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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영춘, ‘위반’의 코미디언 by.박선영(고려대학교) 서영춘(1928~1986)은 구봉서, 김희갑 보다 다소 늦게 연예계에 등장했다. 서영춘은 국도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다가 악극단의 유명 작곡가였던 형 서영은의 도움으로 1952년에 데뷔했는데, 오래 지나지 않아 쇼 무대의 사회자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백금녀를 만나 코미디 콤비를 이루면서 ‘뚱순이와 갈비씨’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얻었고 이후 라디오 코미디 프로그램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를 누리게 되었다. 코믹한 연기력과 뛰어난 순발력, 거침없는 언변으로 수많은 유행어를 만들어냈던 서영춘은 당대 가장 인기 있는 연예인이었다. 서영춘은 1961년 <인생갑을병>으로 영화에 데뷔한 뒤,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로 스타덤에 올랐다. 1965년 6월 개봉한 <여자가 더 좋아>는 이례적으로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상영되면서 19만의 관객을 동원, 그 해 최고의 인기작이 되었고 이 영화의 인기를 바탕으로 서영춘은 명실공히 원톱 주연이 가능한 최고의 코미디 스타가 되었다. 뒤이어 각종 라디오와 영화에서 서영춘의 겹치기 출연이 이어졌다. 이 시기부터 서영춘은 라디오, 영화, TV와 각종 무대에서 존재감을 발하며 1986년 간암으로 사망할 때까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사진1) <여자가 더 좋아>(김기풍, 1965) 포스터. 서영춘을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은 영화로, 여장을 한 뒤 우여곡절 끝에 성정체성을 발견하게 된 서영춘이 성전환 수술을 받는다는 다소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1965년 최고의 인기작이자 서영춘의 대표작이 되었다. 한편, 서영춘은 ‘저질 코미디’ 논란에 시달리는 대표적인 코미디언이기도 했다. 일례로, 1965년 12월 27일, 중앙라디오방송의 <다이아몬드 스테이지>라는 프로그램 중 한 코너인 ‘하꼬바꼬 요리강습’에서 서영춘은 파리로 국을 끓이는 법을 소개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1966년 1월에 열린 방송윤리위원회의 정례위원회는 서영춘의 출연정지 1개월을 의결했다. 저속하고 품위 없는 코미디를 했다는 이유였는데, 중앙라디오방송에서는 그것이 서영춘의 탓이 아니라 각본을 쓴 작가 최휘로의 문제였다고 변명하며 재심을 청구했다. 그러나 위원회는 각본과 코미디 실연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고 판단하여 서영춘의 출연 정지를 재가결했다. 이듬해 9월 서영춘은 또 다시 경고처분을 받았다. <다이아몬드 스테이지>에서 품위 없는 언동의 저속한 코미디를 했다는 것이었다. 1967년에도 역시 같은 방송에서 “우리말을 일본식으로 발음하여 언어순화에 역행”하고 “청소년들에게 저속한 유행어를 전파”시키는 품위 없는 방송을 했다는 이유로 경고처분을 받았다. 이처럼 서영춘은 활동 기간 내내 라디오와 영화, 방송에 걸쳐 각종 감시와 제재에 시달렸다. 사생활에서도 서영춘은 공권력과 잦은 마찰을 빚곤 했다. 애초에 서영춘은 구봉서처럼 전형적인 ‘가부장’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있거나 얌전하고 모범적인 이미지를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방송 이외에도 여러 차례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그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1965년 10월 경찰의 날 행사를 둘러싼 소동이었다. 이 날 사회자로 섭외되었던 서영춘은 40여 분을 지각했다. 각급 경찰 간부를 비롯하여 내무부 장관까지 참석하는 행사에 서영춘이 나타나지 않자 30분이 지나가는 시점에서 긴급수배가 내려졌다. 다행히 그로부터 10분 뒤 도착하여 무사히 행사를 마치고 나자 이번에는 화가 난 종로 경찰서장이 그를 사기혐의로 불구속 입건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서영춘은 형제까지 연루된 폭행사건 및 경찰 치사 사건 등 다양한 사건사고로 가십거리를 제공하곤 했다. 이처럼 서영춘의 통제 되지 않는 성격, 금기를 깨는 막말과 눈치 보지 않는 코미디 스타일 등은 1960년대 후반 <팔도강산>의 아버지의 페르소나 그 자체가 되어버린 김희갑이나 그 자신 ‘건실한 사회인’이자 ‘가부장’으로의 이미지를 일찌감치 획득했던 구봉서의 코미디 스타일과 같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서영춘 코미디에 대한 제재가 지속되던 시기, 언론에서는 앞다투어 코미디의 저속함을 비판하고 나섰다. 먼저 1964년 방송국에서 코미디언 전속제가 시행되면서, 코미디의 수준이 점점 저하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코미디는 방송을 건전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 별로 보탬이 되지 않고 청취자의 말초신경이나 허파를 자극하는 걸로 만족해온 실정”인데, 코미디언 역시 “영화, 무대, 방송 등을 누비면서 같은 소재를 재탕삼탕 울거먹는다”는 것이었다. 1965년 5월 신아일보󰡕의 기사는 코미디언들이 때를 만나 TV, 라디오, 영화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지만 “저급한 대사가 아니라 독창성으로” 웃음을 줘야한다면서 작금의 코미디가 수준 이하의 것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1966년 9월 15일 《서울신문》 기사에서는 방송의 저속화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코미디라고 단언하면서, 코미디가 청취자의 “가치판단과 생활 윤리까지 파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기사는 또한 “어느 프로보다도 청취자들에게 강렬한 자극과 영향력을 끼치는” 코미디 프로의 정화가 이루어져야 방송 전체의 정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기사가 요약하는 라디오 코미디프로그램의 특징은 “조잡한 말의 나열과 불순한 상상력의 동원”, “저속하고 무가치한 언어”의 나열, “쓴 웃음을 자아내는 애드립”, “기성(奇聲)의 연속”, “아이디어의 빈곤”, “위트 이하” 등이었다. 기사는 더 나아가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기 위해 장기적으로는 신진 코미디언을 체계적으로 양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응급조치로는 “저속의 낙인이 찍힌” 코미디언을 퇴출해야하며 코미디프로 역시 정지되어야 한다는 것 등을 주장했다. 라디오스타 서영춘의 코미디는 이처럼 초기부터 저속논란에 시달렸다. 그러나 “저속”하고 “무가치”하며 “조잡”하다고 혹평 받는 서영춘의 코미디는 점차 팬덤을 형성했고 서영춘은 이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계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 라디오와 악극 무대 등에서 두각을 나타냈던 코미디 배우들이 영화로 진출하면서부터 대부분 비중 있는 조연이나 주연을 맡았던 것과 달리, 영화에서 서영춘은 거의 단역에 가까운 역할부터 시작했다. 그의 데뷔작이었던 <인생 갑을병>부터 서영춘은 <싸우는 사자들>(김묵, 1962), <안개낀 거리>(강범구, 1963), <어머니 울지 마세요>(전홍직, 1964), <눈물의 자장가>(최훈, 1965)에 이르기까지 20여 편에 가까운 극영화에서 엑스트라급 조연을 맡았다. 이 시기에는 코미디영화보다는 여타 장르 영화에서 단역 혹은 조연을 맡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당시 인기 코미디 배우였던 구봉서가 주연을 맡았던 <이거 됩니까 이거 안됩니다>(박종호, 1964)와 로맨틱 코미디 <총각김치>(장일호, 1964) 정도가 서영춘이 출연했던 코미디영화였다. <여자가 더 좋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기까지, 영화에서 서영춘의 존재감은 그리 크지 않았다.  (사진2)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 스틸. 1965년 <여자가 더 좋아>를 리메이크한 심우섭 감독의 1983년 영화에서 서영춘은 여장남자 식모인 강태기를 짝사랑하는 노인 역으로 출연했다.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그리며 위반의 쾌락을 선사했던 1965년의 영화와 달리 1983년의 영화는 그야말로 ‘건전’하고 ‘상식’적인 교훈극에 가까웠다. 서영춘이 영화 스타로 거듭났던 것은 <여자가 더 좋아>의 흥행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라디오스타’로서 서영춘의 인기가 한층 성장했던 시기도 1965년이었는데, 영화에서도 서영춘은 비중 없는 단역에서 비중 있는 조연으로 서서히 이동하기 시작했다. 유난히 영화에서 늦게 인기를 끌기 시작했던 서영춘은 1965년을 기점으로 전성기에 접어들어 한 해에만 35편의 영화에 주, 조연으로 출연했다. 물론, 더 이상 단역이 아닌 ‘비중 있는 조연’ 혹은 당당한 주연으로서였다. 그 중에서 단연 서영춘의 주가를 올렸던 것은 <여자가 더 좋아>였다. 이 영화는 1965년 최고의 화제작이자 그해 흥행 순위 1위를 차지하면서 ‘여장남자’ 코미디의 붐을 일으켰다. 이 영화를 기점으로 서영춘의 영화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진3) <큰 사위 작은 사위>(이봉래, 1965) 포스터. 1964년까지 주로 조연을 맡았던 서영춘은 포스터에 얼굴이 실린 적이 없었다. 1965년부터 비로소 포스터에 서영춘의 얼굴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이 영화의 주연배우들과 함께 큰 비중 없는 조연을 맡았던 서영춘의 얼굴이 포스터 한 켠에 그려져 있다. (사진4) <쥐구멍에도 볕들날 있다>(김화랑, 1965) 포스터. 정면을 바라보는 서영춘 고유의 코믹한 표정, 연민이 느껴지는 표정의 김희갑의 살짝 옆으로 돌려진 얼굴, 김희갑 얼굴 옆 제목의 배치 등으로 인해 조연이었던 서영춘이 주연 김희갑보다 조금 더 중심 인물로 보인다. <여자가 더 좋아>의 성공으로 서영춘은 영화계에서도 원톱 주연이 가능한 스타 배우가 되었다. 스타덤에 오른 코미디 배우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성공담을 가상의 이야기와 함께 엮어 보여주는 영화들이 제작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김희갑의 <김희갑의 청춘고백>(최경옥, 1964), 배삼룡의 <나의 인생고백>(심우섭, 1974), 이후 이주일의 <이주일의 뭔가 보여드리겠습니다>(김수형, 1980) 등이 이런 계열의 영화들이었다. 서영춘의 경우에는 1965년에,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라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대부분 악극단 출신이었던 이 코미디 배우들의 성공담은 시골 출신의 코미디언들이 우연히 악극단에 들어가게 되고 갖은 고생 끝에 스타가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코미디 배우들은 자신들의 특기와 코미디 레퍼토리들을 마음껏 선보일 수 있었고, 가상과 현실을 넘나드는 구성을 통해 한층 관객들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사진5) <출세해서 남주나>(이용호, 1965) 포스터. 화려한 악극단의 뒷모습, 시골 출신 코미디 배우의 인생 역전, 각 코미디 배우들의 장기를 한층 살린 ‘스펙터클’한 장면을 보여주는 것 등이 이 ‘가상의 전기 영화’들이 가진 특징이었다. 서영춘의 ‘성공담’을 엮은 <출세해서 남주나> 역시 이런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렇게 성공한 코미디 배우의 대명사가 된 서영춘은 1966년부터 1971년까지 6년 동안 80편이 넘는 영화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서영춘은 다양한 하위 장르의 코미디영화들에 출연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것은 당대 최고의 명성을 누렸던 외화 <007> 첩보 시리즈를 패러디한 <살사리 몰랐지>(일명 <007 폭소판 살살이 몰랐지>(김화랑, 1966)), <요절복통 007>(김대희, 1966), <기상천외>(김대희, 1967) 등이었다. 서영춘은 이 영화들의 주연을 맡아, 한국 코미디 첩보물을 개척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6)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 포스터 (사진7)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의 서영춘 (사진8) <살사리 몰랐지>(김화랑, 1966)의 한 장면. 탐정소설 매니아인 보석점 직원 서영춘이 우연한 기회에 007처럼 첩보원이 되어 마약밀매법 일당을 소탕한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자신의 유행어인 ‘살사리 몰랐지?’를 매 에피소드마다 연발하며, 자신의 코미디 레퍼토리인 여장하기, 권투 시합 등의 장면을 통해 웃음을 이끌어냈다. 한편, <살사리 몰랐지>에서처럼, <여자가 더 좋아>의 성공 이후 서영춘이 주연인 코미디영화들에서는 서영춘의 여장이 주된 플롯의 장치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김화랑, 1966)이나 <내 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가 대표적인 영화였다.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은 일종의 <시집가는 날>의 패러디로,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부잣집 바보 도령(김희갑)에게 시집가게 된 주인댁 딸을 대신해서 결혼하는 머슴의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김희갑과 서영춘의 결혼생활이 유발하는 웃음의 코드는 <내 것이 더 좋아>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활용되었다. <내 것이 더 좋아>는 가수가 되고자 하는 꿈을 안고 시골에서 상경한 성춘(서영춘)이 우연히 만난 봉수(구봉서)의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 부부 행세를 하고 각종 소동을 벌이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세 차례에 걸친 시나리오 검열과 실사검열 이후의 (조건부) 상영허가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 개봉한 영화로, 서영춘 코미디의 ‘불온함’이 잘 드러난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사진9) <남자는 절개 여자는 배짱>(김화랑, 1966) 포스터 (사진10) <내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의 한 장면. 목욕탕에서 쫓겨난 서영춘 (사진11) <내것이 더 좋아>(이형표, 1968)의 한 장면. 미용체조를 하는 서영춘. 이 영화에서 서영춘은 혼자 있을 때도 풀메이크업의 여장을 하고 몸매를 가꾸기 위한 미용체조에 열중하는 등 성적 혼란을 느끼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1960년대 후반에 서영춘은 주로 구봉서 주연의 코미디영화에 조연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영춘은 구봉서와 짝을 이루어 ‘남자 시리즈’나 ‘팔푼이 시리즈’ 등에서 조연으로 등장하여, 취업과 결혼이라는 지상 과제에 서민 대중의 욕망을 투사했다. 구봉서가 항상 성공적으로 취업과 결혼이라는 임무를 완수하고 ‘정상적’인 중산층 가정의 윤리를 구현하는 ‘가부장’으로 거듭나는 인물을 연기할 때, 서영춘은 그의 곁에서 좌절하거나 실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다. 성실하고 우직한 구봉서에 비해, 한결 약삭빠르고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서영춘은 그럼에도 과히 밉지 않은, 평범하면서도 속물스러운 서민 대중의 또 다른 자아이기도 했다. <단벌신사>(김기풍, 1968)에서 친구 구봉서의 복권을 탐내는 도어맨,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에서 또 다른 가짜 미용사로 변장해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되돌리려다 결국 결혼식장에서 버림받는 세탁소 직원, <번지수가 틀렸네요>(심우섭, 1968)에서 사장 딸인 줄 알고 접근하여 결혼을 약속하게 되지만 사실은 식모였음을 알게 된 수위(물론, 사장 딸은 구봉서와 결혼하게 된다.), <요절검객 팔도검풍>(김기풍, 1969)에서 생계가 어려워 가짜 장군을 사칭하고 다니다 우여 곡절 끝에 진짜 산적을 잡게 되고 진사 댁의 식모와 맺어지는 검객(물론, 여기서도 진사 딸은 구봉서와 결혼한다.) 등 서영춘의 캐릭터들은 성공의 ‘일보직전’에서 약간의 패배와 함께 약간의 좌절을 맛보는 인물이었다.   (사진12) <단벌신사>(김기풍, 1968) 포스터. 구봉서의 단벌양복과 복권을 탐내는 친구 서영춘  (사진13) <남자미용사>(심우섭, 1968)에서 가짜 앙드레로 변장한 구봉서와 서영춘(오른쪽), 그리고 진짜 앙드레 곽규석(가운데) (사진14) <번지수가 틀렸네요>(심우섭, 1968)에서 사장 딸 행세를 하는 식모에게 속아 넘어간 수위 서영춘 (사진15) <요절검객 팔도검풍>(김기풍, 1969) 포스터. 가짜 검객 구봉서와 서영춘의 억울한 민중 구하기가 펼쳐진다. 1960년대 후반 근대화의 뒷길에 놓인 서영춘의 캐릭터는 혹독한 삶의 조건 속에서, 여장이나 변장과 같은 속임수가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는 도시 변두리의 떠돌이들이었다. 구봉서와는 달리, 처음부터 서영춘은 지켜야 할 가족이나 도와야 할 동생이 있는 ‘가부장’의 위치에 있지 않았으며 따라서 좀 더 가벼운 몸놀림으로 제 한 몸을 건사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불타는 생존욕구로,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거나 변장을 하는 것은 그에게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영춘 캐릭터의 실패는, ‘정상성’이나 ‘사회적 규범’을 포기한 데 따른 일종의 징벌과 같은 것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죄책감 없이 ‘가학’적 쾌감을 만끽하게 했다. 그런 한편, 서영춘의 거침없는 언변, 욕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애드립, 기괴하고 과장된 표정과 슬랩스틱에 적합한 신체는, 점차 경직되어 가던 사회적 분위기와 국가의 규율 안에서 ‘해방감’을 주는 위반의 쾌락을 선사했다. 이런 점에서, 잘 짜여진 스토리와 닫힌 결말, 교훈을 주는 메시지를 선호했던 한국의 코미디영화 안에서 서영춘은 주연보다는 조연에 더 어울리는 배우였다. 코미디영화로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던 당시에도, 서영춘은 항상 좋은 악극 무대를 기획하는 것이 꿈이라는 말을 하곤 했다. 악극단 시절부터 쇼와 만담, 사회 등 단편적이고 버라이어티한 구성에서 강점을 보였던 서영춘은 1960년대 말, 코미디언으로는 처음으로 시민회관에서 단독 리사이틀을 기획하여 코미디 쇼 무대를 선보이기도 했다. 영화에서 소비되었던 ‘서영춘’이라는 캐릭터 안에서는 다 담을 수 없었던 코미디로, 그 자신만이 주연인 쇼를 연출하기 위해서였다. 1970년대가 시작되면서, 대부분의 코미디언들과 마찬가지로 서영춘 역시 텔레비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1971년 8편의 영화에 출연한 것이 마지막 다작으로, 1972년 이후부터 1979년까지 총 8편, 1980년대에는 총 4편에 출연했다. 이 시기에 서영춘은 <팔도강산>의 아류작이라 할 수 있는 국책영화 <노래 실은 관광여행>(박희준, 1973), <팔도유람>(이명식, 1974)를 비롯하여 여전히 1960년대의 향수를 안고 있는 심우섭 감독의 영화들 <마음 약해서>(심우섭, 1979), <형님먼저 아우먼저>(심우섭, 1980), <82 바보들의 청춘>(심우섭, 1982), <여자가 더 좋아>(심우섭, 1983)에 잇따라 출연했으나, 그 웃음의 질이 예전 같지 않았다. 본격적으로 텔레비전의 시대가 도래하자, 단편적이고 감각적이며 속도감 있는 웃음을 추구했던 텔레비전 코미디에서 서영춘의 코미디는 더욱 빛을 발했다. 코미디영화들은 여전히 제작되었지만, 서영춘의 코미디는 이미 한껏 순화되어 텔레비전으로 넘어가고 난 뒤였다. <참고문헌> 박선영, 『코미디언 전성시대- 한국코미디영화의 역사와 정치미학』, 소명출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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