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스포츠와 한국 애니메이션

by.한승태(애니메이션박물관 수석학예연구사) 2010-07-22조회 4,035
(좌)문공부 신고용 <로보트태권V>시나리오 (우)1973년부터 방송되었던 <마루치 아라치>의 원작을 각색하였다.

(좌)문공부 신고용 <로보트태권V>시나리오
(우)1973년부터 방송되었던 <마루치 아라치>의 원작을 각색하였다.

얼마전까지 월드컵 대회로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남아공으로 집중되어 문화공연은 물론 일부업종을 제외한 곳에서 힘들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스포츠를 활용하여 스포츠와 애니메이션을 대단히 성공시킨 사례가 있다. 태권도가 그것인데 우리에게 강렬한 인상과 더불어 태권도의 위상을 높인 데에는 애니메이션과 어린이 라디오연속극의 역할이 매우 컸다. 마찬가지로 <로보트 태권V>와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의 성공과 명성은 태권도에 힘입은 바 크다.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1973년부터 시작된 MBC 라디오의 어린이 연속극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의 인기는 대단한 것이었다. 이는 태권도가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여, 우리나라에서 국제대회가 개최되면서 사회적 붐이 일어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또한 라디오극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와 ‘경기(競技) 태권도’의 인기는 태권도를 소재로 한 동명의 애니메이션 영화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1977>와 <로보트태권V, 1967>의 제작으로도 이어졌다. 

<로보트 태권V> 1탄이 성공을 거두자 당시 기획자였던 김일환은 따로 프로덕션 황금동화를 설립하고, 흥행의 진원지였던 MBC 라디오의 어린이 연속극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를 애니메이션 영화로 기획하여 문화영화업 허가가 있는 삼도필름에 명의를 빌린다. 이는 당시 영화법상 서울동화 -서울동화는 원래 박영일 감독의 프로덕션인데, <로보트 태권V>의 기획도중 갑자기 작고하는 바람에 김청기 감독이 회사를 인수하였다. 당시 서울동화는 CF를 만들던 회사로 영화법에 의해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그래서 유 프로덕션에 이름을 빌려 <태권V>를 제작 개봉한다- 와 마찬가지로 황금동화도 문화영화제작 허가를 받은 제작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애니메이션 역사에서 대명영화 문제는 나중에 별도로 다루겠다. 

어쨌든 실질적인 기획자이며 제작자였던 김일환은 당시 <로보트 태권V>에서 캐릭터를 디자인하고, 애니메이터이며 레이아웃 화가였던 임정규에게 감독을 제의한다. 이렇게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는 임정규의 감독 데뷔작이 되었다. 라디오 연속극의 원안은 김진희가 썼고, 각본을 민병권이 맡았다. 그리고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는 민병권의 각본을 송길한이 각색하였다. 그러나 실제 애니메이션 영화는 임정규 감독이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며 대폭 뜯어 고친다. 원작이 라디오극이다 보니, 작품의 곳곳에 영상적인 장면보다는 설명적인 장면들이 너무 많아 시나리오를 그대로 쓰기에는 무리가 있었다고 한다. 특히 스토리와 캐릭터의 설정에서 많은 부분 수정이 되었다. 1977년 7월 27일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는 당시 세계태권도대회 등 태권도 붐이 일었던 시대적 분위기와 원작 방송의 인기에 힘입어 먼저 개봉한 <로보트태권V-수중특공대>보다 크게 성공한다.

그러나 이런 애니메이션의 성공의 이면에는 1972년 이후 몇 년간 애니메이션 제작이 좌절된 역사가 있다. 1972년 군사정권의 극단적 형태인 소위 유신정부가 들어서면서 애니메이션 영화는 제작이 중단 되었다. 정부는 영화를 강력한 통제 아래 두려는 목적으로 영화법을 대폭 개정해서 발표한 것이다. 1973년 개정된 제 4차 영화법의 기본방향은 (1)유신이념의 구현을 위해서 영화계의 부조리를 제거하고 영화기업을 적극 지원하며, (2)우리 영화의 제작은 양보다 질에 치중하고 전통문화예술을 창조적으로 개발하며, (3)외국영화와 우리 영화 수출입도 민족문화의 우수성과 유신 한국의 해외 선양에 기여할 수 있는 영화를 정선 추천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우수영화 제작 방침도 정했는데, 애국애족의 국민성을 고무 진작하는 내용과 민족예술에 기여할 고유문화의 전승 발전 및 순수 문예물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는 것이다. 1) 이러한 유신이념의 강제적 주입과 검열의 강화는 영화예술을 위축시키는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되었다. 따라서 1970년대 영화의 경향은 사회성 짙은 문제작보다는 사극(史劇)영화나 순수문예물이 주종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1967년 <홍길동> 이후 매년 꾸준히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던 세기상사가 제작사로서 역할을 마치고 극장업에 전념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다 1975년 말 서울동화에는 ‘아동반공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계몽물’로 대본 심의를 받은 <로보트 태권V>를 기획하여 제작(물론 그 전부터 기획이 되어 제작되고 있었기에 제작을 덮을 수는 없었다)하고 유 프로덕션의 명의를 빌어 개봉한다. 이는 1972년 이후 처음으로 극장에서 개봉한 애니메이션 영화가 되었다. 이 작품은 오히려 억압적인 유신정권의 영화정책을 이용하여, 아동들에게 반공사상을 고취시킨다는 명목으로 공상과학물을 제작하였다. 그래서 내용도 막연하게나마 붉은 제국으로 상징되는 로봇 군단이 등장하고 태권도를 수련하는 훈이는 아버지가 개발한 ‘로보트태권V’로 이들을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1976년 7월 17일자 일간스포츠에 의하면, SF영화의 붐에 맞춰 유현목 감독이 제작한 장편 공상과학만화영화라고 소개된 것으로 보아 당대에 SF영화가 붐을 맞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TV를 통해 소개되어 인기를 얻었던 <마징가Z>의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결과로 보인다. 제작자의 입장에서는 세계적으로 공상과학물이 붐을 일으키고, 더불어 태권도의 인기가 높던 시절이었기에 흥행에는 자신이 있었던 듯하다. 또한 작의를 보면 미래를 지향하는 어린이들에게 과학적 호기심과 건전한 모험심을 고취하고 평화수호의 강한 의지와 인간 존엄성을 심어주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것으로서 영화법의 검열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당시는 아무리 황당무계하더라도 반공이라는 말만 내세우면 심의에는 문제가 없었다. 이후 애니메이션의 제작은 <태권V>가 그랬듯 반공을 명목으로 내세우거나, 우리 고유의 문화를 알린다는 취지 아래 태권도를 소재로 하거나, 해외 수출을 한다는 명목을 이용, 영화법의 검열을 피해 제작되었다. 

하지만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의 제작은 반공이라는 명목보다는 당시 일고 있던 태권도의 열풍 때문이었다. 1970년대는 우리 것에 대한 긍지와 주체성을 살리자는 의식이 높았던 시기로 민족문화를 재인식하고 재발견하여 보존하자는 정부정책의 하나로 태권도를 알리는데 노력하던 시기였다. 2) 이런 노력으로 해외에서 태권도 연맹과 협회가 설립되었다. 이어 이들을 초청하는 태권도 국제대회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면서국민들에게 우리 민족의 우수함을 알리는 큰 계기가 되었다. 

태권도는 세계 속에 대한민국의 국위를 선양하며 국민적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자랑거리가 별로 없던 시절 이러한 자부심은 애니메이션 영화 속에서도 드러나 당시 선진 외국에 주눅 들었던 어린이들에게 대리만족을 느끼게 해주었다. 3) 실제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나 <로보트 태권V>의 작품 속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의 태권 소년 ‘마루치’와 ‘훈이’는 외국의 선수들을 물리치고 경기(競技) 태권도의 영웅으로 그려진다. 이는 TV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통해 유행하던 로봇물과 결합하여 여러 작품을 내놓게도 했다. 그리고 이것은 이후 제작되는 애니메이션의 프로타고니스트들이 대부분 태권도 유단자로 설정되게 하는 전범이 되었다.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의 소재는 우리의 무술인 태권도에서 가져왔다. 그리하여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우리 한국인의 긍지와 우수성을 자랑삼게 하고 나라사랑의 길을 걷게 하고자 하는’ 것이 작품의 의도였으며, 작품의 형식과 내용은 ‘공상과학적인 만화극으로 표현코자 한다’는 시나리오상의 작의를 살펴보아도 이러한 의도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러면서 ‘도장이 아닌 골목이나 뜰에서도 태권도를 즐기는 청소년들의 대련 놀이를 흔히 볼 수 있는데, 태권도를 함으로써 예의와 의협심을 바탕으로 한 인격을 완성하고, 기법의 수련으로서 자신은 물론 사회와 국가를 불의로부터 보호하며, 체력의 단련으로 국력의 배양과 협동심을 기를 수 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당시 사회적으로 자부심이 고조되던 태권도의 정치적 위상을 실감케 한다. 이렇듯 ‘심신의 퇴보와 약화를 극복하는 수단의 하나로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태권도’라는 무술을 통해 심신을 단련시키겠다는 의지와 ‘공상 과학극이나 소설을 탐닉하는 청소년들에게는 더욱 더 태권도 정신이 필요하다’는 강변을 통해서는 제 4차 영화법을 옮겨 놓은 듯한 1970년대의 시대적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이렇게 우리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그 명맥을 이어왔다. 물론 거기에는 당시 사회적 함의와 정치적 함의가 결합되어 최고의 문화상품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 애니메이션의 기획은 이런 사회적 함의와 트렌드를 읽는 작업도 매우 중요하다고 보인다. 

최근 언론을 통해 새롭게 기획하는 실사판 <태권V>의 스토리의 탈고를 끝냈다는 소식과 새로운 컨셉 그림이 소개되었다. 새로 제작되는 태권브이의 탄생 스토리세계의 배경은 무엇일까? 옛 태권브이는 물질문명의 발전에 따른 두려움이었고, 이를 단련한 신체와 정신력으로 통제한다는 당위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세기의 태권브이의 이데올로기는 무엇일까? 단순히 옛날 향수에 의해 탄생하는 건 아니어야 할 것이다. 

스토리 원작인 웹툰 만화 <브이>의 내용을 보면 훈이가 실직한 가장으로 설정되고 철이는 불구의 몸으로 태권브이를 몰래 만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럼 왜 태권브이가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일까? 아버지의 귀환인가? 웹툰 <브이>에서 영희의 마지막 말은 ‘기다려라, 믿어보자, 아버지가 원래 그런 사람이야.’이었다. 이는 곧 우리시대 아버지가 그런 사람이야, 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럼 태권브이는 아버지의 귀환에 다름 아니다. 

당대에는 못 먹고 못사는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에게 태권도를 배우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고, 외세에 주눅 들어 있던 아이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었던 것이 태권도와 태권브이였다. 그렇다면 이제 태권브이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이러한 시대적 요청이나 배경이 없다면 그냥 묻혀버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당대의 요청이 아버지를 믿어 보자이거나 아버지의 희생을 기억하자라는 것이라면 이건 그냥 추억물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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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영일 저, <한국영화史Ⅱ>, 『한국연극 · 무용 · 영화사』, 대한국민 예술원, 1985, pp. 779∼780 

2) 1966년 3월 22일 태권도 협회가 구성된 9개국의 협회를 규합해 국제 태권도 연맹(ITF) 결성, 1967년 11월 30일 제정 품세를 심의 공포, 1972년 11월 30일 국기원을 건립, 12월 1일 태권도교본(품세편)을 발간, 1973년 5월 25일 서울에서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 1973년 5월 28일 세계태권도연맹(The World Taekwondo Federation:WTF)을 창립, 1974년 10월 18일 제1회 아시아태권도선수권대회를 개최, 1975년 10월 5일 국제경기연맹(International Sports Federation:ISF)에 WTF가 가맹, 1976년 4월 9일 국제군인선수권대회에서 태권도를 정식종목으로 채택, 1978년 10월 5일 KTA(Korea Taekwondo Association) 중심으로 단일화. (두산동아백과사전 태권도의 역사에서 국기로서의 태권도를 참고로 정리하였음)

3) 이는 1950년대 역도산(김신락)이 프로레슬링으로 전후 일본에 선사한 자부심과 비슷하다. 역도산은 강인한 체력과 가라데촙으로 1958년 세계선수권자인 J.S.루테스를 물리치고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된다. 당시 미국에 대해 주눅 들어 있던 일본 국민들에게 승리감과 더불어 자부심을 갖게 하였고, 이로 인해 그는 일본국민의 영웅으로 탄생한다. 또한 프로레슬링이 전국적인 붐을 맞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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