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우섭
Shim Wu-seob / 沈雨燮 / 1927  ~  2015
본명
심일섭 (Shim Ill-sub)
대표분야
감독, 편집, 제작/기획, 촬영
데뷔작품
백련부인 1959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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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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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팔도주방장 (심우섭, 1987)
여자가 더 좋아 (심우섭, 1983)
82 바보들의 청춘 (심우섭, 1982) 연출
여자는 괴로워 (심우섭, 1981)
청춘을 뜨겁게 (심우섭, 1981)
난 모르겠네 (심우섭, 1980)
형님먼저 아우먼저 (심우섭, 1980)
아리송해 (심우섭, 1979)
축 총각졸업 (심우섭, 1979)
아니벌써 (심우섭, 1979)

주요경력

1927년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縣) 오노다시(小野田市)에서 혼다 히사오(本田久男)라는 이름으로 태어나 한국인임을 알지 못한 채 성장
1944년 철도국에 입사하여 기관원으로 근무
1945년 해방 이후 한국인임을 알게 된 뒤 부산 영도에 정착
대동공업사 부산지사에 현장 측량기사 조수로 입사
1949~50년 부산 태양사진관과 라라사진관에서 사진기사로 근무
1951~52년 부산 남포동에서 대양사진관 운영
1953년 종로4가 은파사진관과 국회에서 사진기사로 근무
1954~55년 서울 을지로에서 백양사진관 운영
1955년 홍성기 감독의 <애인> 촬영부 first로 영화계 입문 후 촬영 및 편집 분야에서 활동
1958년 <모녀>에서 촬영감독 데뷔
1959년 <백련부인>으로 감독 데뷔 이후 66여 편 연출
1972~73년 연예인송출회사인 AJK 상무
1999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조직위원회 부위원장
2000~04년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이사
2001~2004년 부천문화재단 이사

기타정보

기타이름
혼다 히사오, 本田久男
영화계 입문배경
10살때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으며 사진작가가 되어 필름속에 세상을 담았다. 6.25 당시에 부산에서 사진관을 했는데, 당시 피난 살이를 하는 영화인들과 교류가 많았다. 그러다가 서울이 수복되자 친분이 쌓인 영화인들이 전부 서울로 올라오는 바람에 같이 서울로 와서 다시 사진관을 경영하게 되었다. 처음부터 영화계에 입문하라는 제의를 여러차례 받았지만 거절했다. 하지만 영화에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촬영현장을 계속해서 따라다니다가 55년 홍성기 감독의 촬영부 first로 "애인"을 촬영, 편집해 달라는 결정적인 유혹을 받아 영화계에 입문하게 되었다. 그렇게 촬영과 편집까지 좋아서 작업을 하다보니, "창작적 예술감각"이 있는 사람이 감독으로 적합하다고 생각되어서 감독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애착작품 및 사유
감독이 영화를 만드는 것(과정)을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한 것에 비유한다. 아이가 태어날때 즉, 햇볕을 볼 때까지 인고의 과정을 겪는 것. 자식들 중에서도 잘난 아이보다 부족한 아이에게 어머니가 더 애착을 갖듯 나도 생각대로 만들지 못해 아쉬움이 생기는 작품인 "초립동", "제3의 청춘", 남진이 주연의 "울고넘는 박달재"등에 더 많은 애착을 가지고 있다.
영화속 명소
영화를 찍을 당시에 좋았던 명소를 찾아 길을 떠나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다시 찾아가보면 우리문화를 아끼지 않아서 대부분 보존되어 남아 있지 않았고, 생소하게 달라진 모습만 볼 수 있어서 무척 아쉬웠다. 다소 명소로써 보존되어 있는 곳이라면 손 댄다고 해도 변하기 힘든 폭포들, 그리고 "석굴암"정도라고 이야기하며 우리도 이제 외국처럼 문화의 소중함을 제대로 깨닫고 명소로써 보존, 발전시켜아 할 것이다.
추구하는 스타일/배역
액션, 멜로, 코메디등 거의 모든 장르의 영화를 찍어보았다. 특히 대중적, 해학적이면서 눈물이 있는 코메디를 주로 만들었다.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서 감독이 될 수 있었지마는 열악한 환경등 제약때문에 정말로 하고 싶은 영화는 찍지 못했다. 만약 지금의 나이보다 젊다면 서로가 함께 풀어나갈 수 있는 "사회 풍자적인 미스테리 영화"와 "종교 철학적 의미 부여가 가능한 영화"제대로 찍어보고 싶다. 그래서 요즘 젊은 감독들에게 "좀 더 공부하고 뭔가 색다른 것을 찾으려고 노력해서 배우들에게 연연하지 않는 자기가 추구하고자 하는대로 밀고 나가는 감독이 됐으면"하고 말하고 싶다.
수상내역(영화)
1966년 국제영화사 한국최우수희극감독상/
1967년 영화민예사 한국최우수희극감독상/
1968년 한국연예기자 핑크리본상 희극감독상/
1997년 (사)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문화예술상(공로상)/
1999년 한국영화인협회 공로상/
2003년 부천시 부천시문화예술상/
2005년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 경기도지회 제17회 경기문화예술대상 영화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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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카메라를 든 감독 심우섭’을 회고하며 언제 어디서나 카메라를 지니고 다니며 부지런히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내던 노감독이 있었다. <청춘사업>(1965), <남자식모>(1968) 등의 코미디 영화로 유명한심우섭 감독이다. 그가 지난 5월 14일 89세 나이로 별세했다. 이른 아침, 저장해놓았던 심우 ... by.공영민(영화사연구자) 2015-08-02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7년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인인줄 알고 살아오다, 해방되던 해 한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어머니의 말에 함께 귀국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 일본에서 배웠던 토목기술을 이용해 측량을 하거나, 공사현장 등에서 일했으며, 전쟁이 발발하던 20대 초반 부산에서 사진관을 연다(한국영화를 말한다). 이때 부산에 모여든 영화인들과 친분을 쌓고, 휴전 이후에는 서울로 올라가 국회 사진부에서 일하다가 사진관을 낸다. 그러던 중 홍성기 감독의 <애인>(1956)의 촬영부를 맡았던 이승모의 제안으로 영화계에 입문한다. 여기서 촬영과 편집일을 배우고 1958년 <모녀>의 촬영을 맡고, 1959년 <백련부인>으로 감독 데뷔한다. 고고학자와 발레리나의 사랑을 다룬 이 영화에서 카메라를 핸드헬드로 촬영하거나, 쓰러지는 인물과 함께 카메라를 쓰러뜨리는 등 다양한 카메라 워킹을 실험하나 흥행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이후 <검은 장갑의 여인>(1962), <억세게 재수좋은 사나이>(1962), <민들레꽃도 봄이면 핀다>(1963) 등 미스테리, 코미디, 멜로드라마, 공포 등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연출한다. 1965년의 <청춘사업>으로 12만의 관객을 동원하며 인기 감독이 되었고, 그해 연출한 <주책바가지>를 통해 '서민의 삶을 바탕으로 그들의 웃음과 눈물, 그리고 무엇보다 '꿈'에 맞닿아 있어야 한다는... 최초의 작가정신'을 자각하며, 본격적으로 코미디 장르에 발을 들여놓는다(씨네21). 1968년 <남자식모>는 20만이 넘는 관객을 동원하며, <남자미용사>(1968), <남자와 기생>(1969) 등 남자' 시리즈를 유행시킨다. 이후 <팔푼이 며느리>(1968), <팔푼이 사위>(1968), <팔푼이 부부>(1969) 등 '팔푼이' 시리즈, <팔도 노랭이>(1970), <팔도 며느리>(1970), <팔도 주방장>(1987) 등의 '팔도' 시리즈를 연출한다.1960년대 양훈, 구봉서 등을 거쳐, 1970년대 중반 무렵 배삼룡을 주연으로 야마다 요지(山田洋次) 감독의 <남자는 괴로워 男はつらいよ> 시리즈와 같은 연작을 구상하기도 하여, <나의 인생고백> 연작을 연출하기도 하나 두 편으로 그치게 된다(씨네21). 1999년부터는 부천 국제판타스틱 영화제 부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다.

* 참고문헌
심우섭, “한국영화회고록-심우섭편”, 『씨네21』, 291~304호(2001년 3월 16일~2001년 5월 30일)
한국영화연구소편, 『한국영화를 말한다-한국영화의 르네상스3』, 한국영상자료원, 2007

[정리: 황미요조]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33년 일본에서 태어나 오노다 공업학교 토목과 졸업. 한국전쟁 시절 부산에서 사진관을 경영하면서 피난 온 영화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종전 후 그들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다시 사진관을 운영했다. 평소 영화에 관심이 많아 촬영장을 들락거리다 1955년 홍성기 감독의 <애인> 촬영부로 편집을 담당하면서 영화감독을 결심한다. 1959년 고고학자와 발레리나의 사랑을 다룬 데뷔작 <백련부인>은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카메라의 움직임과 내용을 대사나 문학적인 요소에 의존하지 않고 영상적인 화면을 통해 전달하려는 실험적 노력이 돋보인 작품이다. 다음 작품은 전라도 남원을 배경으로 기생들과 창을 소재로 한 <초립동>(1962). 두 편 모두 야심 차게 준비했으나 결과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청춘사업>(1965)은 12만의 관객을 동원하며 심우섭이 고대하던 흥행에 크게 성공한다.
데뷔한 이래 약 68여 편의 영화를 감독한 그는 멜로, 액션, 코미디 등 모든 장르를 두루 섭렵하는 다재다능함을 보였다. <억세게 재수 좋은 사나이> <초립동> <청춘12열차> <검은 장갑의 여인>(1962), <하녀의 고백> <민들레꽃도 봄이면 핀다>(1963), <청춘사업> <주책바가지>(1965), <귀하신 몸> <꿩 먹고 알 먹고><흰 벽 검은 벽> <청춘행진곡>(1966), <처녀귀신>(1967), <남자식모> <대머리총각> <울고 넘는 박달재>(1968), <억울하면 출세하라> <특등비서>(1969), <미쓰 촌닭> <팔도며느리> (1970), <돈에 눌려 죽은 사나이>(1971), <나의 인생고백>(1974), <운수대통>(1975), <사대독자>(1977), <마음 약해서>(1979), <형님 먼저 아우 먼저> <난 모르겠네>(1980), <청춘을 뜨겁게> <여자는 괴로워>(1981), <바보들의 청춘>(1982), <여자가 더 좋아>(1983), <팔도 주방장>(1987) 등이 주요 작품이다.
그 가운데 특히 그가 애착을 가지고 몰두한 장르는 서민들을 주인공으로 한 해학적이면서도 삶의 애환을 보여주는 코미디였다. 가난한 삶의 문제를 유머러스하게 다루며 은근히 사회를 비판하는 <주책바가지>(1965)를 통해서 감동을 전달할 수 있는 진정한 코미디에 눈을 떴다고 술회한다. 그의 코미디는 감동과 눈물이 있어 큰 인기를 모으며 힘들었던 시대의 위안이 되었다. 형식적인 면에서도 여러 실험과 다채로운 화면구성이 눈에 띈다. 독학으로 여러 편집기법을 습득한 그는 몽타주, 음악적 리듬감을 강조한 편집 혼자의 힘으로 감독, 촬영과 편집, 사진, 음악 등 기술적인 부분을 해낼 수 있었던 까닭에 다작과 여러 실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었다. <즐거운 청춘>(1968)은 뮤지컬과 코미디를 결합시킨 작품으로 음악은 당시 신예 작곡가 정민섭이 담당하면서 한국영화 최초로 음악 감독이 된다. 이전 영화들에도 영화음악을 담당한 영화음악가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영화만을 위해 음악을 제작한 경우는 없었다. 김상희, 김세레나, 이정자, 자니 지, 양미라 등이 출연했으며 흥행에도 대성공을 거두며 심우섭은 흥행감독으로 입지를 다졌다.
이중 <남자식모>는 당시 적자에 허덕이던 ‘신필름’이 마지막 승부로 심우섭 감독에게 영화감독을 맡겨 흥행에 큰 성공을 한 영화. 호색가인 남편을 경계하기 위하여 아내는 남자식모를 들이기로 한다. 때마침 동생의 연구비 조달을 위해 고심하던 형구(구봉서)가 식모로 들어간다. 남자가 식모살이를 한다는 상황설정과 여러 가지 재미있는 사건들이 벌어진다. 특히 요리와 관련된 에피소드는 장안의 화제였다. 동생의 연구 활동이 끝나자 형구는 동생회사의 전무로 취직한다. 그리고 이웃집 식모였던 아가씨와 결혼도 하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녀는 식모가 아니라 그 집 주인인 사장의 딸이었다. 지금은 원로 코미디언인 구봉서가 능청스런 남자식모를 맡았으며, 남정임, 도금봉, 김희갑 등 호화 배우들이 대거 출연했다. 만화적인 요소로 표현한 크레딧과 익살스런 에피소드 등은 심우섭의 아이디어였다. 1970년 속편이 제작됐고 1979년 이형표 감독이 <남자가정부>로 리메이크 하는 등 시대를 넘어선 인기를 누렸다.
이후 <남자미용사>(1986), <남자와 기생>(1969)의 남자 시리즈, 실수연발의 사랑스런 팔푼이 주인공을 등장시킨 <팔푼이 며느리>(1968), <팔푼이 사위>(1986), <팔푼이 부부>(1989) 시리즈와 인기TV드라마 <팔도강산>에서 착안한 <팔도 노랭이>(970), <팔도 며느리>(1970), <팔도주방장>(1987)의 시리즈물을 연출했다.
장르 기반이 약한 한국에서 특히 코미디는 저질 운운하며 무시하는 경향이 컸던 것도 사실이었다. 심우섭도 늘 이런 부담감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제작자와 관객도 그에게는 중요했다. 현실에 지친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작업은 그에게 천직과도 다름없었다. 흥행에 과도하게 치우치면서 상업적인 영화를 양산하며 관객의 취향을 저속하게 몰아갔다는 비판의 일면도 있지만 일상적인 생활에서 묻어나는 소박한 웃음을 강조한 코미디로 195,60년대 그의 영화들은 수많은 관객들에게 위안을 주었다. 1999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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