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Kim Ki-young / 金綺泳 / 1919  ~  1998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시나리오
활동년대
1950, 1960, 1970, 1980,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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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모그래피 (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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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천사여 악녀가 되라(죽어도 좋은 경험) (김기영, 1990)
육식동물 (김기영, 1984)
바보사냥 (김기영, 1984)
자유처녀 (김기영, 1982)
화녀 82 (김기영, 1982)
반금련 (김기영, 1981)
느미 (김기영, 1979)
수녀(水女) (김기영, 1979)
(김기영, 1978)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김기영, 1978)

주요경력

1946년 고려예술좌 창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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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19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했다(국제영화). 재학중이던 1947년 서울대 연극부를 중심으로 구성된 국립대학극장(國立大學劇場)에서 연출가로 활동했으며, 1949년 세브란스 의대와 통합하여 창립된 고려예술좌(高麗藝術座)에서도 활동했다(경향신문a, b, 동아일보b). 전쟁이 나자 부산에서 피난생활을 하던 그는 선배 오영진의 제안으로 <대한뉴스>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하며, 이를 발판으로 주한미국공보원으로 스카우트 되어 <리버티뉴스>와 문화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했다(이효인). 미공보원의 리버티프로덕션에서 <사랑의 병실>(제작년도 미상), <나는 트럭이다>(1954), <수병의 일기>(1955) 등의 단편 문화영화를 만들던 그는 1955년 장편 극영화 <죽엄의 상자>를 미공보원 제작으로 완성했다(김한상). 이를 발판으로 상업영화에 뛰어든 그는 <양산도>(1955), <봉선화>(1956), <황혼열차>, <여성전선>(1957), <초설>(1958) 등으로 흥행 면으로나 비평에 있어서나 주목 받았으며, <10대의 반항>(1959)은 특히 좋은 평가를 받았다(동아일보a). 이듬해인 1960년에 만든 <하녀>는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이후 본인이 리메이크하거나 변형하여 만들게 될 <화녀>(1970), <충녀>(1972), <화녀 82>(1982), <육식동물>(1984) 등의 원형이 되었다. 1961년작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한운사의 원작을 바탕으로 만든 대하드라마이며, 그 다음 작품인 <고려장>(1963)은 ‘고려장’ 이야기를 모티프로 독특한 세계관을 펼쳐 보인 작품이다. 제작과 감독을 종종 겸하였으며, 당대의 다른 감독들과 달리 한 해에 한 편 정도를 연출하는 과작의 경향을 보였다. 1970년대 초반 <화녀>와 <충녀>를 통해 다시 전성기를 맞았으나, 제작비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며, 특히 <반금련>(1981)은 본래 기획에서 상당한 분량이 삭제되기도 했다. 1990년작 <천사여 악녀가 되라> 이후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으나, 1997년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을 계기로 젊은 관객들의 큰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에 고무 받아 다음 작품 <악녀>의 제작 준비에 들어갔다. 그러나 베를린영화제 특별전 초청을 앞두고 있던 1998년 2월 불의의 화재로 부인과 함께 별세했다(동아일보c). 사후에도 많은 회고 행사를 통해 재조명 받았으며, 봉준호, 박찬욱 등 젊은 감독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씨네21).

* 참고문헌
경향신문a 1947년 10월 29일자 2면
경향신문b 1949년 1월 15일자 3면
동아일보a 1959년 7월 17일자 4면
동아일보b 1973년 11월 27일자 5면
동아일보c 1998년 2월 6일자 10면
韓國映畵人百人選(一), 『국제영화』제4권 제10호(1958년 12월 발행).
아는 영화, 낯선 감상, 『씨네21』제717호(2009년 8월 발행).
김한상, 「냉전체제와 내셔널 시네마의 혼종적 원천」, 『영화연구』 제47호, 87-111쪽.
이효인, 『한국의 영화감독 13인』, 열린책들, 1994, 368-371쪽.

[작성: 김한상]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호적상으로는 1919년생. 경기전문학교를 나와 소학교 교사를 지낸 김석진과 경기여전 출신인 한진초의 1남 2녀 중 외아들로 서울 교동에서 태어났다. 교동소학교를 다니던 3학년 때 평양으로 옮겨 종로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평양고보에 진학. 1940년에 학업을 마친다. 글솜씨가 뛰어나 중학교 때 쓴 시가 일본신문에 게재되는가 하면, 틈틈이 그린 그림이 1등으로 뽑히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미술 교사로부터 “김군은 재주가 너무 많아. 그걸 모두 할 수 있는 직업은 소학교 선생밖에 없네”라는 말을 들었다. 이에 자극받아 학과 공부에도 전념. 주위로부터 ‘물리학 박사’라는 소리까지 듣게 된다.
해방 후 경성치과의전(현 서울대 의과대학)에 들어갔으나 전공 과목보다는 호국대 문화부장으로서 서울대 통합 연극반을 창립하는 등 연극 운동에 주력했다. 대학시절 고려예술좌를 창설(1946)하고 자신의 작품세계에 영향을 미친 헨리 입센의 <유령>을 비롯하여 <베니스의 상인>,<암로>등을 연출, 호평을 받았다. 특히 <유령>은 기성 연극 수준을 뛰어 넘는 가작이라는 평가로 화제를 모았다.
서울대학 졸업 후 6.25 전쟁을 겪으며 피난지인 부산에서 대학선배인 오영진의 소개로 미국공보원 영화제작소 수석 시나리오 작가 겸 연출가로 들어가 <리버티 뉴스>등을 5호까지 만들었다. 이를 계기로 1955년 최초의 동시 녹음 영화 <주검의 상자>를 연출, 감독의 길에 들어선다. 최무룡,강효실 주연의 <주검의 상자>는 민심을 교란할 목적으로 암약하는 공산주의자의 아지트로 침투하여 시한폭탄을 장치하다가 붙잡힌 마을 청년이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순간 폭탄이 터져 일당을 몰살케 한다는 내용의 반공영화이다.
같은 해 김삼화,김승호 주연인 자결로 마무리한 사랑의 비극 <양산도>에 이어 한 여자를 둘러싼 삼각관계의 파국을 그린 <봉선화>(1956), 가정부와 주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의 기구한 인생 역정 <여성전선>(1956)을 선보이고, 김지미와 안성기를 배출한 <황혼열차>(1957)를 발표하였다. 그가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전후 폐허가 된 도시 빈민굴을 무대로 한 <초설>(1958), 남대문 주변의 부랑아 문제를 다룬 일곱 번째 극영화 <십대의 반항>(1959)을 내놓으면서 부터였다.
<초설>은 ‘비참한 집단 절도행위’를 그린 영화다. 그러나 거기에는 누가 함부로 그들에게 돌팔매질을 할 수 없는 생존의 절실함이 짙게 배어 있다. 기차역 안에 쌓인 석탄을 몰래 훔쳐 팔아 생계를 잇는 빈민들이 역구내의 확장공사로 삶의 수단을 잃게 되자 반항을 포기하고 살길을 찾아 뿔뿔이 떠난다는 것이 그 줄거리이다. <십대의 반항>은 어린 부하들에게 날치기 따위의 좀도둑질을 시키며 괴롭혀 온 뒷골목 패거리의 우두머리가 단속경찰의 추적과 왕초의 압력에서 빠져나와 꼬마 부랑자를 가정의 품으로 보내고 자신도 악의 세계에서 발을 빼는 모습을 보여준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구원 대신 구걸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도시 부랑아의 절박한 현실을 날카롭게 파헤진 가작이다.
남편과 불륜의 관계를 맺은 가정부가 단란한 가정을 파멸시키는 아홉 번째 작품 <하녀>(1960)를 정점으로 그는 당대의 라이벌 감독인 신상옥, 유현목과 함께 한국영화를 주도하는 트리오를 형성하게 된다. 이 작품을 계기로 김기영의 카메라는 사회 밑바닥에서 가정으로 옮겨진다. 어느 날 백치에 가까운 가정부가 들어오면서 한 집안이 파국을 맞게 되는 이러한 실내극적 요소는 이후 그의 작품형성에 필수용건으로 작용한다.
이 작품은 <초설>,<십대의 반항> 그리고 서울역 소매치기들이 도시의 복구작업과 함께 뿌리를 잃고 희망없는 나날을 보내는 <슬픈 목가>(1960)에서 보여준 비판적 리얼리즘의 성향을 특유의 독창적인 표현주의로 전환시키는 고비가 되었을 뿐 아니라, <화녀(火女)>(1970),<충녀(蟲女)>(1972),<육식동물>(1984)로 이어지는 악녀 연작의 출발점이 된다. 파격적인 상황설정, 비일상적 대사, 뒤틀린 욕망, 성적 억압에 시달리는 중산층의 심리묘사에 집요하게 매달린 그의 작품은 한운사의 대표적인 라디오 드라마 원작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늙으면 자식에 의해 버려지는 사회인습의 폭력 <고려장(高麗葬)>(1963)등에 이르러 기괴한 사디즘의 양상을 띈다.
그는 이와 같은 특징을 유지한 채 30년 동안 <아스팔트>(1964),<병사는 죽어서 말한다>(1966),<렌의 애가>(1969),<파계>(1974),<육체의 약속>(1975),<이어도>(1977),<살인 나비를 쫓는 여자>(1979)등 31편을 내놓았다. 그중 제작을 겸한 작품도 <봉선화>(1956), <하녀>(1960), <고려장>, <느미>, <수녀>(1979), <자유처녀>(1982), <바보사냥>(1984),<육식동물>(1984)등 8편에 이른다. 그러기 위해 김기영 프로덕션과 신한문예 영화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네오 리얼리즘에 영향을 받아 분단과 전쟁을 겪은 1950년대의 궁핍한 사회상황을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그려낸 초기작품과는 달리 인간을 성악적 시각으로 접근하여 독특한 표현주의를 이끌어 낸 <하녀> 이후 대부분의 영화들은, 집도 의사의 생체 해부처럼 섬뜩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의 작품 소재는 부정적인 인격으로 전형화된 여성의 심리에 맞춰져 있다. 여성의 성격파탄에 초점을 맞춘 <화녀>나 <충녀>,<육식동물>등은 본능적인 욕망과 성적 억압을 주축으로 인간의 숨겨진 악을 드러낸다. 그러나 인간욕망에 대한 탐구는 <하녀>와 <충녀>처럼 개인의 문제로 머물지 않고, <현해탄은 알고 있다>, <고려장>의 예에서 보듯이 집단이나 인습적 사회제도로 희생되는 양상으로 발전한다. 일본군으로 징용된 아로운이라는 한국청년이 겪는 새디즘적 폭력, 이를테면 상관인 모리에 의해 군화를 핥고 개처럼 끌려 다니거나(현해탄은 알고 있다) 일 할 능력이 없는 노인네들이 산 속에 버려지는 따위(고려장)가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여성의 모습을 다른 각도에서 부각하기 시작한다. 이만희의 <만추>(1966)를 리메이크 한 <육체의 약속>(1975)에선 여죄수의 마지막 약속을 통해 구원을 호소하는가 하면, 벙어리 여인의 세 남자와의 연정을 그린 <느미>(1980)에 이르러서는 운명을 수용하는 피동적인 여인상으로 묘사한다. 이는 공격적인 악녀 시리즈와는 다른 접근방식이라 할 수 있다. 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 내면에 잠재하는 일그러진 마성의 충동이다. 그는 1984년 <육식동물>을 끝으로 현장을 떠날 때까지 김삼화(양산도,1955), 김지미, 안성기(황혼열차,1957), 이은심(하녀,1960), 김운하(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윤여정(화녀,1970)등 유수한 배우들을 양성하였다. 그는 일찍이 작가주의적 개성과 성향을 드러낸 보기드문 스타일리스트였다. 사회에 대한 주관적인 시각과 스타일의 일관성은 작가주의가 도입되기 어려웠던 ‘주문제작’시절에도 ‘작가감독’으로서 자리를 지켰다.
평소 격식을 싫어한 그의 유일한 공직은 말년에 얻은 예술원 회원이었다. 1997년엔 ‘김기영 회고전’이 부산국제영화제의 하나로 열려 새롭게 평가받고 외국 영화인들로부터도 큰 주목을 받았으나 1998년 2월 25일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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