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마을 Village of Haze 임권택, 1982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3-05-15조회 20,143

.... (계속) 그리고 임권택은 <안개마을>을 찍기 위해서 재빨리 오던 길을 돌아왔다. 다행히도 아직 첫눈은 내리지 않았다. “원래는 시간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요. <나비 품에서 울었다>를 찍은 것도 속초에서 시작해서 삼척을 거쳐 도계에서 단양으로 넘어가는 길을 찍고 난 다음 <안개마을>을 찍으러 돌아오면 된다는 생각을 한 거지요. 그런데 그냥 두 개가 서로 겹치면서 그게 그렇게 안 된 거요. 그때는 우수영화가 되면 외국영화 쿼터를 주었잖아요. 화천공사에서는 한편 찍으면 그걸로 우수영화 넣고 그게 되면 하나 수입할 생각이었는데 이제 날짜가 막 쫓기고 그러니까 거의 포기하면서 박종찬 사장이 내가 있는 데서 들으라고 에이, 다 틀렸네, 그러면서 짜증을 내는 거요. 그래서 나도 오기가 생겨서 아, 그거 찍으면 될 거 아뇨, 하고 촬영에 들어간 거요. 처음엔 20일 정도면 찍을 거라고 생각했죠. 시나리오를 보면 계산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촬영을 12일 만에 마치고 눈이 내리는 걸 기다리는데, 거기서 눈이 오는 장면이 꼭 있어야 하는데, 그게 또 안 내리는 거요, 그냥 거기서 또 열흘을 논 거요. 날짜가 있으니까 그래서 일단 그걸로 편집해서 검열을 넣고, 나중에 다시 내려와서 눈 내리는 장면을 보충촬영해서 바꿔 넣은 거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구태여 우회할 필요가 있을까. <안개마을>은 순식간에 찍은 영화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그걸 느낄 정도이다. 영화는 음악이 아니기 때문에 그걸 즉흥연주 하듯이, 마치 세션을 벌이듯이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다. 


맨 처음에는 이문열의 단편소설 <匿名의 섬>(이문열은 이 소설의 제목을 ‘그렇게’ 썼다) 이 있었(을 것이)다. 계간 ‘세계의 문학’ 1982년 봄호에 발표한 고작 17장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소설이다. 물론 작품의 깊이와 길이는 서로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고작, 이라는 말을 한 것은 이 길이의 단편 소설로 장편 영화를 찍어야 한다는, 영화 쪽의 입장에서만 생각한 놀라움 때문이다. 나는 영화를 먼저 보았고 그런 다음 소설을 읽었다. 말하자면 반대의 순서. 두 개의 텍스트. 두 개의 작품. 시간적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반대의 방향. 임권택에서 이문열에로, 영화에서 소설에로. 참 이상한 일이다. 이 둘은 서로 전혀 다른 활동이기 때문에 이쪽에서 저쪽을, 물론 반대로 말하는 것도 항상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상하게도 이 짧은 단편소설이 1시간 31분 동안 계속되는 영화보다 훨씬 길다는 인상을 받았다. 나는 지금 우열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여기서 길다는 말조차도 바보 같은 설명이다. 소설에서 지속되는 독서의 시간을 영화에서 제한된 물리적 관람의 시간과 비교하는 것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둘 사이에 놓인 차이를 소설과 영화, 혹은 이문열과 임권택으로 설명하는 대신, 오히려 독서의 장소에서 내가 보낸 시간과 영화의 시간에서 내가 바라본 시간 둘 사이의 불일치, 이쪽과 저쪽 사이의 명백하게 드러난 효과의 경계를 자꾸만 희미하게 지워나가는 분산, 그저 드러난 차이 바깥에서 활동하는 차이, 그 사이에 놓여있는 어떤 나선, 때로 알 수 없는 긴장관계의 효과, 거의 피할 수 없을 만큼 저쪽이 이쪽을 끌어당기는 텍스트 안에 내재한 요구들과 제약들, 그것들이 중얼거리는 둘 사이에서 일어나는 시간의 형식 혹은 움직임에 대해서 따라가 볼 생각이다. 


이문열의 시작. (소설) “쯧쯧......” 늦은 저녁을 마친 뒤 TV를 보고 있던 남편이 한심한 듯 혀를 찼다. 짐작한 대로 화면에는 두 손이나 옷깃으로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린 남녀들이 경찰서 보호서 한구석에 몰려 있는 모습이 여러 각도로 잡혀 있었다. 도박인가 싶었으나 비밀 댄스홀이었다. 대낮인데도 어둑한 조명 아래서 춤을 추다가 끌려왔다는 것인데, 아나운서는 ‘춤추다’라는 말 대신 남녀가 몸을 부비고 있었다고 표현함으로써 분위기를 더욱 부도덕하고 선정적(煽情的)인 것으로 이끌고 있었다. “도대체가 우리 시대는 너무 쉽게 익명(匿名)이 될 수 있어서 말이야” 남편이 그걸 보며 개탄조로 시작했다. 이미 몇 번인가 들은 말이어서 그 뒤는 듣지 않아도 어림잡을만 했다. 도회에서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로부터 버스 정류장 하나만 벗어나도 우리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어지고 만다. 그런데 손쉽게 자기를 감출 수 있다는 것, 즉 익명성(匿名性)의 획득은 사람들을 대담하게 만든다. 그것이 우리 시대의 도덕적 타락, 특히 여성들의 성적(性的) 부패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남편은 대개 이런 식으로 몰고 가다가 결론은 그가 자린 고향의 동족부락(同族部落)을 그리워하는 것으로 맺곤 했다. “면(面) 전체가 서로서로를 물밑 들여다보듯 아는 사이지, 그것도 태반은 멀건 가깝건 혈연으로 묶여있어, 여자들의 탈선이란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엄두도 못 낼 일이야, 가끔씩 읍내를 이용해 보지만 그것도 이르든 늦든 알려지게 되어 있어.....” 하지만 남편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내게는 무슨 반발처럼이나 떠오르는 옛 일이 하나있다. 마땅히 남편에게 죄스러워하고, 어쩌면 스스로도 부끄럽게 여겨야 하지만, 지금은 물론 그때조차도 그저 아득하기만 한 하던 십여년 전의 일이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시작이다. 

영화에는 이 대목이 전부 없다, 물론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오면서 어떤 페이지는 남아있고 어떤 페이지가 사라지는 것은 신기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문열임권택은 같은 이야기 안에서 시간을 다른 방법으로 다루고 있다. 막 저녁을 먹고 난 그 어느 날, 아마도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내 곁에서 남편은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뉴스 시간. 그걸 보며 남편이 혼자 하는 말을 들으면서 아내는 십여 년 전의 일을 떠올린다. 나는 이 문장을 영화적으로 다시 옮겨 쓰고 싶다. 즉각적으로 번역되는 첫 번째 인상. 마치 새어나가는 듯이 다른 삶의 시간 속으로의 도피 기계가 작동하는 장면. 이 말의 방점. 장면, 혹은 광경. 남편의 부주의한 시선. 아마도 등을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활동하기 시작하는 아내의 은밀한 기억의 시간. 마치 눈에 보이는 듯한 배치. 마치 스크린 앞에서 화면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 그것이 꼭 묘사적인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손에 붙잡힐 것만 같은 문자들. 이 이야기는 아내가 남편 곁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떠올리는 플래시백의 형식 안에서 진행되는 기억의 시간이다. 이미 몇 번 들은 말이라면서 어림잡아 그 뒷말을 알 수 있을 만큼 남편은 이 이야기를 자주 했다고 한다. 청각의 신호에 관한 두 가지 설명. 남편은 면 전체가 물밑 들여다보듯 아는 사이일 뿐 더러 대부분 혈연으로 묶인 고장에서 자라났으며. 지금 도회에 사는 그는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러나 앞 대목이 사라지면서 남편의 향수도 영화에서 함께 지워졌다. 내게는 두 번째 설명이 훨씬 중요해 보인다. 아내는 남편 바로 곁에서 그 목소리를 들으며 지금 십여년 전의 일, 아직 그녀가 남편과 결혼하기 전, 그때 ‘군청 소재지에서 육십 리 가까이 떨어진, 그것도 그 너머에는 사람이 살 것 같지 않은 높고 험한 재를 두 개나 넘어야 하는’(소설) 산골에 자리한 국민학교(이 소설에는 초등학교를 그렇게 표기하고 있다)에 재임하던 시절, 깨철이라고 불리는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강간당하듯이 ‘그와 한 차례 정사(情事)를 즐긴’(소설) 사건을 떠올린다. 같은 말의 반복. 남편 곁에서 떠올리는 다른 남자와의 섹스. 하지만 남편에게는 비밀스럽게 떠올리는 시간. 그때 그 두 사람은 같은 장소에서 서로 다른 시간의 감정에 몸을 내맡기는 것이다. 몸을 내맡긴다고? 그렇다. 자기 자신 말고 그 누가 그것을 알겠는가. 낯선 몸.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몸에 관한 이 은밀한 기억의 시간. 그런 다음 몸의 바깥으로부터 안으로 들어가는 시간. 마치 남편의 장소로부터 멀리 달아나기라도 하듯이 소설은 한 줄을 띄어 쓴 다음 (소설) ‘그해 이른 봄 갓 교육대학을 졸업한 나는 굳이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은 어느 시골학교에 첫 부임을 하게 되었다’ 라고 말하면서 그때 그 시간으로 뛰어넘는다. 대차대조표. 임권택은 결혼 ‘이후’를 건드리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처럼 보인다. 반대로 이문열은 결혼 ‘이후’의 자리에서, 십년도 더 지난 일을, 마치 그리워하듯이, 말을 꺼내들기만 하더라도 어림잡을 만큼 자주 듣는 이야기를 다시 들으면서,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사건의 장소로 달려간다. 왜 그녀는 그 순간마다 깨철과의 그 일, 그 시간, 그 사건 안으로 달려가는 것일까. 그녀는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중이 아니다. 혹은 그 시간을 다시 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냥 그 시간 안으로 단숨에 뛰어들려는 것이다. 그 자체로서 보존된 시간. 시간 안에서 살아남은 기억. 두 개의 시간의 계열. 나는 이 말하여지지 않은 부부 사이의 공백을 좀 더 밀고 나가고 싶다. 남편이 그렇게 잘 알고 있는 고향의 동족부락 속에서만 은밀하게 진행되었던 공동체의 성적인 관계라면 (그것이 설혹 다른 동네에서였을 지라도) 지금 남편이 아내의 비밀을 미루어 짐작하고 알고 있다고 가정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 두 번째 설명에 덧붙여진 주의를 기울일만한 지적. 이때 이문열이 건드리는 ‘익명성의 획득’은 단지 텔레비전에 나온 사람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짧은 단편이긴 하지만 단 한 구절도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남편과 아내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문열은 슬그머니 도회의 익명성과 ‘군청 소재지에서 육십 리 가까이 떨어진’ 산골 마을을 겹쳐놓고 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아내의 이름을 그녀가 부임한 국민학교 교장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에게 소개하는 자리에서 한수옥이라고 일러주고, 남편의 이름은 한수옥이 편지를 쓰면서 (보이스 오버로) 영훈, 이라고 호명한다. 나는 이것이 단지 진행상의 기능적인 요구나 편리한 설명을 위해서라고 믿기 어렵다. 설혹 그렇다 하더라도 도대체 무엇을? 임권택은 이문열의 소설 안에 들어간 다음 맨 먼저 소설의 이야기가 작동되는 방식을 일단 중단시켰다. 사라진 시간적 거리의 간격. 영화에는 현재라는 안전한 방어선이 사라졌다. 소설에서 수옥은 아무리 위험한 지경에 처한다 할지라도 그저 간단하게, 상상을 중단하면,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수옥은, ‘사방을 둘러싼 산들은 일평생 나를 가두어둘 거대한 감옥의 벽처럼 느껴졌고, 저만큼 보이는 백여호(戶) 정도의 마을도 사람들이 모두 떠나버린 폐촌(廢村)인 것만 같은’ 장소에 도착한 다음 내내 거기서 진행된다. 물론 수옥의 보이스 오버가 눈앞에서 진행되는 이야기의 화면을 과거에로 데려간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송길한의 각색 속에서 보이스 오버의 대사들은 현재와 과거 사이를 에매하게 만들고 있다. 

소설 제목 <匿名의 섬>에서 영화 제목 <안개마을>로 옮겨왔을 때 이문열에서 임권택으로 그저 단순하게 이동할 수 없는 교란이 거기 개입하고 있는 두 개의 판본 사이에서 오가는 망설임이랄까, 어떤 선택이 읽기와 보기 그 둘 사이에서 주저하고 있는 틈 안으로 들어와 그 충돌의 어디에 내가 놓여있는지를 요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소설에서 ‘匿名의 섬’은 깨철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 중략) 깨철은 혈연이나 인척으로 속속들이 기명화(記名化)된 그 마을에 유일하게 떠도는 익명(匿名)의 섬이었다, 라고 설명한다. 소설은 수옥이 깨철이라는 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관찰한 다음 그와 (... 중략)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긴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는, 그날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영화는 소설에 없는 이미지를 불러 온다. 종종 이 마을은 안개 속에 숨어버린 것처럼 그 윤곽을 감추어버린다. 단지 그것은 기후만의 성질이 아니라 수옥에게는 이 마을 전체의 사람들 사이에서 알 수 없는 공모랄까, 서로 간의 비밀을 공유한 채 안개 속의 마을처럼 그 모습을 바깥사람에게는 드러내지 않는다. 수옥은 이 마을에 와서 떠날 때까지 그 누구와도 특별하게 친해지지 않으며, 이야기 속에서도 (깨철을 제외하고) 어떤 인물이 다른 인물들보다 더 중요해지지 않으며, 그들 모두가 수옥에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친절한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그 거리는 마지막 장면까지 좁혀지지 않는다. 

풀려버린 교집합. 다소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소설에서 영화로 옮겨갈 때 여기에는 반복을 중단시키는 회로가 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지적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이를테면 소설에서 수옥은 이 마을의 국민학교에 부임한 다음 삼년이 조금 지났을 때 사표를 내고 그러고 나서도 (... 중략) 그런데 워낙이 머릿수를 맞춰둔 교원이라 내가 그날로 떠나버리면 그동안 맡아오던 학급은 후임자가 올 때까지 수업을 중단할 형편이었다. 그 바람에 나는 사흘이나 더 기다려 후임자와 맞교대를 하고서야 학교를 벗어날 수 있었다, 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영화에서는 (수옥의 목소리를 빌려 voice_over_narration) “부임한 지 사 개월이 조금 지났을 무렵 군에서 제대한 영훈씨로부터 직장에 취직이 되었다는 편지를 받고 나는 그와의 결혼식을 위해 사표를 내고 동족마을과 작별을 하게 되었다” 라고 설명한다. 여기에는 물론 미묘한 차이가 있다. 약간 더 앞으로. 소설은 남편과의 연애 과정을 이 짧은 소설에서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 두 사람이 언제 만났으며, 그런 다음 언제 약혼을 했으며, 양가의 반응은 어떠했으며, 그러고 나서 둘이 여행을 가서 나누었던 내밀한 시간까지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난 다음 남편은 입대를 했고 월남 전선에 차출되었다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영화에서는 이 설명이 모두 없어지고 단지 남편과 함께 여행을 가서 한 침낭 안에서 사랑을 나누었던 장면만을 짧게 플래시백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라진 시간. 여기서 중요한 구별은 무엇이 남고 무엇이 없어졌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 남아있는 시간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고유한 설명만큼 반대로 거기서 사라진 시간이 비워놓은 채 활동하는 설명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기서 두 개의 장면을 건드려볼 것이다. 먼저 소설 속의 문자를 건드리고, 그런 다음 영화 안의 쇼트들을 마찬가지로 그렇게 건드려볼 것이다. 그런 다음 그 둘을 양쪽에 세우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효과의 형식과 의미의 힘을 만져보려고 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멀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의 상상보다 멀 수 있다. 생각과 상상의 차이. 문자 안에 감추어진 승인된 전략들. 쇼트들의 새로운 질서 속에서 그것을 끈질기게 재전유하려 들 때 우리들은 두 개의 모델, 소설과 영화에 대해서 또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이 글의 시작. 

이문열의 소설. (... 중략) 그 사이 함께 내린 두어 명의 승객도 모두 어디론가 가버린 후여서 나는 가까운 가겟집에나 물어볼 양으로 걸음을 옮겼다. 서너 발자국이나 옮겼을까, 나는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고 앞을 살폈다. 그러나 내 눈 에 들어오는 것은 가겟집 툇마루에 앉아 몽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내였다. 때 묻고 해진 아랫도리는 원래의 천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안갈 정도였고, 물들인 군용점퍼도 소매가 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나는 좀 전의 그 강렬한 빛 같은 것의 정체를 궁금히 여기며 자신도 모르게 그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검고 깡마른 얼굴에 우뚝 솟은 코와 광대뼈- 그런데 그때였다. 나는 다시 피부를 찔러 오는 것 같은 그 빛을 느꼈다. 이내 몽롱한 광기(狂氣) 속으로 숨어들어버렸지만 분명 그의 두 눈에서 쏘아져 나온 빛이었다. 어떤 무성한 숲길에 들었을 때, 그 잎 새에서 뱀을 보면 그것은 그 숲길을 다 지나갈 때까지 공포이다. 그러나 그 공포는 단순한 두려움의 감정과는 다른, 신선한 충격 또는 묘한 기대와 같은 것으로서, 무사히 그 숲길을 빠져나오고 나면 일종의 허전함이나 아쉬움이 되기도 한다. 사내의 두 눈에서 얼핏 비쳤던 그 빛도 그러하였다. 그런데 내 그런 느낌을 일순의 착각으로 만들어 준 것은 갑자기 가게 문을 열고 나온 주인 남자였다. “깨철이 이노마야, 니 아까부터 거기 앉아 뭐 하노?” (중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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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은 이 장면을 26개의 쇼트로 나누었다. 버스가 마을 가게 앞에 도착하고 거기서 마지막으로 수옥이 내린다. ( S# 1) 내린 수옥이 둘러보지만 ( S# 2) 수옥 말고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 S# 3) 심지어 이 동네가 마치 사람들이 모두 떠난 것처럼 가게 안에도 아무도 없다 ( S# 4) 수옥은 동네에 인기척을 느껴보기라도 하듯 두리번거리다가 ( S# 5) 갑자기 한쪽 마을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한 사내, 깨철을 발견 한다. 수옥이 깨철을 다소 의아하게, 호기심을 갖고, 하지만 경계를 하면서 쳐다보지만 깨철은 희미한 표정만 짓고 있다 (S# 6_7_8_9) 그런데 갑자기 깨철이 잠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듯 수옥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S# 10_11_12_13) 이 이상한 상황. ( S# 14) 그러다가 깨철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원래의 몽롱한 표정으로 돌아간다. ( S# 15)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수옥은 ( S# 16_17) 뒤로 물러나면서 방어하기라도 하듯 가방을 들면서 깨철을 바라보지만 깨철은 그저 잠든 것처럼, 원래의 자세 그대로 양지바른 자리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다. 수옥의 목소리. (voice-over narration) “내가 임지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였는데, 그는 피부로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을 보내오는 것이었다. 그 강렬한 빛은 마치 숲 속에서 불현듯이 마주친 뱀 같은 공포를 주었다. 그 공포는 단순한 두려움의 감정과 달리 신선한 충격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 S# 18_19_20) 그때 깨철이 앉아있던 툇마루 바로 곁 대문이 열리면서 집주인이 나와 “깨철이 이노마야! 니 아까 부터 여기 앉아 뭘 하노! 일마가 귀가 먹었나, 어서 일나라! 어허 일나라카이!”라며 깨철을 꾸짖는다. (S# 21) 수옥 그걸 유심히 바라본다. (S# 22) 수옥, 가겟집 주인에게 말을 걸며 ''''저, 여기 학교가 어디 있어요?'''' 리고 묻자 돌아보면서 '''' 학교예? 아, 그라고보니 새로 오신 여선생님이신 모양인데, 철아, 철아'''' 라고 부르자 (S# 23) 철이가 '''' 도곡아재, 와요?'''' 라며 집에서 나오다가 깨철가 부딪치가 밀쳐내며 ''''이노마야, 비키라마'''' 라고는 달려간다. 깨철 제 갈길을 가다 말고 돌아본다. (S# 24) 가겟집주인이 철이에게 ''''새로 오신 선생님이시다, 어서 인사드려라''''고 하자 ''''오학년 철이입니다''''라고 인사한다. 주인이 철이에게 ''''학교까지 좀 모시고 가그라이'''' 하자 ''''알았심더''''하고 길을 나선다 (S# 25) 길을 나서는 수옥과 철이를 깨철 뒤에서 유심히 바라본다. (S# 26) 

<안개마을>을 본 다음 <匿名의 섬>을 읽으면서 내가 신기하게 생각한 것은 임권택이문열의 소설을 문자 그대로 찍어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단순하게 각색의 차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송길한의 시나리오는 이미 영화가 완성된 다음 영화를 보면서 다시 옮겨 쓴 것이 아닌가 할 만큼 소설보다는 영화에 친밀(하고도 내밀)한 이미지와 동선에 따르는 배치의 표면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지문들. 나는 <안개마을>을 보면서 임권택의 이상한 독서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이상한 독서방법? 앙드레 바쟁이 조르주 베르난노스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사제의 일기>을 본 다음 했던 말. 세르주 다네가 베르난노스의 소설을 영화로 각색한 모리스 피알라의 <사탄의 태양 아래에서>를 본 다음 따라했던 말. 나는 지금 영화와 문학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책을 읽는다는 문제. 이때 임권택은 <匿名의 섬>의 주제를 탐구한다든가 혹은 인물을 따라가거나 그 안의 이야기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대신 그냥 자신이 읽은 책의 효과에 대해서 영화가 건드리는 방법을 따라가고 있다. 영화는 문학의 무엇과 연결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그런 다음 무엇이 연결되지 않는가, 라는 낭패. 왜 문학의 어떤 부분들은 영화라는 기계 안으로 전체화되지 않느냐, 라고 물어보는 대신 어떻게 영화는 문학을 자기의 기호 안에서 통일시키지 못하는가, 라고 물어보고 있을 때 영화는 문학의 글자를 찍기 시작한다. 말 그대로 임권택은 이 소설의 문자를 찍고 싶어 한 게 아닐까, 할 만큼 문자 그 자체가 지니고 있는 광학효과에 이끌린 다음 그 효과를 포기하려 들지 않았다. 소설의 두 번째 문장.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 이라고 깨철을 문자가 건드릴 때 그것은 객관적 세계에서 그 어떤 자리도 차지할 수 없는 인상에 의해 감각한 것이지 그것을 지각한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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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은 처음 세 문장을 다섯 개의 쇼트로 찍었다. 처음 버스가 마을에 들어올 때 기능적으로는 마스터 쇼트이지만 다소 어리둥절하게 진행된다. 이 버스를 따라서 느리게 물러나면서 쳐다보는 느낌을 줄 때(zoom_out) 이상하게 카메라는 마치 바닥에 앉아있기라도 하듯 불편하게 올려다보고 있다. (low_angle) 표준을 벗어난 첫 장면. 그 장면이 그것 자체로 보여 지지 않을 때, 그래서 대상과 우리 사이에 무언가 개입할 때, 그 장면에 있는 얼룩은 단지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거기에 시선이 덧붙여진 것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그저 단순하게 도식적으로 말하면 지금 우리가 장면 안의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 대상을 바라보는 것을 우리가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좀 더 자세한 설명. 이때 첫 다섯 쇼트가 이상하게 진행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버스가 도착해서 수옥이 내리는 장면( S# 1)과 수옥이 내린 다음 버스가 떠나가는 장면( S# 3)은 마치 누군가의 시선과 주고받은 것처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그 쇼트가 접속하고 있는 것은 이 낯선 동네에 내려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수옥의 클로즈업이다. (S# 2) 물론 그 사이에 약간의 미세한 데드 타임이 있긴 하지만 버스는 도착하자마자( S# 1) 서둘러 다시 떠난다. (S# 3) 이때 이상하게도 두 번째 쇼트는 무언가 다가와서 수옥을 더듬거린다는 느낌을 준다. 더 이상한 시선은 네 번째 쇼트이다. 마치 사람들이 모두 떠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텅 빈 동네에는 어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텅 빈 동네를 둘러보던 수옥은 가게 앞에서 기웃거린다. 문제의 네 번째 쇼트. 이때 상대 쇼트(reverse_shot)는 가게 안에서 수옥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 S# 4) 그러나 이 장면은 성립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점에서 점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장소 안으로 들어와서 상대 쇼트 저편의 사람을 쳐다볼 때 그 두 개의 쇼트를 연결하는 선은 시선의(point_of_view) 쇼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가게는 텅 비어있다. 혹은 잠시 주인이 자리를 비웠다. 만일 이 장면이 성립된다고 말하려면 한 가지 설명만이 남는다. 가게가 수옥을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마치 하나의 인물이 되어버린 가게. 사물이 갖고 있는 인격. 나는 이 이상한 장면에 대해서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카메라가 가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중요해진 것일까. 거기 누가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숨어있는 것도 아닌데, 그 가게를 기억시킬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함으로써 보는 우리들을 불안하게 만들 필요도 없는데, 왜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을까. 그런 다음 세 번째 쇼트의 자리로 다섯 번째 쇼트가 돌아온다. 이 말의 방점. 세 번째 쇼트의 자리. 수옥은 가게가 빈 것을 확인한 다음 이 동네의 풍경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는데 그녀를 바라보는 카메라는 갑자기 손으로 들고(hand_held) 살펴보기 시작한다. 두 개의 쇼트는 동일한 대상을 바라보는데 그 방법이 전혀 다르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세 번째 쇼트와 다섯 번째 쇼트는 서로 이어 붙일 수 없다. 

이때 여기서 다르게 찍었다는 것 말고 더 기묘한 문제가 있다. 처음부터 다시 셈을 해보자. 버스가 마을에 도착한다. 정면으로 들어오는 버스. 그런 다음 멈추어선 버스에서 수옥이 내린다. 버스라는 동선. 수옥이라는 시선. 이때 영화는 하나의 선을 그어야 한다. 상상선. 그런 다음 그 선은 블록들을 만들어낼 것이며, 그 블록 사이에서 특정한 면들이 세워질 것이다. 면들의 사이. 사이라는 접속사. 이것이 영화가 무용의 운동하는 선이나 연극의 동선과 다른 활동의 구도이다. 첫 번째 활동. 수옥이 마을에 도착하는 것을 바라보게 만들려면 길을 중심으로 (버스가 다가오는 방향을 기준으로 마주보면서) 먼저 왼쪽과 오른 쪽으로 나눈 다음 버스의 문이 열리는 왼쪽으로 수옥이 내린다. 이때 카메라가 길을 하나의 선으로 해서 맞은편으로 넘어간 다음 왼쪽의 건물과 오른 쪽의 건물로 진행하면 이 문제는 간단하다. 혹은 표준적 판본에서는 그렇게 다음 장면을 이어 간다. 그러나 이 씬 전체가 이상한 것은 그 길을 중심으로 일종의 가상선을 그은 다음 모든 동선을 왼쪽에서만 진행하기 시작한다. 마치 절대로 오른쪽으로 넘어가면 안 된다는 원칙을 세운 것처럼, 어떤 불가능한 장소에 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저 눈으로 볼 때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영화적으로 거기 무슨 블랙홀이 있기라도 하듯이, 오른 쪽을 모두 버리고 선을 이어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되면 이 장소에서 180도에 이르는 공간을 모두 포기하고 진행해야 한다는 불편한 문제와 만나게 된다. 단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인물을 움직이기 매우 까다로워진다. 하지만 임권택은 할 수 없다는 듯이 그렇게 진행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새로운 인물이 나올 때마다 모두 왼쪽 라인에서 등장한다. 차라리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세 번째 쇼트를 보여준 다음 길 건너편으로 넘어가느니 차라리 수옥 왼쪽 곁에 있는 가게 안으로 들어간 다음 다시 나온다. 평행선을 긋는 대신 길을 따라 수평선을 그은 다음 그 선을 뚫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되돌아왔을 때, 그래서 다시 바깥으로 카메라가 나왔을 때,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다섯 번째 쇼트는 수옥을 손으로 들고(hand-held)로 찍었다. 두 가지 표면적 기술. 하나는 이 쇼트가 흔들린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 쇼트를 역광으로 찍어서 렌즈에 빛의 얼룩(halation)이 생기고 있다. 그냥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이걸 차단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리고 그것을 정일성이 모를 리가 없다. 이 영화는 역광을 이용한 촬영을 하고 있지 않다. 게다가 역광으로 찍는다고 해서 항상 빛이 렌즈에 만들어내는 얼룩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마치 그 쇼트에서만, 오로지 이 순간에는 얼룩이 필요하기라도 한 것만 같은 번쩍이는 빛의 활동. 임권택의 광학효과. 이문열의 가시적 문자. 


S# 5


S# 6
나는 이 쇼트를 이문열의 문자와 연결시키고 싶다. 이문열의 소설 (.... 중략) 서너 발자국이나 옮겼을까, 나는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같은 것을 느끼며 걸음을 멈추고 앞을 살폈다. (중략...)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 그건 수옥이 느껴본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느껴본 것을 찍는 예술이 아니다. 무엇이 수옥을 멈춰 세운 것일까. 무엇이 그녀를 돌아보게 만든 것일까. 무엇이 저 구석 편에 숨어있기라도 하듯, 처음에는 보지 못했지만, 비로소 지금 저편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깨철을 발견하게 만든 것일까. 그건 피부를 찔러오는 날카로운 빛이다. 수옥의 피부 속으로 파고들 것만 같은 눈빛. 흔들리는 시선으로(hand_held) 빛이 얼룩져서 바라보는 이 장면이 돌아보는 수옥의 시선으로 깨철을 발견하는 쇼트( S #6)와 서로 이어 붙어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다섯 번째 쇼트는 반대로 여섯 번째 쇼트가 바라보는 쇼트이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 그건 깨철이 수옥을 바라보는 시선의 쇼트이다. 다소 비유적인 우회. 이때 깨철이 던지는 시선이 수옥의 피부를 찌르는 것처럼, 그래서 거기서 번쩍이는 빛의 얼룩(halation)이 깨철의 안광이 아니라면 다른 무엇이겠는가. 빛이라는 문제. 이때 깨철은 툇마루에 앉아서 오후의 따스한 빛을 맛보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집도 없는 깨철이 달리 여기 어디에 앉아있을 것인가. 말하자면 영화에서 인물을 어디에 앉힐 것인가라는 문제. 그러면서 깨철은 이 동네에 버스가 도착할 때마다 낯선 새로운 방문객들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수옥이 도착했다. 새로운 먹이. 그녀를 유심히 살펴보는 깨철의 눈빛, 마치 피부를 찌를 듯한, 옷 속을 파고들 것만 같은, 그런 빛. 그 빛이 수옥의 몸에 던져질 때, 빛의 얼룩이 그녀의 이미지 위에 번쩍이고 있다. 그때 그 두 개의 빛을 찍기 위해서, 깨철이 자리 잡은 양지바른 툇마루 위의 빛과, 그가 쳐다보는 수옥의 피부를 찌를 듯한 빛을, 서로 성질이 다른 두 개의 빛을, 물리적으로 주어진 하나의 조명인 저물어가는 겨울 오후 햇살아래서 찍기 위해서, 임권택은 수평으로 가상선을 그은 다음, 그림자만이 남은 맞은편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S# 6


S# 7


S# 8


S# 9


S# 10


S# 11


S# 12


S# 13


S# 14


S# 15


S# 16


S# 17


S# 18


S# 19

 
그런 다음 이어지는 네 개의 쇼트는 정확하게 수옥과 깨철이 서로의 거리를 유지하고 서로가 서로를 마주보는 시선의 교환이다. ( S# 6_7_8_9) 당신은 이 거리를 유심히 보아야 한다. 이문열의 문장. (... 중략) 걸음을 멈추고 앞을 살폈다. 그러나 내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가겟집 툇마루에 앉아 몽롱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내였다. 때 묻고 해진 아랫도리는 원래의 천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안갈 정도였고, 물들인 군용점퍼도 소매가 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중략...) 나는 이문열의 문장을 영화로 다시 옮겨 쓰고 싶다. 카메라를 멈추고 앞을 살폈다. 그러나 프레임에 들어오는 것은 가겟집 툇마루에 앉아 몽롱하게 바라보고 있는 어떤 사내였다. (롱 쇼트로 멀리서 볼 때) 때 묻고 해진 아랫도리는 원래의 천이 어떤 것이었는지 짐작이 안 갈 정도였고, (조금 더 다가가서 풀 쇼트로 자세하게 들여다보니) 물들인 군용점퍼도 소매가 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임권택은 정확하게 그렇게 찍었다. 하나의 문장을 쉼표로 둘로 나눈 것을 임권택은 두 개의 쇼트로 나눈 다음( S #6, 8), 깨철을 바라보는 수옥을 고정점으로 하여( S #7, 9) 롱 쇼트와 풀 쇼트로 묘사의 거리를 나누었다. 그런 다음 (이문열의 문장) 나는 좀 전의 그 강렬한 빛 같은 것의 정체를 궁금히 여기며 자신도 모르게 그 사내의 얼굴을 살폈다. (...중략) 이 문장의 번역. 영화에서 자신도 모르게 그 사내의 얼굴을 살필 수 있는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그냥 한 마디로 클로즈업. (S #10) 임권택은 마치 이문열의 문장이 그림 콘티라도 되는 것처럼 그대로 따라가면서 찍어나가고 있다. 이때 임권택은 이 클로즈업을 다시 네 개의 쇼트로 나누었다.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깨철은 몽롱한 눈빛에서 피부를 찔러오는 듯한 눈빛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몽롱한 광기 속으로 빠져드는 일련의 연속적인 표정을 세 개의 쇼트로 나눈 것이며( S #10, 12, 15) 그런 깨철을 바라보는 수옥을 다시 두 개의 쇼트로 나눈 ( S #11, 13) 다음 교차 편집한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단순하다. 내 질문은 왜 깨철을 연속적인 하나의 표정으로 보여주지 않고 나누었느냐는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왜 수옥의 쇼트( S #11)가 거기 개입할 필요가 생긴 것일까. 자, 이 열 개의 쇼트는 두 개의 다이어그램으로 나누어서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 다이어그램. 수옥이 깨철을 발견한 다음 쳐다볼 때( S #6_7_8_9) 이 네 개의 쇼트는 수옥이 바라보는 주어의 자리에서 깨철이 목적어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둘 사이의 거리는 유지되고 있으며, 서로 객관적으로 마주보고 있는 중이다. 이때 이 쇼트의 진행을 중단시키는 것은 갑작스러운 깨철의 클로즈업이다. ( S #10) 이 쇼트는 단지 거리를 불명확하게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관계의 좌표를 바꾸는 것이기도 하다. 수옥은 깨철에게 다가가지 않았고, 깨철이 수옥에게 다가온 것도 아니다. 그 둘은 서로의 거리를 여전히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카메라는 그 둘을 가까이서 거의 클로즈업에 가깝게 찍는다. 연속적인 표정. 깨철과 수옥. 여기서 두 사람이 교환한 것은 ‘본다’, 라는 동사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서로의 주어와 목적어의 자리이다. 이때 이상한 쇼트가 둘 사이에 개입한다. 쇼트 14. 시선을 둘러싼 이 둘 사이의 관계 안에서 갑자기 카메라가 도망이라도 치듯이 멀리 물러났을 때 이 자리는 단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둘 사이에 세워진 상상선 바깥으로 나가면서 무언가 이 시선의 망이 부서져버린다. 갑작스러운 시선의 중단. 이 장면에서 이상하게도 수옥은 프레임 안에 있지만 깨철은 그 바깥에 있다. 프레임(cadre)의 팽창, 혹은 이제부터 있을 부서진 프레임(de_cadrage) 안의 숨겨진 몸과 시선. 시선의 망이 부서지면서 재빨리 이루어진 배치, 깨철이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말하자면 다시 수옥을 주어의 자리에로 되돌려주는 순환, 이 일순간의 미끄러져버린 듯한 쇼트는 수옥의 목소리를 가능하게 만들어준다. (voice_over_narration) 이 목소리와 함께 마치 다시 자기의 자리를 찾기라도 했다는 듯 깨철을 바라보는 수옥의 시선을 따라 (S #17, 19), 혹은 그녀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에 맞추어서 카메라를 들고 따라간다. (hand_held) 이 활동은 우리에게 이제까지 어리둥절했던 그 모든 운동, 버스가 들어오면서 느리게 물러났던 줌의 이동, 그 버스에서 수옥이 내린 다음 동네 사람을 찾아서 가게를 기웃거릴 때 바라보던 카메라의 움직임이 깨철의 시선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S# 21
 
그 흔들거리는 카메라가 멈추는 것은 마치 프레임웰엽링?안에 다른 구멍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깨철이 앉아있는 툇마루 바로 곁에 자리한 대문이 열리면서 동네 사람이 화면 안으로 들어설 때이다. (S #21) 뚫린 구멍. 그 사이로 마치 빠져나가는 듯한 음악. 깨철을 발견한 다음 이미지에 달라붙어버린 듯이 시종일관 따라오던 이상하고도 불길한 음악을 멈추는 것은 바로 그 문소리이다. 모든 것이 다시 현실 속의 질서에로 되돌아오는 순간. 현실의 운동. 현실의 사운드. 이때 이 새로운 등장인물에게, 이 동네 사람에게, 큰 소리로, “저 여기 학교가 어디 있어요?”라고 말을 거는 수옥을 이상할 정도로 멀리서 찍었다. 혹은 이제까지 쇼트를 진행했던 것과 다른 렌즈로 수옥을 멀리 밀어내고 있다. 이때 사실은 이 거리가 실제로 수옥과 깨철이 떨어져있던 거리였을 것이다. 이문열의 문장. 그런데 내 그런 느낌을 일순의 착각으로 만들어 준 것은 갑자기 가게 문을 열고 나온 주인 남자였다. (... 중략) 일순의 착각으로부터 깨어나기. 임권택은 주관적인 시선에서 객관적인 자리에로 되돌아가기 위해서 렌즈를 바꾼다. 


하지만 여기서 이 씬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이 씬 전체에서 동선이라고 부를만한 쇼트가 등장하는 것은 깨철과 동네 어른이 함께 있는 프레임 안으로 수옥이 들어올 때 깨철이 귀찮다는 듯이 일어나서, 마치 수옥과는 한 프레임에 아직은 함께 있을 수 없다는 듯이, 혹은 피하듯이 ( S #23) 다음 쇼트의 공간으로 도망치듯이 슬쩍 걸쳐서(match_cut) 빠져나가다 말고 돌아서서 수옥을 쳐다볼 때이다. ( S #24) 수옥은 더 이상 깨철을 쳐다보지 않는다. 하지만 수옥과 철이가 동네 어른에게 인사를 하고 빠져나갈 때 이 광경이 깨철의 시선 속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다시 한 번 이 쇼트를 가득 채우는 빛의 얼룩이다. ( S #25) 이문열의 소설. (...중략) 순순히 앞장서는 소년을 따라나서려는데 여전히 깨철이란 사내의 눈길은 나를 쫓고 있었다. 그 사이 평온을 회복한 나는 짐짓 매서운 눈길로 그를 쏘아주고는 자리를 떴다. (중략...) 이문열은 둘 사이의 시선의 균형을 잡으려고 하지만 임권택은 철이와 함께 이 장소를 떠나면서 깨철에게 두 번 다시 시선을 주지 않는다. 혹은 수옥은 마치 그 존재를 잊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한 다음 재빨리 여기서 빠져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깨철은 이 장소를 떠나는 척 하면서 계속해서 수옥을 바라본다. 문학의 시선과 영화의 시선. 이때 이 세 개의 쇼트는 깨철을 따라가면서 서로 붙어있는 연결의 유기적 구성을 따르고 있다. 

나는 재빨리 두 번째 장면으로 넘어오고 싶다. 왜냐하면 이 두 번째 장면은 첫 번째 장면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장면에 기대어 행여 당신이 이 모델을 하나의 도식으로 만드는 것을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고 싶다. 먼저 이문열의 소설. (... 중략) 남편이 오기로 되어있는 그 일주일을 나는 마치 열에 들뜬 사람처럼 보냈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그때 남편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나치게 마신 바람에, 나에게서 보내려고 비워둔 이틀을 앓아누워버린 것이다. 남편이 올 수 있는 거의 마지막 날, 오후 다섯 시 막차까지 그냥 지나가버리자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싶을 정도로 허탈한 심정이었다. 결근이라도 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못한 것이 그제야 뼈저리게 후회되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허탈함 가운데서도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내 몸이었다. 아니, 그 이상, 남편의 품에 안길 것을 상상하며 보내온 지난 일주일보다 그가 이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알게 되면서부터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허탈함 못지않게 내 몸을 사로잡은 그 묘한 열기에 취해 거의 몽롱한 기분으로 버스 정류장을 떠났다. 그러다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언뜻 정신이 든 것은 버스 정류소와 하숙집 중간 쯤 되는 길 위에서였다. 이미 초가을에 접어들고 있었음에도 장대 같은 소낙비였다. 얼결에 주위를 돌아본 나는 길가에 있는 조그만 창고를 발견하고 그리로 뛰어갔다. 처음 나는 그 처마에서나 붙어 서서 비를 긋고 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워낙 빗발이 세고 바람까지 일어 차츰 빗장이 질려있지 않은 함석 문께로 밀리게 되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빗발은 점점 세어져-- 이윽고 나는 함석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평소 비료 같은 것들을 쌓아두는 그 창고는 그날따라 텅 비고 조용했다. 혹시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나였지만, 그 지나친 고요에 차근히 창고 안을 살펴볼 생각도 않고, 열려진 문틈으로 쏟아진 소낙비만 망연히 바라보았다. 지나친 방심이라기보다는 작은 벌레처럼 스멀거리며 내 몸을 돌고 있는 그 묘한 열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었다. 어쨌든 창고 안을 자세히 살피지 않은 것은 큰 실수였다. 튀는 빗방울을 피해 내 몸이 완전히 창고 속으로 들어가자마자 어둠 한구석에서 누군가가 재빨리 달려 나와 창고 문을 닫고 빗장을 질렀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의 일이었다. “누구예요? 문 열어. 소리 지를 테야” 나는 그 갑작스러운 사태에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떠들어야 소용없어, 소나기 오는 들에 사람 나다니는 것 봤나?” 약간 쉰 듯한 목소리와 함께 집게 같은 손이 내 팔목을 죄었다. 처음 그림자가 퍼뜩할 때의 직감대로 깨철이였다. 그가 누구인 것을 알자 이상하게도 나를 사로잡았던 공포가 일순에 사라졌다. “깨철이지? 이거 못 놔?” 나는 제법 마을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러나 그는 대답대신 창고바닥에 깔린 짚 검불 위에 나를 쓰러뜨리더니 내 치맛자락을 거칠게 감아쥐었다. “험한 꼴로 하숙집에 돌아가기 싫거든 곱게 벗어”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기를 썼다. 그런 나를 덮쳐누르고 있던 그가 다시 뜨거운 입김을 내게 뿜으며 중얼거렸다. “이 깨철이 다른 건 몰라도 언제 너희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지금 네 몸은 달아있을 데로 달아있어” 그 말을 듣자 이번에는 묘하게도 내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대신 잠깐 잊고 있었던 묘한 열기가 다시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그런 내 귀에다가 그가 다시 이죽거렸다. “오후 내내 지켜보고 있었지. 정류소에서 안절부절 기다리고 서 있을 때부터......” 그러면서 그는 능란하게 내 몸을 더듬었다. 나는 차츰 몽환(夢幻)과도 흡사한 상태에 빠져들면서 모든 저항을 포기하고 말았다. 회상하기에도 민망스럽지만 어쩌면 그때 나는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와 함께 한 차례의 정사(情事)를 즐긴 것이 아닌가 모르겠다. 남의 아내 된 여자로서 한 가지 변명을 삼을 것이 있다면, 그 절정의 순간에도 내가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의 얼굴이었다는 것 정도일까. (... 중략) 

이 대목은 17쪽인 이 소설에서 두 쪽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1시간 31분 상영시간 중에 18분 40초를 차지하고 있다. 그냥 산술적으로 말하면 영화 전체 중에 거의 오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다. 만일 남편이 오기로 한 날 수옥이 아이들 수업을 가르치는 쇼트까지 셈에 포함시킨다면 더 많은 분량이 될 것이다. 나는 남편이 오기로 한 날 전체를 셈하는 대신 동료인 김 선생에게 수옥이 남편 마중을 가기 위해 아이들 수업을 맡기고 학교를 떠난 다음 쇼트부터 셈을 시작했다. 송길한의 시나리오에서는 이 대목이 10개의 씬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S #72 정류장으로 뛰어가는 수옥의 몽타주_ #73 정류장 앞_ #74 돌아가는 길_ #75 방앗간 앞_ #76 방앗간 안_ #77 물레방아_ #78 물레방아_ #80 방앗간 안_ #81 물레방아 전경_ #82 마을길 낮) 임권택은 65 쇼트로 찍었다.


S# 1


S# 2


S# 3


S# 4


S# 5


S#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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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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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순서. 남편을 만나기 위해 버스 정거장으로 달려가는 수옥(S #1). 물레방아를 지나고( S #2) 커다란 나무들 사이를 지나( S #3) 단숨에 비탈길을 달려 올라가니 막 버스가 지나쳐간다. 멀리서 사내 하나가 오는데( S #4) 자세히 보니 화천댁 남편이다. 지금 아내 때문에 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한다. ( S #5) 수옥은 다음 버스를 기다리면서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는다. 가게 주인이 나와서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마실 거라도 드릴까요?”라고 권하지만 수옥은 그저 버스에만 관심이 있다. ( S #6) 마을 초입의 텅 빈 버스길. ( S #7) 돌아나가는 버스를 보면서 이 주막 주모가 나와서 수옥에게 “차가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서너 시간이나 있어야합니다. 점심식사나 합시다” 라면서 주막에 데려간다. ( S #8) 집에 돌아가는 자기 반 아이들과 마주치자 수옥은 “공부들 잘 했니? 어서 집에 가서 예습 복습 잘해”라며 인사 한다. ( S #9) 주막집 산월이가 빵을 가지고 가다가 바깥에 앉아 우두커니 버스를 기다리는 수옥을 보고 빵을 권하지만 거절한다. ( S #10) 버스가 도착하지만( S #11) 남편은 내리지 않고 떠난다. ( S #12) 수옥은 벽에 기대어 운다. ( S #13) 그때 우체부가 도작해서 속달 전보를 전해주자 ( S #14) 사인을 한 다음( S #15) 그걸 열어본다. “미안하다, 수옥아, 집에 도착하자마자 앓아누웠지 뭐야, 친구들과 어울려 과음을 한 바람에 그리 됐어. 다음 정식 휴가를 얻으면 그땐 곧장 수옥에게 달려가겠어” (남편의 음성, voice_over_narration) 수옥은 찢어버린 다음 벽에 기대어 운다. ( S #16) 하늘에 구름이 몰려오고 ( S #17) 큰 나무들 사이로 돌아가는 수옥의 뒷모습에 비가 뿌리기 시작한다. ( S #18) 걸어가던 수옥은 빗발이 거세지자 뛰어가기 시작한다. ( S #19_20_21) 저기 물레방앗간이 보인다. ( S #22) 그 곳으로 뛰어가는 수옥( S #23) 물레방앗간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빗발이 거세지자 그 안으로 들어간다. ( S #24) 그런데 갑자기 문이 닫히고 ( S #25) 수옥이 돌아보니 ( S #26) 빗장 문이 걸리고 ( S #27) 깨철이 덮쳐오자 수옥은 “놔!”라고 소리친다. ( S #28_29) 바깥에는 비가 계속 내리고 문은 단단히 잠겼다. ( S #30) 수옥은 몇 차례이고 “놔, 놔, 놔, 놔”라고 반복하면서 저항하지만 깨철은 더 거칠게 껴안고( S #31) 문은 꼼짝도 안 한다. ( S #32) 깨철은 좀 더 거칠게 끌어안고 수옥은 몸부림치지만 ( S #33_34) 깨철은 수옥의 옷을 벗기기 시작하고 수옥은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버둥거리다가 잡아당기자 ( S #35)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하면서 물이 넘쳐흐른다. ( S #36_37) 도망치려는 수옥, 그녀를 감싸 안는 깨철. ( S #38_39_40) 깨철은 수옥의 웃옷을 벗기고 브라자를 내린 다음 ( S #41) 짚 검불 위에 쓰러트리듯이 눕힌다. ( S #42) 그리고 팬티를 끌어내리는 깨철, 완강히 저항하는 수옥 ( S #43_44_45_46_47_48_49) 수옥이 포기해버리는 듯한 표정을 짓자 ( S #50) 깨철은 만족한 웃음을 흘린다. ( S #51) 수옥을 겁탈하는 깨철, 물이 넘쳐나는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 S #52_53_54_55_56) 깨철은 수옥의 옷을 집어 들어서 ( S #57) 짚 검불에 쓰러져 누워있는 수옥을 덮어준다. ( S #58) 그리고 문을 열고 조용히 물레방아를 떠난다. ( S #59) 물레방아가 텅 빈 것을 확인하고 수옥은 무너지듯 다시 눕는다. ( S #60) 비 내리는 물레방아. ( S #61) 안개 속을 혼자 걸어가는 깨철 ( S #62_63) “회상하기도 민망스럽지만 어떤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가책으로 괴로워하진 않았다. 어쩌면 그때 나는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그와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긴 것이나 아닐 지...” (수옥의 목소리. voice_over_narration, 그리고 이어지면서) 방에 혼자 앉아있는 수옥 “약혼자가 있는 여자로써 변명을 삼을 것이 있다면 그 절정의 순간에 내가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영훈씨의 얼굴이었다는 것 정도였다” ( S #64_65)

소설은 처음 어떻게 시작했는지를 잊지 않고 있다. 지금 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늦은 저녁 을 마친 뒤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 곁에서 잠깐 동안, 그저 남편이 뉴스를 보고 혀를 차며 개탄조로 말하는 동안, 그렇게 떠오르는 십여 년 전의 일을, 죄스러워하고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그저 아득하기만 한 시간을 불러오는 중이다. 그래서 남편이 그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앞질러 밝히고 있다. (이문열 소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그때 남편은 친구들과 어울려 지나치게 마신 바람에, 나에게서 보내려고 비워둔 이틀을 앓아누워버린 것이다. (... 중략) 반대로 영화는 종종 수옥의 목소리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임권택은 여기서 앞질러 알려주지 않는다. <안개마을>은 목소리의 시제가 때로는 플래시백이라기보다는 종종 사건 바깥의 해설적인 자리로 물러나기도 한다. 마치 그것이 자기의 존재 근거가 되기라도 하듯이, 혹은 자기 자신은 사건 바깥으로 빠져나와 재판의 자리에 가기라도 하듯이,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알리바이를 내세우기라도 하듯, 그렇게 재빨리 후퇴한다. 그래서 어떤 때는 마치 수옥의 목소리가 화면에 보여 지는 수옥을 쳐다보기라도 하듯이 진행된다. 말하자면 목소리라는 시선. 두 개의 분리된 수옥. 영화에서 수옥은 남편을 만나기 위해 한껏 들떠서 달려가지만 소설에는 이 대목 전체가 없다. 수옥은 이미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리고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에서 이미 막차는 떠난 다음이며 허탈함 못지않게 수옥을 사로잡은 그 묘한 열기에 취해 몽롱한 상태에서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돌아가는 길에 버스 정류소와 하숙집 중간쯤에서 만난 소낙비 때문이다. 영화는 마치 이 빈칸을 채우기라도 하듯, 미처 쓰지 않은 문장을 불러내기라도 하듯, 수옥을 따라가면서 찍어나가기 시작한다. 소설 속의 이야기에서 미처 쓰지 않은 것의 이야기를 영화가 보려고 할 때 거기서 그건 단순히 덧붙여진 것이 아니라 소설은 그렇게 뛰어넘어도 되는 것을 영화는 함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거기 멈춰 서서 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S# 2


S# 26

 
만일 소설에 기대어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수옥이 (오지 않을) 남편을 마중하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까지 달려 나가는 장면에서 전보가 도착해서 그 목소리로 내용을 통보받을 때까지 16개의 쇼트는 모두 데드 타임이다. 이때 이 16개의 쇼트들은 이미 우리가 본 쇼트들과 부딪치면서 마치 작은 타악기들을 건드리기라도 하듯 기억의 잔향 효과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한다. 수옥이 남편을 만나기 위해서 달려가는 네 개의 쇼트 중 두 번째 쇼트. 저 멀리 물레방앗간을 뒤로 하고 작은 뚝방길을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수옥이 약간 비스듬하게 가로 질러갈 때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두 가지 진동. 하나는 <안개마을>을 두 번째 볼 때에야 알 수 있다. 수옥은 이 길을 정확하게 되돌아올 것이다. 오른 쪽에서 왼쪽으로, 말하자면 반대방향. 그때 동선은 여기서 끊어지고 첫 번째 쇼트로 되돌아가는 대신 저 멀리 보이는 물레방앗간으로 방향을 돌린 다음 마치 블랙홀처럼 저 문 속으로 잡혀먹이듯이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다른 하나가 더 중요하다. 이 화면 구도는 이미 영화 앞부분에서, 훨씬 앞쪽에서, 씬의 순서대로 셈을 한다면 26씬에서 동일한 위치에서 저 멀리 물레방앗간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구도를 보았다. S #26. 개울가. 깨철은 커다란 돌을 치켜들고 개구리를 찾고 있다. 아이들은 깔깔 대고 웃으면서 구경하는 중이다. 지나가던 화천댁이 “야 이 빙신아, 거기 한 마리 안 가나? 바로 니 앞에 안 있나?” 하자 돌을 내리치던 깨철은 그만 미끄러져 물에 빠진다. 우리는 지금 (시나리오의 셈에 따르면) 76씬을 보는 중이다. 수옥이 지켜보았던 그 광경. 그 자리를 다시 수옥이 (오지 않을) 남편을 마중가기 위해 가로 질러갈 때 카메라는 구태여 같은 위치에서 그걸 바라보고 있다. 그 프레임에서 빠진 것은 마치 깨철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환기시켜 주는 것만 같은 쇼트. 이 두 번째 쇼트부터 깨철은 거기 없으면서 이미 함께 동반하듯이 바깥에서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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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다음 다시 영화는 버스 정류장으로 되돌아온다. <안개마을>의 첫 번째 장소. 이 장소로 마치 거슬러 올라오듯이 수옥이 다시 올 때, 수옥은 온 길의 쇼트를 차례로 찾아서 돌아오는 대신, 비탈길을 헐레벌떡 단숨에 뛰어올라와 그 버스 정류장이라는 광경을 쳐다본다. ( S #4) 마치 사선처럼 그어진 동선. 그때 몽타주의 벡터는 무언가 질서를 잃어버린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숨은 매개변수들은 무엇일까. 이때 수옥의 눈앞을 지나가는 버스는 영화적으로 번역하면 와이프(wipe_out) 효과이다. 지나간 버스 저편에 한 남자가 내려서 걸어오고 있다. 그러나 그 남자는 남편이 아니고 화천댁 남편이다. (남편) “안녕하십니꺼, 마중 나오셨군예” (수옥) “예, 어디 다녀오세요?” (남편) “여편네가 읍내 병원에 입원했다 아입니꺼” (수옥) “그래 좀 어때요?” (남편) “차도가 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더 두고 봐야 알겠심더, 안 가실낍니꺼?” (수옥) “전 막차를 기다려봐야겠어요” (남편) “어이구, 아직 멀었는데예”라고 말한 다음 그 자리에서 떠난다. ( S #5) 이 쇼트는 이례적으로 분할하지 않고 투 쇼트로 두 사람을 세운 다음 멈춰 서서 그냥 진행된다.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지금 이야기의 진행과 아무 상관이 없으며, 그렇다고 해서 이후 진행될 어떤 이야기의 복선이 되는 것도 아니다. 혹은 이제까지 진행된 이야기 중의 일부의 어떤 대답도 아니다. 그런데도 생략 없이 모두 찍었다. 마치 축 처져서 늘어진 것만 같은 시간. 화천댁 남편이 떠난 다음 버스 정류장에서 혼자 기다리던 수옥은 뒷걸음질 치면서 화면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수평으로 가로 질러 양지바른 툇마루에 가서 앉는다. 뒷걸음질이라는 제스처. 마치 시간이 거꾸로 가는 것만 같은 인상. 우리가 이미 보았던 구도. 불길하고도 기이한 쇼트. ( S #6) 이 쇼트는 영화가 막 시작했을 때 첫 번째 씬 세 번째 쇼트와 거의 동일한 구도이다. 기술적으로만 말하면 두 쇼트는 동일한 날에 촬영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유사하다. 마치 첫 장면으로 되돌아온 것만 같은 기시감. 그때 우리를 엄습하는 것은 당연히 거기 감춰진 시선이다. 무언가를 조종하는 것만 같은 우연. 바깥에 놓여진 기억. 전혀 다른 두 개의 씬에서 동일한 기분이 다가올 때 그것은 무엇을 전달하기 위한 것일까. 우리는 첫 번째 씬에서 수옥과 깨철 두 사람의 프레임에 마치 구멍이 생겨나듯이 문이 열린 다음 거기서 가겟집 주인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는 깨철 대신 수옥이 양지바른 툇마루에 앉자마자 바로 곁에 (시커먼 어둠으로 구멍이 뚫린 것만 같은) 가게 안쪽에서 가겟집 주인이 나와 그녀에게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시죠, 마실 거라도 드릴까예?”라고 말을 건다. 형태론적으로 거의 동일한 진행. 이 두 개의 씬은 거울로 마주보듯이 서로 다른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동일한 장소에 오자 동일한 법칙이 작동하는 것처럼 수많은 기호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 두 번째 버스가 지나갈 때 맞은편 주막에서 주모가 왼쪽에서 오른 쪽으로 수옥에게 다가와서 손을 잡고 “차가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려면 서너 시간이나 있어야합니다. 점심식사나 합시다” 라고 데리고 들어간다. ( S #8) 화면에 가득 찬 빛의 얼룩들. 이때 이상한 것은 이어지는 세 개의 쇼트에서 동선이 모두 매번 반대의 방향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냥 단순하게 이 세 개의 쇼트는 점프 컷이다. 우리는 이미 이 버스 정류장의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 넣었다. 물론 임권택은 그걸 용의주도하게 인접 쇼트들과 이어 붙이면서 하나의 지도를 만들었다. 그걸 전제로 하고 수옥을 선으로 연결하는 대신 점에서 점으로 이동시킨다. 길 왼쪽에 자리한 주막에 주모의 손에 이끌려 점심을 먹으러 들어간 수옥 ( S #8)을 따라 카메라가 함께 길을 중심으로 한 상상선을 넘어가지 않는다. 반대로 다음 장면은 가게 안으로 들어가서 화면 프레임 안에 가게의 프레임을 다시 만들어서 두 개의 프레임을 통해 바깥에 있는 수옥을 바라본다. 마침 학교에서 하교하는 수옥의 반 아이들과 인사를 나누는 수옥은 주막의 반대편에 자리한 가게 쪽에서 나온다. ( S #9) 그런데 동일한 프레임의 다음 쇼트에서 주막집의 산월이가 가게에 와서 빵을 산 다음 다시 왼쪽의 주막집으로 돌아갈 때 수옥은 주막집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있다. ( S #10) 우리는 주막집에서 나와서 가게 쪽으로 온 수옥을 보지 못했지만 또한 가게에서 주막집 쪽 의자로 간 수옥도 보지 못했다. 이 세 개의 쇼트는 공간적이라기보다는 시간적인 점프 컷이다. 그렇다고 이 세 개의 쇼트의 빈 사이가 데드 타임에 대한 경제적인 생략의 역할을 하는 것도 아니다. 왜 그렇게 한 것일까. 한 가지 가설. 그렇게 하면 카메라는 첫 번째 씬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오른쪽에 머물 수 있다. 만일 왼쪽으로 옮겨가면 우리는 새로운 문제와 마주치게 된다. 우리는 한 번도 보지 못한 풍경을 보아야 한다. 영화는 이미 본 이미지들을 통해서만 공간을 지각하는 예술이다. 만일 새로운 이미지가 등장하면 우리들은 새로운 지도를 그리거나, 혹은 동선의 연결 속에서 갑자기 이 선이 뒤엉키거나 미로에 빠져들 것이다. 그런 다음 두 번째 설명. 이 점프 컷은 기이하게도 시간의 동선을 생략함으로써 반대로 (오지 않을) 남편을 기다리고 있는 수옥의 지루한 시간의 감각을 팽창시키고 있다. 동선에서 감각에로, 말하자면 가시적인 질서에서 비가시적인 몸의 주관적인 신경에로의 이동. 영화의 부사적(副詞的) 쇼트. 그때 막차가 도착한 다음 아무도 내리지 않고 그냥 떠난다. (S # 11_12). 

버스가 떠난 다음 네 개의 쇼트. 벽에 기대어 울고 있는 수옥에게 우체부가 자전거를 끌고 골목에서 나타나 속달편지를 건네준다. 이 쇼트의 진행 자체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네 개의 쇼트는 소설과 완전히 반대의 전제 아래 이제부터 수옥의 감정선을 따라갈 것이라는 선언이다. 물론 나는 영화가 소설을 각색할 때 그 주인을 둘러싼 인정투쟁에 대해서 매우 긴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여기서는 이야기의 작가를 둘러싼 기원에 관한 위태로운 대차대조표를 꺼내들지 않을 생각이다. 그 대신 두 개의 이야기에서 수옥을 둘러싼 문자로부터 영화에로 이동하는 시청각 기호들 사이의 감각적 성질들의 변화에 대해서만 쳐다볼 것이다. 소설에서 수옥은 그날 왜 남편이 오지 않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문열은 오지 않는 남편에 대한 수옥의 그 어떤 상상의 문장도 쓰지 않았다. 왜 그 사람은 오지 않은 것일까, 무엇이 그 사람이 내게 오는 것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일까, 라고 질문하는 대신 (... 중략)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허탈함 가운데서도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내 몸이었다. 아니, 그 이상, 남편의 품에 안길 것을 상상하며 보내온 지난 일주일보다 그가 이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알게 되면서부터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허탈함 못지않게 내 몸을 사로잡은 그 묘한 열기에 취해 거의 몽롱한 기분으로 버스 정류장을 떠났다, 라고만 썼다. 영화에서는 막차가 떠나가고 남편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이 확정되자 마치 기다린 것처럼 남편으로부터의 편지가 도착한다. 제 시간에, 올바른 장소에 도착한 편지. 거의 목적론적 순간이라고 부르고 싶을 정도로 정확한 자리. 지젝이라면 왜 편지는 항상 목적지에 도착하는가, 라는 그의 글에 <안개마을>을 그 예 중의 하나로 넣고 싶을 지도 모를 지경으로 정확하게 바깥에서 날아와 빈 장소를 채운다. 그러나 그 편지가 올바른 목소리를 담고 있는 지를 따져보는 것은 다른 일이다. (편지는 남편의 목소리로 낭송된다) 나는 여기서 소문자 타자에 관한 술래잡기를 벌일 생각은 없다. 그 대신 이 편지의 존재에 대해서 신중하게 질문하고 싶다. 이야기의 진행을 위해서라면 이 편지가 도착하지 않아도 영화를 진행하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 혹은 어쩌면 그때 당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깨철과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긴 다음, 그 편지가 도착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나는 단지 기능차원에서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중이다. 그러나 임권택은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편지가 먼저 도착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혹은 수옥이 한 차례의 정사를 즐길 수 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고 믿는 것처럼 보인다.

 
S# 3


S# 17


S# 18


S#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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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셈을 가정하는 대신 (그렇게 된다면 나는 또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가 다루고 있는 소설은 이문열 작가가 쓴 작품이다) 그걸 오로지 수옥의 몸에 새겨진 문자와 그 몸을 기술하는 시청각 기호들 사이의 경계만을 따라가면서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볼 것이다. 소설은 버스정류장에서 그 묘한 열기에 취해 몽롱한 기분이었다가 갑작스러운 소나기에 언뜻 정신이 들었다고 한 다음 수옥을 묘사하듯이 따라간다. 영화도 버스 정류장의 씬과 그 장소를 떠난 다음을 분리하듯이 수옥이 그 편지를 찢어버리고 벽에 기대어 운 다음 갑자기 하늘을 쳐다본다. ( S #17)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수옥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장면은 그녀가 이 길을 왔던 장면에 대구라도 되는 것처럼( S #3) 같은 위치에서 찍었다. ( S #18) 단지 수옥이 등을 돌리고 돌아가는 것 말고는 이 두 개의 쇼트는 정확하게 동일하다. 그 쇼트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비를 맞으며 걸어가던 수옥은 거세지자 뛰기 시작한다. ( S #19_20_21) 그리고 저 멀리 물레방앗간이 보인다. ( S #22) 말하자면 수옥이 버스 정류장까지 올 때 진행했던 쇼트의 역순. 22번째 쇼트는 2번째 쇼트의 정확한 반복이며, 나는 이미 이 쇼트가 그보다 훨씬 앞서서 깨철이 동네 아이들과 화천댁 앞에서 개구리를 잡던 장면이라는 것을 설명했다. 뚝방 아래로 내려가서 개울에 카메라를 세운 다음 이 의미심장한 자리에서 올려다보는(low_angle) 카메라. 그러므로 22번째 쇼트는 이렇게도 설명할 수 있다. 지금 물레방앗간으로 달려가는 수옥을 깨철은 카메라 뒤에 숨어서 쳐다보고 있는 중이다. 반대로 소설에서는 깨철이 언제부터 수옥을 쫓아왔는지 알 수가 없다. 우연히 물레방앗간에 있다가 마주친 것인지, 아니면 거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지, (그런데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수옥이 물레방앗간에 들리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혹은 만일 소나기가 이보다 좀 더 이르거나 늦었다면 그녀는 이 길을 지나가더라도 여기 들렸을 리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기 전까지 어떤 흔적도 없다. 하지만 깨철은 수옥에게 분명하게 말한다. “오후 내내 지켜보고 있었지. 정류소에서 안절부절 기다리고 서 있을 때부터......” 나는 이 말을 문자 그대로 생각한다. 오후 내내 정류소에 함께 있었던 깨철. 그런데 그는 어디에 (숨어) 있었던 것일까. 깨철이라는 흔적. 그것을 보여주기 위한 반복. 수옥이 버스 정류장에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기 위해서 왔을 때, 이 쇼트들이 다시 이미 본 쇼트의 형태를 반복할 때, 그 쇼트에서 지워져버린 깨철은, 동일한 쇼트가 반복될 때, 거기 결핍되어 있는 잉여인 것이다. 피부를 찌르는 듯한 눈빛. 빛의 얼룩. 이 얼룩이 사라질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마치 덫에 걸려들기라도 하듯이 수옥은 물레방앗간으로 향한다. 


S# 25


S# 26

물레방앗간에서 소설과 영화의 차이점은 간단하다. 첫 번째 차이. 여기서 깨철의 대사가 모두 사라졌다. 깨철은 벙어리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물레방앗간에서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수옥의 대사도 빗장 문이 닫힐 때 “누구야, 문 열어! 소리 지를 테야!”와 깨철이 수옥을 짚 검블 위에 쓰러트릴 때 “놔! 놓으란 말야”가 전부이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물레방앗간의 문이 닫히자마자 수옥이 “누구예요? 문 열어. 소리 지를 테야” 라고 날카롭게 소리친다. 깨철이 약간 쉰 듯한 목소리로 “떠들어봐야 소용없어, 소나기가 오는 들에 사람 나다니는 것 봤나?”라고 대답하자 “깨철이지? 이거 못 놔?”라고 제법 마을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으름장까지 놓는다. 나는 먼저 이 장면을 그려보고 싶다. 소설 속의 물레방앗간은 영화보다 훨씬 어둡다. 소설에서 수옥은 문이 닫히고 나타난 사내가 처음에는 누군지 잘 보이지 않아서 날카롭게 소리치며 묻는다. 이때 수옥이 상대방이 깨철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둠에 눈이 익어서가 아니라 그가 하는 대답의 약간 쉰 듯한 목소리의 음색을 듣고 나서이다. 영화는 수옥이 물레방앗간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왼쪽에서 나타나서 문을 걸어 잠그자( S #25) 돌아보는 수옥을 클로즈업의 표정으로 찍었다. ( S #26) 돌아보자마자 누군지 알아차리는 수옥의 표정. 그녀에게는 질문이 필요 없다. 둘 사이의 차이. 나는 좀 더 설명하고 싶다. 소설에는 두 사람의 정사에서 가시적인 묘사가 없다. 단지 두 가지 감각, 촉각과 청각에만 의지하면서 그 둘의 정사가 진행된다. 두 개의 문장. 하나, 깨철이 문을 걸어 잠그고 처음 수옥을 붙잡을 때, (... 중략) 약간 쉰 듯한 목소리와 함께 집게 같은 손이 내 팔목을 죄었다. 두 번째. 수옥을 쓰러트리고 치맛자락을 거칠게 감아쥔 다음, (... 중략)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에게서 빠져나오려고 기를 썼다. 그런 나를 덮쳐누르고 있던 그가 다시 뜨거운 입김을 내게 뿜으며 중얼거렸다. 이게 정사를 묘사하는 문장의 전부이다. 영화는 이걸 35개의 쇼트로 거의 분해하듯이 잘게 쪼개나가기 시작한다. 이때 정사의 진행 과정 사이로 물레방앗간이 활동하는 쇼트가 삽입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 차이는 소설과 영화 사이에서 좀 더 결정적이 된다. 

두 번째, 장소의 차이. 소설은 (... 중략) 얼결에 주위를 둘러본 나는 길가에 있는 조그만 창고를 발견하고 그리로 뛰어갔다. 그런 다음 창고 안의 어떤 묘사도 하지 않는다. 단지 문자가 건드리는 것은 그날따라 텅 비고 조용했다는 것이 전부이다. 영화처럼 말하자면 미장센이 없는 공간. 영화는 이 물레방앗간에 도착할 때까지, 여기서 사건과 마주칠 때까지, 몇 차례이고 반복해서 보여준다. 창고와 물레방앗간. 둘 사이를 형태론적으로만 비교하면 단순하다. 소설은 수옥이 창고 안으로 들어온 다음 깨철과의 정사를 촉각과 청각에 의지해서 진행시킨다. 이 진행은 종종 수옥의 주관적인 설명을 거기에 덧붙인다. 이때 이 광경은 두 가지 전제를 담고 있다. 첫째,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이 광경은 지금 수옥이 남편 곁에서 회상하고 있는 기억 속의 시간이다. 많은 것이 지워졌을 것이며, 또 어떤 것은 그렇게 남아있을 것이다. 어쩌면 깨철의 말조차 기억 속에서 자기 자신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윤색된 것일지도 모른다. 둘째, 수옥은 지금 남편이 왜 오지 않았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그녀의 간절함. 그녀의 의심. 그러나 소설에서는 후회만 거기 머물러 있다. 후회? (... 중략) 결근이라도 하고 그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지 못한 것이 그제야 뼈저리게 후회되었지만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 문자를 내 멋대로 각색하고 싶어진다. 겉으로 드러난 것은 남편을 만나러 가지 않은 것이지만 이 후회의 내밀한 고백은 남편이 오지 않아서 깨철과 정사를 하게 된 사건 자체를 앞질러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영화는 수옥과 깨철의 정사를 진행하면서 물레방앗간의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것을 평행으로 진행한다. 다소 따분한 표현이지만, 물레방앗간은 수옥의 몸에 대한 의인화를 통해서, 은유적인 기계가 된다. 이때 물레방아는 멈춰 서 있다가 그 위에 쏟아져 내리는 비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서 돌아가기 시작한다. 점점 쌓여가는 리비도의 무게. 방향을 바꿀 수 없고, 길들여지지 않으며, 조절할 수 없는 힘. 수옥을 그 어딘가로 밀어내기 시작하는 에너지. 그때 충동이 신체의 일부 대상이라는 프로이드의 말에 따라, 충동이 국부적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대입하면, 수옥의 말단 기관, 성감대들, 국부적인 신체기관들이 거의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 마침내 물레방아가 활동을 시작한다. 


S# 35


S# 36

 
소설 안의 욕망의 문자들. 나는 발췌하듯이 건드려보고 싶다. (... 중략) 나는 아무런 부끄럼 없이 남편에게 썼다. 단 한 번, 단 한 순간이라도 좋으니 다시 한 번 그의 품에 안기고 싶다고, 다시 한 번 따뜻한 그의 체온과 뜨거운 숨결을 느끼고 싶다고 무슨 수를 쓰든 꼭 한 번 다녀가 달라고. (중략) 남편이 오기로 되어있는 그 일주일을 나는 마치 열에 들뜬 사람처럼 보냈다. (중략) 그런데 한 가지 알 수 없는 것은 그런 허탈함 가운데서도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내 몸이었다. 아니, 그 이상, 남편의 품에 안길 것을 상상하며 보내온 지난 일주일보다 그가 이제는 올 수 없다는 것을 뚜렷이 알게 되면서부터 더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 중략) 말하자면 영화가 볼 수 없는 문자들. 이때 리비도는 모두 문자 뒤로 숨어들었다. 임권택은 이걸 (영화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말인) 대사로 설명하는 대신 물레방앗간을 수옥의 몸에 은유하는 기계로 배치한 다음 물레방아를 활동시키기 시작한다. 이 활동을 설명하는 이상한 제스처. 깨철이 수옥을 움켜잡은 다음 웃옷을 벗기기 시작할 때 수옥은 그 손길을 뿌리치는 대신 손을 내밀어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더듬거린다. 그리고 그걸 붙잡고 잡아당기자 붙들어 매어 놓은 것이 풀리면서 ( S #35) 물레방아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 S #36) 수옥과 물레방아 사이의 연결. 차라리 인물의 활동과 사물의 운동 사이의 접속이라고 부르고 싶은 유기적 조립. 소설에서 깨철이 수옥을 덮쳐누르면서 다시 뜨거운 입김을 귓가에 뿜으며 “이 깨철이 다른 건 몰라도 언제 너희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지는 정확히 알지. 지금 네 몸은 달아있을 데로 달아있어” 라고 중얼거릴 때 나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리고 이 말이 이 상황에 대해서 지루할 정도로 설명적이라는 생각을 했다. 여기서 구태여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을까. 깨철이는 수옥의 심리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동원된 정신분석 상담의사가 아니다. 지금 수옥은 깨철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 기를 쓰고 있고, 깨철은 치맛자락을 거칠게 움켜쥐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깨철은 한가하게 수옥의 귀에 대고 그녀의 심리를 읽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 말이 성립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라고 생각한다. 이 말은 사후적인 설명이다. 그리고 이 광경은 지금 기억 속의 시간이다. 그때 도착하지 않은 남편의 자리를 깨철이 차지하고 있는 중이다. 마치 깨철의 가면을 쓰고 나타난 것만 같은 남편의 역할 놀이. 나는 이 말이 수옥의 기억 속에서 그녀 자신이 지어낸 말처럼 들린다. 소설이 해석적이라면 영화는 도식적이다. 


S# 27


S# 28


S# 50


S# 51


S# 52


S# 58


S# 59


 씬 S# 24


씬 S# 25

나는 이미 소설에서 정사를 다루는 문장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 대신 두 사람은 서로의 대화를 나눈다. 반대로 영화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무 대사 없이 정사가 진행된다. 나는 단지 대사의 여부를 놓고 이 묘사가 반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미묘한 순간이 있다. 빗장을 걸어 잠근 다음( S #27) 수옥이 돌아보는 얼굴의 클로즈업을 보았을 때( S #28) 나는 이 쇼트가 자동적인 반응이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틀렸다. 그런 다음 이상할 정도로 깨철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쇼트가 거의 없다. 카메라는 대부분 깨철의 등 뒤에서 수옥의 얼굴을 보여주거나, 두 사람이 함께 보일 때는 어둠 속에서 얼굴을 구별하기 힘들만큼 뒤로 물러나거나, 아니면 수옥의 얼굴을 보여줄 때 깨철은 프레임 바깥에 있다. 이때 가장 이상한 순간은 수옥의 팬티를 벗기려는 동작이 반복되다가 문득 이 쇼트의 진행이 멈추기라도 하듯 수옥이 이상한 표정을 짓는다. ( S #50) 그러자 그걸 내려다보는 깨철이 만족한 웃음을 흘린다. ( S #51) 이 두 개의 쇼트가 가장 이상한 것은 그 두 사람의 표정이 아니다. 혹은 그 표정은 너무 갑작스러운 것이어서 의미의 차원에서는 어떤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그냥 모호하게 남는다. 임권택은 이 진행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을 설명할 생각이 거의 없다. 내 질문은 이 두 개의 쇼트가 서로 시선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옥을 내려다보았을 때 나는 이 쇼트가 깨철이 보는 시선이라고 생각했다. 다음 쇼트에서 그 눈길이 깨철의 시선이 맞긴 하지만 깨철을 바라보는 시선은 갑자기 상상선 바깥으로 나와서 왼쪽 옆에서 쳐다보고 있다. 표준적 판본은 깨철을 아래서 위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걸 변형하면 수직선을 놓고 45도 안쪽에서 보아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카메라는 깨철과 수평으로 옮긴 다음 90도로 바라본다. 이건 누구의 시선일까. 물론 아무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 물레방앗간에는 두 사람 이외에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마치 이 정사의 진행 바깥으로 나와 버린 것만 같은 카메라의 자리. 다소 수사학적으로 설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깨철은 이 정사의 바깥에 놓여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시선은 마주보는 것이지만 두 개의 쇼트는 서로 마주보지 않는다. 일련의 연쇄망에서 빠져나가버린 쇼트. 반사적인 긍정. 이제까지 내내 깨철은 없으면서 거기 있었지만 지금 깨철은 여기 있으면서 없는 것이다. 나는 이 공식을 일반화의 전철을 따라 성관계는 없다, 라는 라캉의 판본으로 옮겨놓고 싶지 않다. 소설과 영화가 서로 완전하게 겹치듯이 공유하는 이 사건에 대한 수옥의 알리바이. (... 중략) 남의 아내 된 여자로서 한 가지 변명을 삼을 것이 있다면, 그 절정의 순간에도 내가 떠올리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의 얼굴이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래요, 난 지금 깨철이 아니라 오지 않은 남편과 정사를 즐기는 중이예요. 의미심장하게도 깨철의 쇼트에서 수옥의 쇼트로 되돌아왔을 때 수옥의 눈길이 무엇을 보는지 애매하게 그 무언가를 본다. ( S #52) 거기서 단 한 가지 그 시선이 깨철을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아니, 차라리 그 시선은 깨철을 보지 않기 위해서 거기 그렇게 모호하게 눈길을 던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눈 앞에 있는데도 마치 그게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아니 그보다는 대상 자체가 있지도 않기라도 하듯이 지나쳐 가버리는 눈길. 그때 깨철은 프레임 아래로 사라져버리고 난 다음 정사의 행위가 시작된다. 그저 수옥만이 보이는 화면. 상대가 사라진 쇼트. 이때 수옥의 쇼트를 마주      보는 것은 깨철이 아니라 돌아가기 시작하는 물레방아이다. 물론 미학적으로 이 편집이 푸도프킨의 전통이라고 말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이때 이 정사는 마치 수옥 혼자서 진행하는 일종의 자위행위처럼 보인다. 그리고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이 모든 행위가 끝난 다음 누워있는 수옥에게 옷을 덮어주고 ( S #58) 깨철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떠날 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의 발뿐이다. ( S #59) 부분대상으로서의 깨철. 이 부분적 동일시에 대해서 수옥이 지난 일주일 내내 앓듯이 식을 줄 모르고 달아오르는 몸이라는 증환이 우울증인지 히스테리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혹은 그런 설명의 목표를 지니지 않고 수옥을 다루고 있다. 소설은 이 한 차례의 정사에 대해서 (...중략) 그러나 남편에 대한 죄의식이나 도덕적인 가책으로 괴로워 한 기억이 별로 없었던 것은 지금 와서 보면 한심스럽다기보다는 기이한 느낌이 든다, 라고 덧붙인다. 영화는 소설 속에서 이 정사에 대해 가졌던 수옥의 감정을 거의 고스란히 수옥의 목소리로 반복하면서도 앞 뒤 문장을 남겨놓고 이 구절은 감쪽같이 지워버렸다. 사라진 문자. 너무 당연해서 생략을 해도 상관없기 때문이 아니라 반대로 그게 너무 불편해서 그것이 주는 억압을 피하기 위한 외면이 아닐까. 무언가 영화는 이 장면을 그렇게 길게 찍고 있으면서도 이 순간을 외면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피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단지 이 장면만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에서는 수옥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대목이 없다. 영화에서 수옥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씬 S #24_25) “이번 시간엔 사회 141쪽 삼강오륜을 같이 공부하겠어요. 삼강오륜이란 유교에서 기본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 기본 윤리를 말하는 겁니다. 먼저 유교란 유학을 중심으로 한 공자의 가르침으로서 이미 먼 삼국시대부터 학문과 도덕으로 우리들 생활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일찍이 세종대왕께서도 삼강행실도란 책을 펴내 말보다는 행실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자, 적어요”라고 말한다. <안개마을>에서 수옥의 목소리(voice_over)를 제외한 가장 긴 대사. 물론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것과 그 자신이 그것을 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앞으로 있을 수옥의 외도에 대해서 미리 어딘가 모르게 방어선을 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시 처음으로, 두 개의 광경. 나는 그 둘을 문자와 쇼트로 다시 생각하면서 이 둘 사이에서 줄기차게 불화를 보았다. 이것이 소설과 영화 사이의 근본적인 대결의 문제라는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서로가 상대방의 내부로 들어갈 때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방법에 따라 마치 분리를 감행하는 듯한 순간들을 계속해서 마주보게 된다. 나는 이것을 그렇다고 이문열임권택의 대결이라는 식으로 따분하게 말을 피하고 싶지 않다. 임권택은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많은 소설가들, 특히 <서편제> 이후 이청준과 매우 긴밀하게 작업을 계속했다. 같은 방식으로 다시 질문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이청준과의 작업에서도 동일한 불화를 계속해서 마주 보았다. 대부분의 영화에서 소설 안으로 들어갈 때는 배제의 기술을 활용한다. 임권택은 그런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안개마을>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문자가 광학효과를 발휘할 때 그것을 쇼트로 옮겨오는 순간들이다. 물론 여기에 이행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환원의 위험이 뒤따르고 있다. 이것은 저것으로 올바르게 옮겨질 것인가, 그런 다음 원래대로 작동할 것인가. 이때 여기에 각자의 근거에서 비롯된 기이한 강제력을 마주하게 된다. 문자가 끌어당기는 힘. 쇼트가 활동하는 순간 끌어당기는(attraction) 또 다른 힘. 나는 이제까지 영화 안에서 문자를 생각했다. 반대로 이문열의 소설 안에서 쇼트의 활동을 생각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건 여기서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나는 이 둘이 서로 하나로 재구성될 수 없는 각자의 힘의 바탕 위에 서 있는 것을 구석구석에서 보았다. 사라진 문자, 나타난 쇼트. 때로는 거기 새겨진 문자, 그걸 반사하는 쇼트. 그 사이의 감각들. 문자를 영화는 어떻게 체험할 것인가. 둘 사이의 접촉. 문자가 움직이기 시작할 때 쇼트는 거기서 그것을 읽기 시작한다. 나는 두 개의 동사를 생각한다. 움직이는 것을 읽어야 한다. 리오타르가 내게 일러준 말. 문자는 형상을 잘게 부수고 그런 다음 내재화의 과정을 밟아나간다. 그때 바깥에 무엇이 남을 것인가. 본다는 것의 외재화. 나는 지금 담론의 시선이라는 말을 생각하는 중이다. 그때 형상은 담론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문학과 영화 사이의 은밀한 대화가 나타나는 서로의 방법. 하나는 오로지 문자 안에서 모델을 세운 다음 그것에 시선을 던질 때 비로소 거기서 영화가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다른 하나는 쇼트가 동사로 활동할 때, 혹은 자신의 시청각 기호들이 부사가 될 때,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임권택은 문장을 유심히 지켜본 다음 그 순간을 느껴본다. 나는 수 없이 많은 독후감을 보았다. 나는 읽었다고 쓰지 않았다. 영화는 문학을 읽고 또 읽었다. 나는 보았다고 쓰지 않았다. 그 중에서 임권택의 독후감을 보고 또 보았다. 그냥 한 마디로 <안개마을>은 문자의 독후감이다. (계속) 



1982년 91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제작  (주)화천공사
각본  송길한
촬영  정일성
편집  김창순
음악  김정길

정윤희  수옥
안성기  깨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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