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마장 가는 길>의 R과 J: 속물남녀의 윤리학 그들의 케미

by.한선희(부산아시아영화학교 교수) 2019-01-10조회 1,328
경마장가는길

<경마장 가는 길>(장선우)은 개봉 첫날인 1991년 12월 21일 첫 회 단성사에서 관람한 기억이 있는 영화다. 당시 대학가는 이 영화의 원작자 하일지를 포함해 박이문, 장정일 등 일군의 작가들이 발표한 소설로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논쟁이 한창이었다. 지금 한국영화계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주류 상업영화로 만든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시도일 수 있겠으나, 당시 이 영화는 무려 17만 9,000명의 관객을 동원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감독의 지명도, 스타 캐스팅, 에로티시즘 등의 마케팅 포인트가 관객을 유인했다고 볼 수 있으나, 주류 상업영화의 어법과는 전혀 다른 이 작품이 그만큼의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 자체가 의외다. 영화인과 관객 모두 지금보다 한결 진보적인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2019년의 관객 누구라도, <경마장 가는 길>을 돌아본다면 홍상수 감독의 작품을 떠올릴 것이다. 프랑스 유학 시절 동거하던 익명의 주인공 R(문성근)과 J(강수연)가 서울에서 재회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이 영화에는, 사실 거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일이 일어나긴 하지만 그것은 스토리텔링의 관점에서 흔한 선형적인 이야기와는 거리가 멀다. 섹스에 집착하는 지식인 남성 주인공과 그가 욕망하는 대상인 여성의 일상적인 만남과 긴 대화가 반복적이고 순환적으로 제시될 뿐이다. 사건과 이야기보다는 구조와 형식이 두드러지는 이 작품은, 홍상수 감독이 한국영화계에 등장하기 5년 전에 발표된 영화라는 점에서 시대를 앞서가 있다.

그럼에도 <경마장 가는 길>은 보는 이를 몰입하게 만드는 에너지로 충만하다. R과 J라는 보기 드문 캐릭터와, 이를 구현하는 두 배우의 훌륭한 앙상블 연기 덕분이다. R은 대구의 가난한 농촌 가정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유학하며 J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고향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에게 등을 돌리고 J와 자유로운 섹스를 즐겨온 그에게 귀향은 족쇄나 마찬가지다. 영화는 줄곧 그의 욕망이 지속적으로 좌절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J의 몸에 집착하지만 섹스는 마음처럼 되지 않고, 아내와 이혼하기를 원하지만 이 또한 이루어지지 않으며,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했으나 주류 사회에 진입하지 못한다. 한국 사회를 혐오하고 현실을 외면하는 그는 물질적 윤택함과 육체적 만족감을 선사하는 J라는 판타지를 갈망한다. 일말의 수치심도 없는 이 사내는 아내를 모욕하고 J를 무시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능멸하는 행위일 뿐이다. 화려한 수사로 점철된 고전적인 R의 문어체 어법은 그의 뒤틀린 자의식과 대책 없는 자만심을 절묘하게 반영한다. 그 독특한 뉘앙스의 대사는 논리적이지만 윤리와는 거리가 먼 이 한심하고 가련한 인물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하다. 특히 배우 문성근의 정확한 발성과 숙련된 연기는 한국어를 이해하는 관객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한 감흥을 선사한다.

한편 허영 덩어리 J는 R이 대신 써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한국에 돌아와 역시 R이 대신 써준 글을 문학잡지에 투고하며 문학평론가 행세를 하고 있다. 프랑스에서 R의 글을 얻기 위해 자신의 몸을 내주던 그녀는, 한국에서 재회한 R의 섹스 제안을 줄곧 거부한다. 유부남인 R과 관계를 지속할 수 없는 그녀에게는 자신의 감정이 가장 중요하다. 그리고 그 변덕스러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른 남자의 청혼을 수락해 R의 딜레마를 배가한다. J는 R과 섹스를 하고 싶지만 하기 싫은 척한다. 혹은 R과 섹스로 다시 엮이기 싫지만 몸과 마음으로 간절히 원하고 있다. 울고 웃으며 앙탈과 신경질을 부리는 J의 양가적인 캐릭터는 배우 강수연의 예민한 연기를 통해 풍부하게 구현된다. 

<경마장 가는 길>의 R과 J는 거울에 비친 동일한 인물처럼 보인다. 두 인물 모두 욕망과 금기, 사랑과 경멸, 위선과 자가당착의 수렁에 빠진 채 자신의 본능을 따르며 쾌락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인간형이다. 이러한 앙상블 캐릭터는 이후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변주되어 나타나기도 하지만, <경마장 가는 길>은 그와 다른 차원의 사회적 쟁점을 제시한다. 당시 급격히 변화하고 있던 한국 사회 풍경 속에 로컬과 글로벌의 간극, 도시와 농촌의 격차, 사회적 구속과 개인의 자유가 빚어내는 아이러니를 잔인하게 해부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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