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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코어]당신이 기억하는 그 음악의 출발점
    강근식(1946년생)이라는 이름은 잘 알려진 편은 아니다. 그렇지만 절친인 이장희를 비롯해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조동진 등 1970년대 많은 포크 음악에 기타 사운드를 입힌 막후 배후자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일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보다 ‘부라보콘’, ‘바밤바’, ‘해태껌’, ‘조이너스’, ‘짜파게티’, ‘트라이’ 같은 1980년대의 광고음악을 언급하면 많은 이가 무릎을 칠 것이다. 그는 영화음악도 만들었는데, 다작은 아니지만 <별들의 고향>(1974)과 <바보들의 행진>(1975) 등의 일렉트릭한 포크 록 음악은 한국 영화음악사에 누누이 회자될 작품이다.

    최지선(이하 ‘최’): 1970년대 초•중반 이장희 등과 음악 활동을 하다가 영화음악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강근식(이하 ‘강’): 나는 당시 ‘오리엔트프로덕션’(대표 나현구)의 전속 세션맨이었다. 가수 이장희, 이장호 감독, 최인호 소설가가 선후배 관계에 있었고. 그때 나현구 사장이 인기 있는 가수와 감독/영화가 만날 때의 시너지를 노린 것 같다. 외국에선 흔했지만 우리나라에는 별로 없지 않았나.

    최: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처럼 음반 하나를 사운드트랙으로 발표한 것은 거의 처음이다.
    강: 애초에 음반 제작까지 염두에 두었고 나 사장이 적극적이었다. 두 영화음악에서 연주한 유영수(드럼), 이호준(키보드), 조원익(베이스)은 녹음실에서 알게 되었다. 조동진과 그룹을 하며 핑크 플로이드를 흉내 내기도 했고. 당시 조류에 따라 나 사장이 신시사이저를 들여왔고 이호준은 본능적 감각으로 그 악기를 다루었다. 새로운 음악, 새로운 악기, 새로운 영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히트했다고 생각한다.

    최: 편곡은 어떻게 했는가. 밴드에게 악보를 만들어 나눠주었나?
    강: 가요와 달리 영화음악은 내게 책임이 있으니 파트별로 어떻게 움직일지 편곡해서 주었다. 그때는 2트랙 녹음이라 기타 연주를 (한 번 녹음한 다음 그 위에) 여러 번 녹음해 넣었다. 그러다 보면 노이즈는 배가되었다. 요즘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이다.

    최: 영화음악을 작업하는 순서와 절차는 어떠했나?
    강: 시나리오를 받고 작곡을 하는 사이에 어느 정도 러시 필름이 만들어지면 보러 갔다. 하지만 러시 필름을 본 것도 나중이다. 큐시트 같은 것도 없이 어느 장면에 무슨 음악이 필요하다 하면 시나리오 한 권에 펜으로 대강 체크만 해서 진행했다. 그런데 시간이 별로 없어 1~2주 안에 만들어야 했다. 계약은 별도로 없었다. 그냥 구두로 얼마라고 하고, 안 주면 못 받았다. 음악을 항상 마지막에 결정하는데 왜 그렇게 음악이 관심을 못 받았는지….

    최: 음악을 만드는 것 외에 영화음악 작곡가/감독으로서 어떤 역할을 했나?
    강: 연주자나 가수를 섭외하고 녹음실도 예약했다. 복사기가 없을 때인데 사보는 다른 사람에게 안 시키고 내가 다 했다. 어휴, 그러니 밤을 많이 새웠지.

    최: 오리엔트프로덕션이 사용하던 성음스튜디오에서 음악을 녹음해 릴테이프에 담아가서 영화 녹음을 했는데 처음엔 한양스튜디오(대표 이경순), 나중엔 영화진흥공사 녹음실을 이용했다고 들었다.
    강: 한양스튜디오에서 많이 했다. 그때는 효과맨, 성우가 동시에 다 같이 녹음했다. 테이프를 한 30곡 정도 가져갔다. 몇 번 신에 몇 번 음악인지 체크해주고 음악이 안 맞는다고 하면 다른 곡을 맞춰보고. 그러다 밤을 새웠다. 그런데 낮에 시작한다고 해도 녹음하는 건 새벽이었다. 성우가 오면 또 누가 안 와서 기다리고. 상당히 비효율적이었다.

    최: 1970년대 후반부터 광고음악을 하게 되었다.
    강: 처음에 을지로에서 이종명과 ‘알파프로덕션’을 했고, 그다음 ‘강프로(광고음악 회사)’를 충무로 대한극장 앞에서 했다. 처음에는 미8군에서 나온 녹음기를 고쳐 쓰기도 했지만 1985년 충무로에 녹음실을 차릴 때는 8채널 녹음기를 정식으로 구입했다. 이후 방배동에서는 녹음실다운 녹음실을 차렸다. 사실 영화음악은 사이드 프로젝트였다. 20초짜리 광고음악과 제작비가 같으니 영화음악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최: 최인호 감독의 데뷔작 <걷지 말고 뛰어라>(1976)에는 송창식 작곡이 수록되었다. 그 뒤 영화음악 이력에 공백이 있다.
    강: 사실 <별들의 고향(속)>(1978) 의뢰도 들어왔는데 그때 대마초 파동에 진저리가 나서 다른 일은 진짜 하기 싫었다. 그래서 송창식을 추천했다. 최인호 감독 영화의 경우 나는 편곡만 했다. 한참 후에 이경태 감독의 <별들의 고향 3>(1981)을 작업했다.

    최: <별들의 고향 3>에는 직접 부른 노래가 두 곡 있다. 나중에 「한국영화음악기록사」 음반에는 선생의 목소리가 빠진 버전이 수록되었다.(웃음)
    강: 급하니까 누굴 쓸 수도 없고 해서 내가 그냥 해버렸다. 노래한 이야기는 뺐으면 좋겠다.(웃음)

    최: 영화의 내용이나 성향에 따라 음악 스타일도 달라졌을 텐데 <너 또한 별이 되어>(1975) 음악은 핑크 플로이드 같은 아트 록 느낌이 있더라.
    강: 악령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했고 내가 한창 그런 스타일에 빠져 있던 때라 음악은 신나게 했지만 영화는 실패했다. 이장호 감독이 <엑소시스트 The Exorcist>(1973) 같은 걸 만든 것인데…

    최: 김수용 감독의 영화에는 스트링도 사용했고 <하얀 미소>(1980)에는 혼 섹션이 들어간 펑키한 곡도 있다.
    강: 초창기에는 신시사이저를 많이 쓰다가 나중에는 스트링이나 브라스도 많이 썼다. 서울스튜디오에 있던 총무에게 스트링이나 브라스 몇 명을 부탁하면 다 섭외해주었다. 그러다 스튜디오를 가지면서 전자악기, 샘플러를 썼다. <가슴을 펴라>(1986)는 신시사이저로 다 했고 작곡, 연주, 녹음, 믹싱까지 나 혼자 했다.

    최: 이장호, 하길종, 김수용, 이경태 감독 등 감독별로 스타일이 달랐다면?
    강: 대부분 음악은 내게 맡겼다. 김수용 감독도 그랬고. 이경태 감독이 주문은 많이 하셨지만, 영화음악가들을 많이 이해해주셨다.

    최: 수백 편씩 작업하신 분들은 시간 제약 때문에 자신의 음악을 여러 영화에 쓰기도(쓰카이마와시) 했다고 들었다. 한참 많이 만들던 시기의 할리우드 고전영화들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강: 그곳도 그랬나? 우리나라는 그걸 팔기도 했을 정도였다.

    최: 선생의 필모그래피는 1975~76년, 1981년, 1985~86년 이렇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겠다. 그 이후로는 영화음악을 안 했나?
    강: 강남으로 스튜디오를 옮기고 영화음악을 그만두었다. 그때 광고음악 회사(강프로)가 많이 커졌다. 1980년대 중반 가장 큰 변화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뀐 것이다. 수천만 원씩 들인 콘솔의 가치가 몇백만 원으로 확 줄더라. 그 충격은 알파고 이상이다. 누구나 조그만 컴퓨터로 집에서 음악을 만들 수 있게 되니 녹음실 세션맨이 사라지고 많은 녹음실이 문을 닫았다. 나도 커다란 아날로그 기계에서 작은 디지털 기기로 바꾸었다.

    최: 영화음악과 일반 음악 작업의 차이점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강: 영화음악은 장면과의 맞춤이 필요하다. 음악을 들으며 차를 타고 가다가 앞차 깜박이와 내 음악의 박자가 딱 맞을 때의 느낌? 그런 감흥과 비슷하다. 또, 영화에 몰입할 때는 음악이 있는 줄 모르지만 음악이 없어지면 허전하지 않나. 그런 게 영화음악의 특징이고 음악의 위력인데 당시에는 그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다. 어쨌든, 음악이 영화적 리듬과 조화를 이룰 때 느껴지는 매력이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점 아닐까. by.최지선(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