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어제 내린 비 이장호, 1974

by.김영진(영화평론가) 2011-08-24조회 3,027
어제 내린 비

이장호 감독의 필모그라피 가운데 <별들의 고향>으로 시작된 1기에 대해선 그다지 깊이 있게 조명되고 있지 못하다. 최인호의 소설을 데뷔작으로 만들어 한국 영화사상 최고 흥행기록을 세운 풍운아가 된 이래 좌충우돌 생맥주와 통기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던 이장호의 그 시기는 짧은 일장춘몽처럼 끝났다. 대중문화계에 불어 닥친 대마초 파동으로 이장호는 군사정권으로부터 활동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바람 불어 좋은 날>로 재기하기 까지 이장호는 생애 가장 왕성한 상상력을 발휘할 시기를 울분과 좌절로 보냈다. 그 결과 사회적 의식에 눈떠 정치적으로 좀 더 진보적이고 형식적으로도 훨씬 전위적인 2기 이장호 필모그라피가 시작될 수 있었다, 라는 것이 대체로 공인된 비평적 시각이다. 

이장호가 대마초 파동으로 타의에 의해 영화감독 활동을 잠지 접지 않았더라면, 이장호의 영화세계는 어떻게 진행되었을까. 얼마 전 <어제 내린 비>를 스크린으로 처음 본 후 이장호에게 강제된 휴지기가 없었다면 또 다른 근사한 필모그라피가 생겨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제 내린 비>는 이장호의 두 번째 연출작이자 이장호의 동생 이영호의 데뷔작이며 <별들의 고향>으로 스타가 된 안인숙의 마지막 영화출연작이다. 크레딧 시퀀스의 자막이 화면에서 다 씻겨 나갈 만큼 부실한 제작여건 속에서 오로지 감각으로 들이밀며 좌충우돌 찍어낸 흔적이 역력한 이 영화가 개인적으로 나는 좋았다. 수일한 완성도는 아니지만 1970년대 당시 새롭다고 느껴질 만한 감성이 도드라지게 있었다. 정치적으로 퇴행적이고 패배주의적이며 당국으로부터는 퇴폐적이라고 지적당할 만한 부분이 있지만 나는 오히려 그 점 때문에 좋았다. 

<어제 내린 비>는 오늘날 텔레비전에서 막장 드라마라고 불리는 유형의 스토리로 펼쳐지는 영화이다. 김희라가 연기하는 영후는 스물 두 살의 청년인데 어느 날 아버지가 본가로 데려간다. 영후는 흔히 말하는 첩의 자식이었다. ‘멍텅구리 새끼야’를 입에 달고 살았던 친모로부터 살가운 애정을 받지 못한 채 자란 그는 눈치 10단이다. 가슴에 뜨거운 불덩이를 안고 있지만 겉으로 발산하지는 못한다. 만능 스포츠맨이지만 실제 경기에는 나서지 못한다. 경기에 나서면 승부에 지는 것이 두려워 지레 포기한다. 그런 영후가 들어간 본가는 유복한 상류층 생활을 누리고 있고 천사같은 외모로 마음에 주름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복동생 영욱이 있다. 이영호가 연기하는 이 인물은 대지에 발을 딛고 사는 것 같지 않은, 늘 먼 곳을 보는 듯한 눈빛을 하고 있는 아마추어 가수이며 세상으로부터 구겨지지 않은 청년이다.

영후는 눈치 빠르게 새 생활에 적응한다. 이복동생 영욱의 신뢰를 얻고 새 어머니의 마음도 훔친다. 영후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건 영욱의 여자친구인 민정이다. 민정을 보고 첫 눈에 반한 영후는 민정을 따라다니지만 그녀가 영욱의 약혼녀로 양가 집안에서 공인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자기 사랑을 접는다. 처음에 영후의 접근을 거부했던 민정은 영후의 사랑받지 못한 거친 파괴적 면모에 스르륵 마음이 이끌려 나중에는 그녀가 자발적으로 영후에게 다가온다. 축복받지 못할 이들의 관계는 예상했던 대로 파국으로 치닫는다. 약간의 반전과 굴곡이 더해지는 영화의 후반부에 이르면서 나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공유하고 있는 일종의 고아의식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 고아의식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물질에 삶의 모든 걸 걸고 매진한 부모세대로부터 느끼는 이물감과 성공지상주의 이데올로기에 복종하면 다른 것은 방임하는 도덕적 진공상태와 스스로 주체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반항감을 넘쳐나는 청년의 에너지로 끌어안고 파괴적인 질주로 나아가는 그 무정형의 의식과 행동이 묘한 친밀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어제 내린 비>는 들쑥날쑥한 완성도와 상관없이 감독의 터치를, 배우들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해준다. 청년 이장호에게는 아직 매체를 장악할 만한 능란함이 없으나 영화 매체의 관습을 거꾸러트리겠다는 야심만은 화면 곳곳에 묻어난다. 김희라는 뭉툭하고 강인한 몸짓으로 청년기의 거센 기운을 화면에 뿜어낸다. 자기방임적인 꽃미남의 개방된 연약함을 드러내는 이영호의 존재감도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한다. 그런 매력은 인생의 특정 시기에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안인숙의 매력은 명불허전이다. 그 시기 영화에 곧잘 나오는 겉으로는 도도하지만 속으로는 순진한 전형적인 청춘여성의 전형인데, 허물어질 아름다움을 안간힘을 다해 붙잡고 있는 불가항력의 몸짓을 화면 가득 채우고 있다. 그 밖의 보너스라면, 최인호의 소설에서 빚졌을 대사, 이를테면 “난 네 엉덩이가 좋아. 망아지의 엉덩이처럼 예뻐.”와 같은 말투도 마음에 든다. 이런 감성은 이제 이 시대에선 사라져버린 것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이 영화가 주는 매력의 전부 다가 그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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