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인생 김지운, 2005

by.김도훈(영화저널리스트,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2013-01-02조회 3358
달콤한 인생

<달콤한 인생>이 개봉했을 때 쏟아진 악평들을 아직도 기억한다. ‘스타일만 강조한 느와르’라는 표현은 일단 이해가 잘 가질 않았다. 느와르(Noir)라는 단어는 그 자체로 해당 영화의 스타일을 구분 짓는 잣대다. 영화학자 토머스 샤츠는 '스타일이 실체를 결정하고, 기운이 플롯을 압도하고, 내러티브성이 내러티브로 등장하고, 초점이 ‘무엇’에서 ‘어떻게’로 옮겨가며, 형식과 내용을 분리할 수 없게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간단명료하게 풀이하자면, 결국 느와르는 스타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느와르는 그저 스타일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느와르가 될 수 있지 않나? 화면이 어두침침하며 반영웅이 등장하면 그건 다 느와르일 수도 있다. <블레이드 러너>를 느와르로 구분하는 게 가능하다면 <토탈리콜>이 느와르가 될 수 없는 이유도 없다. 

<달콤한 인생>에 대한 가장 졸렬한 표현은 아마도 ‘청담동 느와르’였을 것이다. 청담동 느와르라니. 처음엔 그게 무슨 소리인지를 몰라서 한참을 갸우뚱거렸다(이건 부산 출신으로 2004년에 상경한 내가 서울 지리에 대해서 잘 몰랐던 탓일 수 도 있다). 술자리에서 들어보니 당시 충무로 사람들은 김지운, 박찬욱 등 몇몇 감독들을 ‘청담동 감독들’이라 부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뭐, 2005년 당시는 청담동이라는 동네가 90년대의 압구정동처럼 한창 뜨던 상태였으니 트렌드에 민감한 감독이 청담동의 새로 생긴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신작을 논의했을 수 도 있다. 아무리 그래도 청담동 느와르라니. 그렇게 따지자면 김조광수, 이송희일의 영화는 ‘낙원동 퀴어 시네마’고, 김태용, 민규동의 영화들은 ‘홍대 모던 시네마’인가? 

<달콤한 인생>은 빠르게 잊혀졌다. 흥행 성적은 무던했고 비평가들의 평가 역시 박했다. 여러모로 이 영화는 <장화, 홍련>과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사이의 어떤 어두운 구멍처럼 남아있다. 다만, <달콤한 인생>이 해외의 장르 영화광들과 비평가들에게 열렬한 사랑을 받으며 나름의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는 점은 거론하고 넘어갈 가치가 있다. 이를테면 한국의 비평가와 장르광들은 한국 호러나 느와르, 혹은 액션 영화에 대해 할리우드의 장르 클래식들로부터 무엇을 도용했는지에 대해 날카롭게 따지고 드는 경우가 있다. 오리지널리티에 대한 끈질긴 집착이라고 할 법도 하다. 그러나 <가위손>과 비슷하다는 이야기에 대해 <늑대소년>의 조성희가 말했듯이, 잘 알려진 장르영화의 플롯과 분위기는 결국 공공재다. 중요한 건 이 공공재를 얼마나 근사하게 자신의 세계 속으로 끌어들이느냐다. 

김지운은 자신이 느와르라고 생각하는 수많은 고전과 현대 영화들로부터 파편들을 가져온다. 여기에는 자신의 세계에서 가장 높은 자리까지 올랐다가 떨어져 내리는 반 영웅이 있고, 총을 들고 오가는 어둠의 사내들이 있고, 운명의 굴레에서 빠져 나오려는 여자가 있다. 김지운은 그 간결한 느와르 장르의 파편을 온전히 자기의 방식으로 밀어붙인다. 김지운의 방식? 끝내주는 폼의 추구다. 다들 알다시피 김지운은 폼을 잡는 감독이고, <달콤한 인생>은 김지운의 폼이 절정에 올랐던 영화다. 이를테면, 내가 영화 속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이병헌황정민이 (굳이) 아이스링크에서 만나는 시퀀스다. 그들이 아이스링크에서 만나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이병헌과 황정민의 근사한 목소리가 얼음에 반사되어 울려 퍼지고, 두 남자의 피가 하얀 얼음 위에 흩뿌려지고, 황정민이 얼음 위 흩뿌려진 피를 밟고 비틀거릴 때, 그 모골이 송연 할 정도로 근사한 폼은 도무지 거부할 도리가 없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김지운봉준호박찬욱이 이룩한 지점들을 뒤쫓는, 형식적인 아름다움에만 사로잡힌 2인자 정도로 지칭한다는 걸 익히 알고 있다. 글쎄. 내가 보기에 김지운은 두 감독과 전혀 다른 유형의 감독이다. 그는 이야기가 아니라 종종 하나의 이미지로부터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며 영화적 아이디어를 출발시키는 듯 하고, 전체적인 이야기의 흐름을 끊어놓을지라도 뭔가 근사할 것 같은 시퀀스를 영화의 중간에 툭 던져 넣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앞서 이야기한 아이스 링크 장면, 혹은 <악마를 보았다>의 산장 결투 장면 같은 것 말이다). 그건 종종 불연속적이고 불균질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악마를 보았다>에 이르러서는 그런 결점 자체가 김지운 영화의 독특한 장점이 된 게 틀림없어 보인다. 

고백하건대, 나 역시 <달콤한 인생>이 개봉했을 당시에는 김지운 영화의 연속적인 특징에 대해서 온전히 깨닫지 못한 상태였다. 지금 와서 돌아보자면 <달콤한 인생>은 김지운이 추구해 온 ‘김지운적 (폼의) 페스티시’를 가장 달콤하게 스크린에 살려낸 영화다. 만약 김지운이라는 이름이 고전으로 남는다면, <달콤한 인생>은 그 이름을 대표하는 고전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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