를 반복하지만 그 자리에 지숙은 없다. 교수로 임용된 상권은 속물 같은 동료 교수들과 함께 술을 마시다 옆 테이블에서 인사 온 여학생을 탐욕스럽게 바라본다. 아마도 똑같은 방식으로 상권은 지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건 그가 교수가 되든 되지 않든 강원도에서 어떠한 배움도 얻지 못한 상권의 벗어날 수 없는 반복이다. 상권도 지숙처럼 ‘눈물’을 흘리지만 그건 먼지가 만들어낸 ‘인공/가짜’ 눈물일 뿐이다. (“눈에 뭐가 들어갔었나 봐.”) 섹스에 대한 상권의 끊임없는 집착은 (죽음에 이끌리는 지숙과는 달리) 삶에 대한 집착에 다른 말처럼 보인다. (홍상수의 남자들이 섹스에 실패할 때 죽음을 떠올리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는 설악산 권금성 정상에서 아슬아슬한 산행을 하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과는 다른 ‘육체’를 가진 사람들이라며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영화는 그런 상권의 모습을 횟집 수족관에서 ‘살아 있는’ 물고기와 병치시킨다. 살아 있지만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는 존재. 

“임신시키려고 그래요?”, 사라진 금붕어

하지만 동시에 섹스는 그들에게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사랑해’라고 말하며 지숙과 섹스를 하려던 상권은 그녀가 “임신시키려고 그래요?”라고 말하자 멈칫한다. 이후 십 여 편의 영화를 돌아온 우리는 홍상수의 남자들이 ‘사랑’라고 말할 때 이것이 곧 ‘섹스 하고 싶어’의 다른 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밤과 낮>의 성남(김영호)을 제외하면 이 말을 부인에게 한 (유부)남은 없었다는 점도 함께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그런 성남조차 부인의 임신 소식에 불안해한다. (성남의 목욕탕 꿈 장면을 떠올려 보라.) <극장전>에서 상원에게 (부인도 여자친구도 아닌) ‘첩’이 되어주겠다는 영실의 말은 섹스는 하지만 부인/가족은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여기엔 ‘짝만 찾으면 만사형통’(<오! 수정>)이지만, 그 짝이 ‘부인-임신-가족’으로 이어지는 것은 필사적으로 막고 싶어하는 일종의 저항감이 깃들어 있다. 마치 이 저항감을 반영이라도 하는 듯 홍상수의 영화에서 가족은 거의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더라도 어딘가 한쪽이 비어 있는 형태(<극장전> <하하하> <다른 나라에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로 나타난다. <그 후>에서 창숙과 사랑에 빠져 새벽에 집을 도망치듯 나오던 봉완(권해효)은 ‘아빠’라고 부르는 (부인 혹은 딸, 결국은 가족) 소리를 못 들은 척 하고 떠나 버린다. (부인의 임신, 혹은 딸의 등장에) ‘집’으로 돌아온 성남과 봉완이 오래가지 않아 또다시 집을 떠날 것이라는 예감은 근거 없는 상상만은 아닐 것이다. 상권은 아파트 주차장에서 갑작스럽게 후진하는 차에 부인과 아들이 치일 뻔 하자 불같이 화를 낸다. 하지만 아이/부인이 죽을 뻔한 것에 대한 두려움은 오히려 아이/부인이 죽었으면 하는 자신의 은밀한 소망을 깨달은 데서 오는 두려움처럼 보인다. (이 장면에서 상권의 가족은 어디론가 외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 결국 이 외출은 주차장에서의 에피소드를 보여주기 위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상권에게 아이와 부인은 속물에 가까운 교수에게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하는 이유이자 ‘사랑’하는 여자들과의 섹스를 숨겨야 하는 번거로운 방해물에 불과하다. 

강릉에 다녀온 다음, 사라진 한 마리의 금붕어가 어디로 갔는지 상권은 알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지숙은 아마도 다시는 상권을 만나지 않을 것이다. 살기 위해서. 다시는 죽지 않기 위해서. 어쩌면 죽음의 반대편에서 ‘산다’는 건, 탐욕스럽고(교수 임용을 부탁하기 위해 찾아간 노교수는 상권이 잊고 놓고 간 우산을 흡족하게 바라본다.), 속물 스러운(상권은 자신의 심부름을 했던 여직원에게 잔돈을 가지겠냐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고, 지나가는 개에 물릴까봐 전전긍긍하며, 원했던 교수직을 힘들게 얻은 다음 동료들과 고작 취중 섹스의 쾌감이나 논해야 한다.) 것일지도 모른다, 라고 <강원도의 힘>은 말한다. 

이 영화 한편으로 홍상수 영화 모두를 아우르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누군가 (홍상수의 ‘베스트’가 아니라) ‘홍상수 영화는 결국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강원도의 힘>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20년을 돌아 이제 <강원도의 힘>을 다시 생각해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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