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남자와 기생: 7월의 영화 Ⅰ 심우섭, 1969

by.우혜경(영화평론가) 2020-07-01조회 7,664
심우섭 감독의 1969년 영화 <남자와 기생>은 작품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요즘의 관객에겐 다소 낯선 영화일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한국영화사의 큰 흐름 속에 놓고 본다면 금세 고개를 끄덕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짧은 지면에서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다 훑을 순 없겠지만, <남자와 기생>이 만들어진 1960년대의 한국 코미디 영화의 경향 안에서, 그리고 이 영화를 연출한 심우섭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우선 이 영화를 자리매김해보는 것은 영화의 이해를 돕는 데 있어 의미 있는 시작처럼 보인다. 

1959년 인기를 얻었던 방송드라마 <백련부인>으로 감독으로 데뷔한 심우섭 감독은 연출자로 데뷔하기 이전, 1950년대 중반, 홍성기 감독의 <애인>의 촬영감독으로 먼저 영화에 입문했다. 하지만 연출자로서 예술적 야심을 녹여냈던 <백련부인>이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하자 그는 홍성기 감독, 최훈 감독 등 다른 작품에도 촬영 감독으로, 또는 편집자로 계속 참여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그 이후로도 몇 편의 작품을 더 연출했지만 정작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알리게 된 건 코미디 영화 <청춘사업>(1965)과 <주책바가지>(1965)가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부터였다. 한 인터뷰에서 심우섭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심우섭과 작업하면 무조건 웃고 돌아 간다”는 소문이 번졌다. 나와 일한 제작자들은 하나같이 주머니를 불려서 돌아갔다. 그저 잘되게 해줘서 고맙다는 소리가 좋았을 뿐이었다. 내 몫으론 얼마가 떨어지든 별로 신경 쓰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다만 스승 홍성기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아 일말의 죄책감은 있었다. 스스로 흥행감독이 되길 원한 바는 아니었으나 작품을 의뢰하는 제작자들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음을 주고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코미디가 내겐 맞았다."1)
 

두 영화의 성공 이후 심우섭 감독은 <남자 식모>(1968)로 흥행을 보증하는 코미디 영화 감독으로 자리를 굳혔고, 그 이후 <남자 미용사>(1968), <남자와 기생>까지 '(여장) 남자' 시리즈로, 그리고 '팔도' 시리즈 (<팔도 노랭이>, <팔도 며느리>, <팔도 주방장>)을 연이어 연출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멀리 돌아왔지만 <남자와 기생>은 코미디 감독으로 명성을 얻은 심우섭 감독이 당대를 주름잡았던 서영춘, 김희갑, 양훈, 구봉서 등과 같은 코미디언과 함께 작업한 일련의 코미디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는 작품인 셈이다. 

특정 소재를 가지고 시리즈로 만들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이 그렇듯 <남자와 기생> 역시 이야기는 제목에서 유추 가능할 만큼 단순하다. 회사에서 쫓겨나 생계가 막막해진 태호(구봉서)는 기생집에서 일하는 지인의 권유로 여장을 하고 기생이 되기로 결심한다. '산월'이라는 기생으로 일하게 된 태호는 기생집에서 자신을 쫓아낸 회사의 사장(허장강)을 만나게 되고, 그를 골탕 먹일 계획을 꾸민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허사장은 산월이에게 빠져 흥청망청 기생집에서 돈을 쓰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허사장의 부인 (도금봉)은 허사장의 뒤를 밟고 급기야는 밖으로 도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어떻게 하면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그 '노하우'를 배우려 남장을 하고 직접 기생집에 찾아간다. 물론 이야기는 '코미디'라는 장르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모두가 '정상성'을 회복하고 웃으며 안전하게 마무리되지만, 이 때 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옷을 바꾸어 입는' 행위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해서는 한 번 되짚어 볼 만하다. 
 

작지 않은 체구에 선 굵은 얼굴을 가진 '구봉서'가 한복저고리를 입고 교태 섞인 목소리를 내며 기생을 연기한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보증된 일종의 웃음 코드이겠지만, <남자와 기생>에서는 주인공 구봉서를 제외한 주변인물들의 '옷 바꿔 입기'도 등장한다. 산월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허사장은 호텔로 그녀를 유인한다. 하지만 허사장을 골탕 먹일 계획인 산월이 샤워하러 들어간 허사장의 옷으로 바꿔 입고 호텔을 빠져나가자 허사장은 산월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집에 가야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태호가 산월이 되기 위해 한복 저고리로 갈아 입는 것과 허사장이 (산월의) 미니스커트로 바꾸어 입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생이 되기 전 태호는 허사장의 회사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동료의 양말 빨래를 해주다가 걸려 해고당한다. 하지만 그가 '바지'를 벗고 '치마'로 갈아 입자 그는 순식간에 기생집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생으로 탈바꿈된다. 말하자면 '옷 바꿔 입기'를 통해 회사에서 몰래 눈치 보며 남의 빨래나 해주던 남자(태호)가 돈을 마구 주무르며 남자 손님들을 상대로 큰 소리 치는 여자(산월)로 바뀐 셈이다. 이 때 '여장(女裝)'은 여성의 (전통적인, 아니 더 정확하게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성역할을 입히는 대신 정반대로 태호에게 결핍됐던 '남성성' 혹은 (역시나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남성의 성역할'을 회복시켜주는 행위가 된다. 이 때 태호의 한복저고리는 흡사 수퍼 히어로의 '수트'처럼 보인다. 바지를 입은 태호는 여동생의 도움 없이는 불량배들로부터 연인을 지키지도 못하는 존재지만, 치마를 입은 산월은 같은 기생집에서 일하는 연인(정미)을 무례한 남자손님들로부터 당당하게 구해낸다. 

그러나 허사장의 '여장'은 반대로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그의 남성성을 완전히 거세시키는 역할을 한다. 산월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집에 들어간 허사장은 기 센 부인의 추궁에 거의 집에서 쫓겨날 지경에 이른다. 심지어 이유가 어찌됐든 그는 부인에게 가부장으로서의 역할마저 빼앗기는데, 이는 부인이 남편의 양복을 입고 (남장(男裝)), (남편이 해왔던 것처럼) 기생집에 찾아가는 전위적 행위로 변주된다. (물론 앞서 말한대로 심우섭 감독은 이 전위성을 영화의 결론까지 밀어 부치지 못하고 익숙하고 안전한 결말을 선택한다.) 말하자면 <남자와 기생>의 안전한 웃음 코드인 남자 주인공의 '여장'은 (또는 더 넓은 의미에서 '옷 바꾸어 입기'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두고 두 개의 젠더 사이를 오가며 이루어지는 일종의 전복적 게임이라 할 수 있겠다.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심우섭 감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감독들은 대다수 예술영화를 꿈꾸지만 결국 살아남기 위해 흥행영화에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없는 갈등 속에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감독활동을 하는 동안 흥행보다 예술에 치중하며 연출활동을 한 유현목 감독을 부러워했습니다. 유감독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지만, 내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지요. 주로 관객을 염두에 두고 희극 영화를 만들면서도 나 역시 그냥 웃어넘기는 흥행영화가 아닌 작품마다 페이소스의 감동적인 여운을 남기려고 노력했어요."2) 

어쩌면 이제, '공장에서 찍어낸, 그렇고 그런 코미디 영화'라고 치부됐던 그의 영화들을 다시 한번 꺼내 보아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1) 씨네21, 2001-05-02자, "배고픈 민중, 웃음의 배를 불리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773)
2) 인터뷰365, 2012년 3월 14일, ‘신상옥도 부러워한 코미디 거장 심우섭 감독’ (https://www.interview365.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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