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고선애 - 배우

by.김한상(한국영상자료원 연구원) 2012-07-06조회 3,572

김기영 감독의 영화 <하녀>를 말할 때 주로 강조되는 것은 주인공 동식(김진규) 부부의 2층 양옥 안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이지만, 이 영화의 분위기를 주조하는 것은 비단 이 밀폐된 공간만이 아니다. 초반부 동식과 여공 곽선영(옥경희) 사이의 에피소드는 뒤에 이어질 동식의 운명을 예견케 하는 복선인 동시에, 상경한 여성들의 불안정한 지위와 이를 방치하는 비정한 사회를 보여주는 독립된 사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곽선영에게 정직 처분을 내리는 사감 선생으로 나오는 이가 바로 고선애(高善愛)다. 동식의 신고에 처벌을 잠시 주저하지만 사감실로 불려온 선영에게 정직 처분을 통보하는 그녀의 표정은 단호하다. 이 장면에서 무엇인가 분위기를 압도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고선애의 얼굴이다. 양미간의 찌푸린 주름과 직삼각형 모양으로 힘을 준 눈매, 깎아지른 양볼 위로 윤곽이 드러나는 광대뼈, 그리고 단호하게 다문 작지 않은 입은 뒤돌아 서 있는 곽선영의 처연한 어깨와 확연히 대비를 이룬다. 그 입술 사이로 굵고 건조한 그녀의 음성이 ‘에누리’가 있을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이처럼 고선애는 특유의 인상과 목소리로 프레임을 장악하는 힘을 지닌 배우였다. 이를 알아본 것은 역시 김기영 감독이었던 것 같다. 고선애가 본격적으로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한 첫 작품은 김기영의 두 번째 장편 <양산도>였고 이 작품에서 그녀는 억울하게 죽음을 맞은 아들을 둔 어머니로 나온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필름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반 실성한 상태로 아들 수동(조용수)의 무덤 앞에서 곡을 하다가 혼례 가마를 타고 그 앞을 지나는 아들의 연인에게 비수를 꽂는 여인을 연기한다. 탈춤을 추며 언덕을 올라오는 혼례 행렬과 그 사이로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가는 수동 어머니, 칼을 맞고 수동의 무덤으로 기어가는 옥랑(김삼화)의 모습이 연극적으로 이어지는 이 장면에서 고선애는 원시적인 모성을 발산하며 내러티브를 주술적인 단계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한다(이 직후에 옥랑과 수동의 영혼이 줄을 타고 승천 하는 장면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로서는 필름이 유실되어 볼 수가 없다).

1911년 함경남도 북청(北靑)에서 태어난 고선애는 대구고등여학교를 졸업한 후 한동안 교편을 잡은 적이 있는 인텔리 여성이었다. 스물넷이 되던 해에 순회공연 중심으로 신파극과 희극을 주로 상연하던 극단 신무대(新舞臺)에 입단하면서 무대생활을 시작한 것이 그녀를 배우로 살아가도록 바꿔놓았다. 해방 전까지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나 한때 극단 금성좌(金星座)를 경영했을 정도로 무대생활에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1949년 박제행(朴齊行), 고설봉(高雪峰) 등과 함께 해군본부 정훈감실 보도과 소속으로 극단 예술극회(藝術劇會)를 창립해 활동했으며, 국방부 정훈국 후원으로 제작되어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21일에 개봉한 영화 <나라를 위하여>를 통해 영화 데뷔했다. 전쟁 중에는 피난지 부산에서 신극무대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전쟁이 끝난 후 1955년에 <구원의 애정>과 <양산도>를 통해 영화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녀의 비범함을 알아본 김기영 감독의 작품과는 달리 다른 대부분의 작품에서 고선애는 비중이 적은 단역을 맡아야 했다. 작은 역할일지라도 연기의 폭은 상대적으로 넓은 편이었는데, 평범한 아낙네에서부터 교사처럼 지적인 여성이거나 상층계급의 부인까지 소화해냈다. 열사 유관순의 이화학당 스승(<유관순>)이나 YWCA 총무(<상록수>)처럼 식민지 시기의 엘리트 여성 역할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은 교편을 잡았던 배경 덕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하면 <양산도>의 비극적인 어머니라든가 <서울의 지붕밑>에서처럼 미신을 믿는 교육수준이 낮고 가난한 아낙 역할도 어색하지 않았다.

그녀만의 장기가 발휘된 작품은 상대적으로 드문 편이었는데 신필름의 영화들은 그런 그녀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본처들의 모임 ‘꿀벌회’의 회장으로 단호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로맨스그레이>나 YWCA 총무로서 농촌계몽을 위해 젊은 학생들을 불러모아 가르치는 백현경 역할을 맡은 <상록수>는 고선애의 지적인 인상을 정형화해서 사용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이 기회를 십분 활용했다. 신상옥 감독의 눈에 들었던 것인지 큰 역할은 아니더라도 지속적으로 신필름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고 그런 그녀를 ‘신상옥 사단’이라고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일찍부터 <천지유정>이나 <언제까지나 그대만을>로 한·홍합작 영화에 출연했던 그녀는 신필름의 합작영화 제작에도 함께 했다. <대폭군>, <반혼녀>, <흑발> 등 필모그래피 후반의 영화들 상당수가 합작으로 만들어진 작품들이며, 특히 <반혼녀>에서는 주인공 연화(리칭)의 한을 풀어주기 위해 이승과 저승을 잇는 주선자 역할을 하는 늙은 유모로 극을 끌어가고 있다.
 
/ 글: 김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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