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초록 물고기 이창동, 1997

by.안시환(영화평론가) 2017-04-24조회 8,929
초록 물고기 스틸

이창동의 데뷔작 <초록물고기>(1997)는 흔히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로 불렸던 2000년대 한국영화의 이정표를 제시한 작품이다. 한해 먼저 개봉한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홍상수, 1996)이 비 장르적인 작가주의 영화의 계보에 위치한다면, <초록물고기>는 작가적 성향을 짙게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장르 영화의 관습으로 풀어내곤 했던 2000년대 한국영화의 흐름을 선취하고 있다. <초록물고기>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임권택박광수로 대표되는 리얼리즘 영화의 끝자락에서 박찬욱, 봉준호, 류승완, 김지운으로 대변되는 ‘한국형 장르영화’의 시작을 이끈다. 즉, <초록물고기>는 하나의 끝에서 또 다른 하나의 시작을 가능하게 하는 ‘매듭’ 같은 영화다.

소설가 시절부터 이창동은 사회적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삶의 아이러니를 포착하는 데 관심을 보이곤 했다. 23평 아파트에 담긴 평온한 삶을 이루기 위해 한평생 노력했건만, 그것이 ‘오물과 증오’ 위에 아슬아슬하게 세워진 거짓에 불과했음을 깨달아야 하는 주인공을 앞세운 중편소설 <녹천에는 똥이 많다>에 드러나는 것처럼, 이창동에게 도시는 순결함과 품위를 잃은 지 오래다. 아니, 그 역겨운 냄새를 억지로 버텨내야 하는 삶으로 가득한 곳이 도시다. 이창동이 이러한 관심사를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장르는 필름 누아르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어두운 그림자로 삼켜버리는 도시의 탐욕을 그려내는데 필름 누아르만한 장르가 또 어디 있겠는가. <초록물고기>는 필름 누아르 작품임에 분명하지만, 그가 소설가 시절부터 견지해왔던 작가적 세계관은 이 작품이 장르적으로 온전히 환원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렇게 <초록물고기>는‘장르적인 것’과 ‘작가적인 것’의 이질적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또는 사회적 주제와 영화적 표현 사이의 탁월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초록물고기>가 리얼리즘의 힘으로 장르의 전형성을 돌파할 수 있었던 궁극적 동력은 무엇보다 ‘공간’의 힘에서 비롯된다.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일산’과 ‘영등포’는 단순한 영화적 배경이 아니다. <초록물고기>는 영화의 공간이 하나의 인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속 일산과 영등포는 한국의 도시 개발의 역사와 그 이면, 그로 인한 계급적 변화,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탐욕스러운 자본과 그 희생자의 아련한 슬픔까지도 표상하는 데 성공하고, 그것은 1990년대 발표된 한국영화가 쉽게 이루지 못한 영화적 성취이다. 

막동이(한석규)는 변화하는 도시에서 밀려난 자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신도시 개발과 함께 아카시아가 흐드러지게 피던 땅은 회색빛 아파트가 대신하고 있다. 옛날 막동이네 가족이 발붙이고 살던 땅은 신도시 개발과 함께 몰려든 이주민의 땅이 되었고, 토박이였던 막동이(와 그의 형)은 계란을 팔기 위해 그곳을 잠시 들려야 하는 이방인으로 전락한다. 영화의 초반부, 군에서 제대한 막동이는 ‘대곡역’에서 어디로 나가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다. 터전에서 오히려 이방인이 된 인물, 도시의 변화에 발맞추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인물이 바로 막동이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자본의 시대는 그렇게 뒤처진 자들을 동정할 만큼 자비롭지 않다. 막동이는 반복해서 거울을 바라본다. 도시의 뒷골목에서, 그 탐욕의 거리에서 자신이 잃어가는 것이 무엇인지 일일이 확인하려는 듯 그는 거울을 보고, 또 본다. 그것이 성찰적 행위처럼 비쳐지는 이유는 <초록물고기>에서 자신이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되살리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막동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배태곤(문성근)의 욕망에서 드러나듯, 탐욕스러운 도시는 모든 것을 허물어 하늘에 닿을 마천루를 쌓는 일에만 관심이 있다. 그러기 위해 과거는 허물거나 지워야 한다. 그것이 막동이가 죽어야 하는 이유다. 막동이는 근대적 도시의 완성, 또는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짓밟고 망가뜨려야 했던 모든 것이고, 그것이 바로 ‘초록물고기’라는 제목이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록물고기>가 그런 막동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애처로움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초록물고기>의 영화적 가치는 이러한 멜로드라마적 파토스 앞에서도 자신의 작가적 태도를 좀처럼 양보하지 않는 고집스러움에 있다. 막동이의 죽음 이후, 배태곤과 임신한 미애(심혜진)는 막동이네 가족이 운영하는 일산의 식당을 찾는다. 막동이의 유일한 바람은 가족끼리 모여 조그마한 식당을 운영하며 사는 것이었고 보면, 이 장면은 막동이의 바람을 (이창동이) 온전히 이루어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막동의 막내 여동생이 막동이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배태곤에게 “다음에 또 오세요. 잘해드릴게요”라고 말할 때, 이창동 특유의 잔인한 현실의 아이러니가 솟아난다. 영화의 엔딩마저도, 막동이네 가족의 식당과 그 뒤로 펼쳐진 신도시를 함께 보여주는 장면이다. 우리의 삶을 무너뜨리는 파괴자들을 오히려 환대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삶의 아이러니, 가해자와 피해자가, 또는 빼앗은 자와 빼앗긴 자가 ‘어쨌든’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삶의 아이러니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이러니한 순간의 포착과 그것의 영화적 표현은 이창동의 영화가 문학적이라는 지적이 그저 한낱 편견에 지나지 않음을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만 더 덧붙이자면, <초록물고기>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름 하나’를 남겼다. 막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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