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 같은 사나이 A Man Like the Wind 임권택, 1968

by.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2015-07-16조회 10,031
바람 같은 사나이 스틸 이미지

한밤중에 빨치산들이 마을에 내려와 사람들을 모아놓은 다음 식량을 내놓으라고 위협한다. 아마도 한국전쟁 중일 것이다. 가난한 이 마을에서는 보릿고개라 자신들이 먹을 식량조차 변변치 않은 지경이다. 그러자 마을 사람 중의 한 명을 사살한 다음 다시 돌아올 때까지 쌀 다섯 가마를 구하라고 말하고 떠난다. 마침 이곳을 지나가던 국군 토벌대 장교가 있었지만 이 마을까지 부대가 오려면 시간이 걸릴 거라고 알려준다. 실망한 마을 사람들에게 목사님이 나서서 읍내에 나가 우리를 보호해 줄 사람을 구해오겠노라고 약속한다. 그리고 읍내에 가서 여섯 명의 건달을 이끌고 있는 길용이라는 사내를 만난다. 

잠깐, 이 이야기는 어디선가 많이 본 이야기가 아닌가요? 당신의 추측이 맞다.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이 도적들에게 약탈당하는 마을을 구하기 위해 적은 보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함께 뭉쳐서 싸우는 시대활극 <7인의 사무라이>가 <바람 같은 사나이>의 원판이다. 하지만 임권택이 참조한 영화는 <7인의 사무라이>가 아니라 존 스타제스의 <황야의 7인>이다. 율 브린너, 스티브 맥퀸, 제임스 코번, 찰스 브론슨, 홀스트 부크홀츠, 브래드 덱스터, 로버트 본이 일곱 명의 카우보이로 나온 그 영화. 역시 악당에는 일라이 워락. 임권택에 대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 중의 하나는 그가 몇 차례이고 할리우드영화들을 리메이크했다는 사실이다. 좀 더 가혹하게 말하면 표절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하지만 그때 한국은 아직 국제 저작권 협회에 가입하지 않았고, 한국영화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비틀즈의 노래가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물론 그때 임권택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이만희는 <석양의 무법자>를 본 다음 <쇠사슬을 끊어라>를 찍었다. (그리고 다시 이 영화를 원본으로 하여 김지운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만들었다) 내가 환기하고 싶은 사실은 임권택이 할리우드 영화와 가졌던 친화성에 대해서 거의 이야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할리우드 영화와 한국 영화 사이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이라거나 혹은 그 둘 사이의 간극의 심연 사이에서 인정투쟁을 위한 필사의 도약 따위는 없다. 오히려 그때의 한국영화에서 할리우드영화는 하나의 운명 같은 것이어서 그 안에 머무는 것에 대한 도착적 친화성에의 자발적 항복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1945년 해방, 친일 문학가들이 그렇게 빨리 해방이 될 줄 몰랐다고 탄식을 했을 만큼 절대적인 일본 제국주의의 머리에 원자폭탄을 떨어트리고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나라. 1950년 전쟁 속에서 ‘소비에트와 중공’ 사회주의 군대와 싸운 다음 나라를 절반으로 만든 나라. 상상할 수 없는 풍요로움의 왕국.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오는 군수품과 문화들. 거기서 싹튼 대학가 포크 송과 이태원 로큰롤. 우리는 이 영향 관계 아래 21세기에도 그렇게 머물고 있다. 그런데 그때는 휴전을 하고 고작 10년이 조금 더 지난 다음이었다. 충무로에서 영화를 만드는 것과 그들이 보는 할리우드영화 사이의 괴리감. “영화를 처음 만들 때는 누구나 목표를 갖게 되잖아요. 그때는 볼만한 영화라는 게 할리우드 영화밖에 없었어요. 그러니 다들 그때 본 영화들이 자기의 목표가 된 거예요. 그러다가 점점 그게 얼마나 허망한 목표인 줄 깨달아가면서 자기의 영화를 찾기 시작한 거지요” (「임권택, 임권택을 말하다」) 나는 사태를 단순하게 식민지 문화라고 규정짓고 싶지 않다. 반대로 여기에는 근대라는 모던한 꿈이 역사라는 악몽과 서로 간섭하면서 그 한계를 초월하기는커녕 그 안에 주저앉아 격렬하게 자신의 실존을 증명해가는 과정이 있다. 이 말의 방점. 그 안에 주저앉기. 말하자면 끊임없는 연습. 그 안에서 영화는 주어진 경험세계로부터 자신의 이념 세계에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 삶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고 싶다.
 
<7인의 사무라이>(1954) <황야의 7인>(1960) <바람 같은 사나이>(1968) 포스터
<7인의 사무라이>(1954) <황야의 7인>(1960) <바람 같은 사나이>(1968)
 
임권택의 세 번째 영화 <남자는 안 팔려>는 빌리 와일더의 <뜨거운 것이 좋아>이고, 여기서 구봉서이대엽이 토니 커티스와 잭 레몬이 했던 여장을 하고 나온(다고 한)다. <30년 만의 대결>은 존 포드의 <아일랜드의 연풍The Quiet Man>을 다시 만들었다. 모린 오하라에는 김지미가 마돈나로 나오고 최무룡이 존 웨인으로 박노식이 빅터 맥라글랜으로 나와 긴 주먹 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바람 같은 사나이>가 <황야의 7인>을 리메이크한 사실은 잘 안 알려졌다. 심지어 개봉 당시에도 그런 소개가 없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아마도 틀림없이 임권택이 1968년 <바람 같은 사나이>를 만들었을 때는 아직 <7인의 사무라이>를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는 일본영화가 수입금지 되었으며 극장상영이(나 텔레비전 방영이) 아니면 달리 영화를 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았다 하더라도 우리들이 오늘날 볼 수 있는 200분 판본의 <7인의 사무라이>가 아니라 다시 160분으로 편집된 극장 개봉 판이었을 것이다. 도날드 리치에 의하면(「The Films of Kurosawa Akira」) <7인의 사무라이>는 개봉했던 1954년 4월 26일 일본에서도 도쿄를 비롯한 대도시에서만 잠시 상영하고 사라졌다. 그런 다음 두 번 세 번에 걸쳐 재편집되었고 미국에서는 이 160분 판본을 수입한 RKO 사에서 다시 편집했다고 한다. 이런 미국식 편집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도 <설국열차>를 미국에 개봉하면서 하비 와인스타인이 편집한 사례를 알고 있다. <7인의 사무라이>는 1991년에야 190분 버전으로 복원되었고 2002년에 개봉 버전에 가까운 203분으로 복원되었다. 아마도 <7인의 사무라이>를 서부극으로 각색한 존 스타제스는 RKO 편집본을 보았을 것이다. <황야의 7인>은 일본에 개봉해서 일본 영화평론의 웨스턴 ‘狂人’이라는 마스부치 겐(增淵健)으로부터 “충분히 납득할만한 구로사와 원작의 환골탈태”라고 인정을 받았다. 하지만 구로사와 아키라는 <황야의 7인>을 본 다음 “완전히 실망스럽다”고 그냥 간단하게 대답했다. 1960년에 만들어진 이 서부극은 재빨리 수입되어 서울에서 1962년 크리스마스 프로그램으로 피카디리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그해 임권택은 그해 구정에 <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하였고 7월에 두 번째 영화 <전쟁과 노인>을 만들었다. 아마 그런 다음 <황야의 7인>을 극장에서 보았을 것이다.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은 서부극 영화들에 대해서 모든 장르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호의적이라는 사실을 셈에 포함시켜 주기 바란다. 

하지만 <바람 같은 사나이>는 사무라이 활극도 아니고 서부극은 더더구나 아니다. 이 영화는 전쟁영화이자 다찌마와리 액션활극이고 반공영화이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바람 같은 사나이>는 1968년의 영화이다. 길용은 오래전 동백마을에서 쫓겨난 사내였다. 그런 다음 그는 떠돌이 약장사와 바람잡이 이인조, 공기총 명사수, 소매치기 이인조를 이끌고 장터마다 돌아다니면서 가짜 약을 팔고 내기 판돈을 따고 길거리에서 주머니를 터는 패거리를 이끄는 두목이다. 말하자면 칠 인의 건달들. 그들은 갈 곳 없는 자신들에게 길용이 “우리들의 마음의 고향”이라고 부른다. 길용은 가난 끝에 사랑하던 영희가 이웃 마을 돈 많은 집에 시집을 가자 분을 참지 못하고 혼례식장에서 소동을 부리고 아버지로부터 다시는 고향에 발도 들여놓지 말라는 말을 듣고 쫓겨난 처지였다. 길용을 찾아온 고향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게다가 공비들에게 아버지가 총살을 당하고 지금은 어린 여동생 옥이 혼자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다음, 아직도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영희가 있는 고향에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는 떠나기 전에 모은 돈을 패거리 동생들에게 모두 나눠주지만 그들은 형님이 고향이라면서 함께 마을을 지키기로 뜻을 모은다. 나는 무리하게 <바람 같은 사나이>의 서사를 <7인의 사무라이>로부터 가까이서 연상하거나 <황야의 7인>과 비교하지 않을 생각이다. 왜냐하면 이 세 편은 서로 정교하게 영향을 주고받았다기보다는 마치 그저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남아있는 감흥을 가지고서 자기의 편에서 시나리오를 쓴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세 편의 영화는 비교하기에 너무 예술적 차이가 벌어진다. <7인의 사무라이>는 단지 걸작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할 정도로 위대한 영화이다. 도날드 리치는 일본영화란 <7인의 사무라이>라고 말했다. 완전하게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 견해를 충분히 존중할 수 있다. <황야의 7인>이 걸작은 아니지만 웨스턴 장르 안에서 컬트의 지위를 차지한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바람 같은 사나이>는 한국영화사 안에서조차 거의 기억되지 않을 만큼 실패했다. 단지 발견되지 못했다기보다는 대부분 엉성하게 구성되었으며 이 시기 한국영화의 약점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같은 해에 임권택이 만든 세 편의 영화 중에는 <요화 장희빈>이 훨씬 우아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이것만은 말하고 싶다. 임권택은 어떤 감흥을 찍고 있다. 이것만은 분명하다. 그게 대부분 단조롭게 나타나고 있고 종종 아직은 두텁게 장면을 뒤덮고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태백산맥>을 본 다음 다시 <바람 같은 사나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거기서 겹쳐져 있는 동일한 두 개의 장면들 사이에서 오히려 이쪽이 더 선명한 기억의 흔적들을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다. 임권택은 그 스스로 돌아보기도 싫은 기억이라고 고향에서의 빨치산과 국군 사이의 상호상잔(相互相殘)의 밤과 낮을 언급하면서도 처음부터 이 시간에로 마치 하나의 원장면처럼 되돌아오고 다시 돌아왔다. 이건 임권택의 영화를 차례대로 보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저렇게, 여기서 저기서, 이번에도 또 이번에도, 그 시간을 그게 견딜만해 질 때까지 건드려보는 것만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이걸 임권택의 원장면에 대한 탐구라는 하나의 (트라우마라기보다는 멜랑콜리에 가까운) 개념으로 만들고 싶을 정도이다. 기억 속의 기호의 난독증. 그걸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산산조각 난 광경. 상상 속에서조차 겁먹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그러진 이미지. 하지만 그걸 읽을 수 있을 때까지 그 장면의 공포와 다시 마주쳐야만 한다. 나는 지금 따분하게 한 사람의 전기를 재구성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는 영화와 삶이 분리될 수 없는 텍스트의 서명을 써 놓는, 놓을 수밖에 없는, 그렇게 반복할 수밖에 없는 방법의 실존에 대해서 질문하려는 것이다. 
 
바람 같은 사나이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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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내려오는 사람들
 
영화의 첫 장면. 공비들이 한밤중에 산에서 내려와 마을 사람들을 집합시킨다. 이때 임권택은 이 장면을 마치 귀신들이 무리 지어 찾아오는 공포영화처럼 찍었다. 밤에 찾아오는 사람들. 왜 그들은 낮에 찾아오지 못하는 것일까. 그들은 보이지 않는 이웃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바깥에 있는 존재들. 하지만 영토의 안에 있는 사람들. 어쩌면 거기 아버지 어머니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은, 아직은 그걸 고백할 때가 아니다. 너무 많은 고향 사람들이 죽었고 유족들이 고향에 살아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인정하면 안 된다. 이상할 정도로 임권택은 첫 장면을 밤에 시작하는 영화들이 많다는 것을 환기해주기 바란다. 아니, 차라리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임권택의 첫 번째 영화 <두만강아 잘 있거라>는 밤에 시작한다. 게다가 <바람 같은 사나이>는 (같은 말의 반복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밤 장면이 오래도록 계속되는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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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길을 걸어 마을에 들어오는 두 남자
 
누군가 밤을 낮으로 만들어야 한다. 혹은 밤을 끝내야 한다. 여기 두 개의 선택이 있다. 두 명의 남자가 똑같은 길을 따라 마을을 찾아오는 장면을 유심히 보아주기 바란다. 하지만 두 남자는 동시에 도착하지 않고 서로 시차를 두고 마을을 찾아온다. 먼저 찾아온 남자는 국방군 장교지만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국방군이 이 마을까지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실망스러운 소식을 전한다. 국가의 보호로부터 버림받은 지역. 일종의 무법지대. 차라리 두 개의 이데올로기 사이의 전선. 그런 다음 이 장교는 마을에 머문다. 하지만 그가 마을에서 특별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렇다고 마을 사람 중의 누군가와 교분을 맺지도 않는다. 그는 언젠가 도착할 국방군을 위한 신호이다. 국가의 가느다란 끈의 마지막 끝. 여기서 첫 번째 남자에 의해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었다는 점을 놓치면 안 된다. 가정을 해보자. 국방군 장교가 절대적으로 수는 부족하지만 여섯 명의 소대원을 끌고 마을에 찾아온 다음 본대가 도착할 때까지 공비들과 싸우면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하지만 임권택은 이 남자를 선택하지 않았다. 두 번째 찾아오는 남자는 원래 이 마을에서 자라났지만 고향에서 쫓겨난 다음 다시 돌아온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위해서 쌀 다섯 가마를 준비했을 뿐만 아니라 마을을 함께 지킬 여섯 명의 건달들과 함께 온다. 반대로 이야기는 장르 안에서 흥미롭게 작동하지만 그런 희생적인 전투가 한국전쟁 중에 정말 있었을 것이라고는 거의 믿기 어렵다. 임권택은 왜 역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을 버려두고 있을 수 없는 것을 가정하는 것일까. 여기서 두 남자는 거의 공통점이 없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둘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첫 번째 남자에게 동백마을은 자신이 지켜야 할 국토 전체 중의 하나의 작은, 아주 작은 지역에 불과하지만 두 번째 남자에게 이 마을은 자신의 고향이자 유일하게 돌아오기를 갈망한 곳이라는 지정학적 서열이다. 좀 더 단순하게 설명할 수 있다. 한 사람에게 여기는 전체 중의 작은 일부이지만 다른 한 사람에게는 전부이다. 그래서 한쪽은 언제든지 전술상의 이유로 이 지역을 양보할 수 있지만 다른 한 쪽은 여기를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두 사람은 신기하게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 어떤 갈등도 빚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동일한 목표가 있고 그 목표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올바른 교정이 될 것이다. 그 둘은 둘이 합쳐 하나가 된다. 

하지만 이따금 이 영화는 어떤 불투명성 때문에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을 때가 있다. 수많은 예 중의 하나. 두 번째 남자와 고향 사이에서 매개하는 역할을 목사가 나서서 떠안을 때 <바람 같은 사나이>는 잘 설명되지 않는다. 동백마을은 아주 작은 마을이고 마을 주민들은 단 한 명도 결정적인 순간에 찬송가를 부르지 않으며 이 영화에는 예배를 드리는 장면이 단 한 쇼트도 없다. 게다가 길용은 고향에 돌아와서 교회를 찾아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혹은 길용은 하느님을 믿은 적이 없다. 그렇다고 길용의 애인이 그런 것도 아니다. 또는 목사가 이야기에서 어떤 결정적인 해결의 역할을 하는 순간도 없다. 구태여 교회가 필요하다면 여섯 명의 건달 중 막내가 목사가 되겠다는 결심에 응답할 때뿐이다. 하지만 가장 난처한 순간은 목사가 읍내에 가서 길용을 설득하여 고향으로 데려올 때이다. 나는 여기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안타깝지만 이 장면에서 지금 <바람 같은 사나이>는 사운드 네가가 유실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정말 이상하게도, <바람 같은 사나이>는 보고 나면 다시 보고 싶게 만든다. 다시 본다는 것은 그 순간에 다시 가고 싶다는 뜻이다. 거기서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모든 실패조차 지나쳐가면서 어느 순간 과잉 하는 힘으로 지나간 시간을 무한정 반복하게 싶게 만드는 이것임. 설명할 수 없는 이것임. 여기서 순환은 일시적으로 중단될 것이다. 반대로 여기서부터 시작하는 새로운 질서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엔 종합에의 실패가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그 실패가 우리를 이것에로 최대한 접근 시킨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장면은 괴이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실패의 질서가 있다. 당연하게도, 이미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그리고 존 스타제스의 웨스턴에서 본 것처럼, 물론 마지막 장면은 이 일곱 명의 사내들(과 국방군 장교와 엉겁결에 끼어든 리어카꾼)과 빨치산의 전투 시퀀스이다. 무엇보다도 이 전투는 아무 의미가 없다. 무엇이 문제인지 마치 눈앞에서 금방 벌어질 전쟁처럼 하나씩 물어보자. 마을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갔고, 그러므로 이 마을에는 초가집들 말고는 달리 지킬 것이 없다. 곡물도 없고 재산이랄 것도 없는 가난한 시골 마을이다. 게다가 빨치산에서 탈출한 여인은 이제 곧 북한으로 귀대하게 될 연대가 이 부대와 합류할 것이라는 정보를 준 다음 죽는다. 그 정보를 듣고도 철수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마치 이들은 마지막 시퀀스를 위해서, 오로지 영화를 위해서, 여기 남아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들은 남겨진 숫자뿐만 아니라 무기도 열세이다. 누가 보아도 차라리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면서 읍내로 철수하고 그런 다음 군부대와 합류하여 이들과 싸우기 위해 돌아오는 편이 유리하다는 것은 당연한 결정이다. 그런데도 납득할 수 있는 어떤 이유도 제시하지 않은 채 그냥 남아서 마을을 습격하기 위해 찾아올 빨치산을 기다리고 있다. 죽음을 기다리는 것만 같은 자멸적인 태도. 당신들이 주인공이 아니라면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그건 빨치산 쪽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전쟁은 패색이 짙고 (아마도) 남부군이 북한으로 이동하면서 도착하기를 기다려 합류하는 편이 훨씬 합리적인 결정일 것이다. 여기서 전투를 하면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으며 설혹 승리한다 할지라도 이득이 없다. 오히려 후퇴할 시간만을 뺏길 것이며 게다가 이 전투는 그들의 흔적을 남길 뿐만 아니라 탄약조차 낭비하게 되어 이후 벌어질 수도 있는 국방군과의 전투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놓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자신들에게 쌀 다섯 가마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동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면서 빨치산 부대 전원을 이끌고 마을로 향한다. 마치 이들의 결정은 자신들이 후퇴하기 전에 국방군이 도착하여 자신들을 섬멸해주기를 기다리는 것만 같은 전술이다. 나는 약간 냉소적으로 열거하였다. 하지만 여기에는 서로 맞선 두 개의 그룹 모두에게 공통된 정서가 있다는 사실조차 지나치면 안 된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이 완전히 전멸하기를 기대하는 중이다.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아이러니. 이 무시무시한 공포의 전율을 쥐어짜는 것만 같은 감흥. 

누구라도 조롱하듯이 지켜보게 될 이 상황에서 크게 웃으면서 가장 잔인하게 쳐다볼 사람은 임권택이다. 이것이 이 장면을 모골이 송연하게 만드는 부정의 논리이다. 이 마지막 시퀀스에서 양쪽 모두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제로에 근접한다. 일곱 명의 사내가 이 마을을 지킨다고 하지만 차라리 전원이 무사히 철수한 다음 마을 사람들과 되돌아와서 함께 재건하는 편이 훨씬 건설적일 것이다. 빨치산은 이 마을을 포기하고 빨리 본대에 합류하여 철수하는 편이 훨씬 전술적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 마을은 양쪽 모두에게 생명을 내걸고 전선을 만들 만한 가치가 거의 없다. 여기에는 실제적으로도 그렇고 정신적으로도 보물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 모두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동백마을을 포기하는 것이다. 마치 이 동백마을이 그들 모두에게 어떤 물신숭배처럼 보일 정도이다. 어떤 물신? 고향이라는 물신. 한국에서 고향은 매우 까다로운 문화 담론의 계보를 지니고 있다. 나는 그걸 충분히 지적할만한 자리에 있지 않다. 그러므로 다소 일반론적인 방식으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약간 따분한 표현이긴 하지만 고향은 그들 모두에게 큰 타자 안에 머물기 위한 수수께끼처럼 다가온다. 그 안에서 머물기. 하지만 그들이 거기 머물려고 노력할수록 그들은 자신이 그 안의 결여된 원인이자 대상이라는 것을 확인할 뿐이다. 좀 더 무자비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들은 어느 쪽이건 고향의 실수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말소될 때에만 고향은 다시 말끔해질 것이다. <바람 같은 사나이>의 이야기는 말소에 관한 이야기이다. 
 
어쩌면 당신은 도식적이라고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런 당신에게 <바람 같은 사나이>가 이야기 위에 두텁게 덧칠해서 지워버린 결정적인 정보가 역사라는 것을 일깨우고 싶다. 고향을 사이에 두고 <바람 같은 사나이>는 의도적으로 불균형하게 배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둘 사이를 조정하기 위해 거기 있어야 할 것이 강제적으로 지워진 것을 보충할 필요를 느낀다. 길용이 고향을 떠난 이야기는 그가 돌아온 다음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후회를 하며 짧게 회상하는 장면으로 불려 나온다. (flash_back) 그러나 빨치산들은 그냥 처음부터 저 산속에 있다. 그런데 그들은 왜 다른 마을이 아니라 여기에 머물고 있는 것일까. 한국전쟁은 장르가 아니다. 그들은 아무 곳에나 머물지 않았다. 그걸 임권택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해방 이후 고향에서 사회주의자가 되었고 그런 다음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산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어제까지 고향 사람들이었다. 그런 다음 고향을 관리하듯이 밤만 되면 내려왔다. 그러므로 필요 이상으로 비열하게 그려진 이 마을 빨치산의 지도자도 이 마을에서,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인근 마을에서, 그렇게 전쟁이 나고 이데올로기에 의해 양쪽 편을 가르고 난 다음 산에 들어왔을 것이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마을을 놓고 거기 머물기 위해 다투는 중이다. 1968년은 이데올로기를 거세하였고 영화에서 남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희생에 가까운 전멸의 전술이다. 한쪽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숫자의 상대와 전투를 치르기로 결심하고, 다른 한쪽은 여기서 지체하는 만큼 그들을 섬멸하기 위해 국방군이 가까이 다가올 것을 알면서도 작전을 개시한다. 여기에는 미학적 긴장감도 없고 그렇다고 극적인 흥미가 우리의 감정을 고조시키지도 않는다. 그저 죽음에 대한 거의 외설적 묘사라고나 할까.
 
바람 같은 사나이 스틸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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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같은 사나이 스틸 이미지
전투의 첫 접촉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빨치산 대장은 텅 비어있는 마을을 향해서 기관총을 쏘아댄다. 그때마다 약장사는 총알을 피해서 여기저기 자리를 옮기며 바이올린을 연주한다. 소매치기도 하모니카를 불면서 총구를 유인한다. 말하자면 전투의 첫 접촉. 여기서 임권택이 일곱 명의 건달들의 각자의 전문적인 기술을 전투의 드라마 안에서 활용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바이올린 연주나 소매치기 기술은 정작 전투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명사수가 ‘귀신도 놀랄만한’ 솜씨를 보여주는 장면도 없다. 이 영화는 하워드 혹스적인 영화가 아니다. <바람 같은 사나이>는 <리오 브라보>가 아니다. 기관총을 쏘아대던 빨치산 대장이 돌격, 을 외치자 부대원들은 일제히 산을 타고 마을을 향하기 시작한다. 이때 정말 괴이하게도 그들이 논두렁을 밟고 달려가는 장면에서 이제 막 봄날이 시작되어 파릇하게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논밭의 풍경이 이상할 정도로 아름답다. 나는 처음에 내가 무얼 잘못 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시 보면서 탄식하게 되는 것은 텅 빈 농촌 마을 그저 전쟁만 아니라면 한가로운 이 봄날의 장면이 찍고 싶어서 전투장면을 한정 없이 길게 늘여놓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그 공기의 느낌이다. 이 시퀀스는 정말 길다. 종종 누가 누구를 쏘는지도 잊을 정도로 한없이 이어진다. 한 명씩 한 명씩 죽어가지만 이 시퀀스에는 애도의 감상이 없다. 마치 그들은 장르의 법칙에 따라 소멸하듯이 그렇게 차례로 자기의 역할이 끝나자 죽어간다. 반공영화가 마치 다찌마와리 장르가 끝나가듯이 그렇게 종말을 맞이하는 중이다. 이때 임권택은 어느 쪽의 승리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음이 명백하다. 빨치산 공비들은 총알에 자신을 내맡기듯 그렇게 아무런 방어도 하지 않은 채 어떤 엄폐물도 없는 논두렁을 가로질러 끝도 없이 달려온다. 일곱 명의 건달은 방아쇠를 당기고 또 당긴다. 절망적인 사격. 왜냐하면 총은 겨우 아홉 자루이고 한없이 밀려오는 공비들은 곧 마을에 도착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백병전을 벌여야 할 것이고 이 수많은 공비들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혀 없다. 영화가 무심코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 것만 같다. 모두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텅 빈 마을. 그 마을의 잉여. 이 전투는 동백마을에 아무 쓸모도 없는 낭비일 뿐이다. 만일 그것이 필요하다면 그 잉여를 말소하기 위해서 지금 그걸 하는 중이다. 그걸 알지 못하는 그들은 스스로 그렇게 삭제되는 중이다. 나는 이미 <두만강아 잘 있거라>를 보자마자 깜짝 놀란 마음을 안고 임권택의 첫 영화에서부터 시작된 다음 몇 번이고 다시 반복될 전멸의 테마를 이야기했다. <바람 같은 사나이>는 그걸 다시 한 번 반복하는 영화이다. 하지만 이 시퀀스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장면은 국방군이 나타날 때이다. 그들은 일곱 명의 건달이 대부분 죽어갔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그런 다음 빨치산 공비들을 향해서 어떤 항복의 권유도 없이 일제히 사격을 시작한다. 어떤 포로도 필요 없다는 듯한 이 무정함은 마치 청소를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마지막 표현을 주의 깊게 읽어주기 바란다. 청소. 국가에서 청소를 하는 것. 빨치산. 그리고 일곱 명의 건달. 

하지만 임권택은 여기서 알리바이를 내세우는 것처럼 서둘러 장황한 에필로그를 준비한다. 일곱 명의 건달 중의 막내는 공비였지만 몇 달 전에 자수를 해서 이 패거리를 따라다니고 있었고, 그는 마침 동백마을의 빨치산 공비들과 함께 산에 오른 사회주의자 인텔리 애인의 죽음을 목도한 다음 이 전투에 참여한다. 하지만 총을 맞았는데도 목사가 건네준 성경 덕분에 목숨을 건지고 나서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마을 사람들이 돌아오고 이제 길용의 애인이 마지막 질문을 한다. “대답을 듣고 싶어요” 그녀는 전투가 시작되기 전 마을 사람들과 함께 피난을 가면서 길용에게 같은 질문을 했었다. “대답해주세요, 절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그때 길용은 모호하게 대답을 회피했다. “그만 가줘, 다음에 만나면 그때 대답을 하기로 하지” 그녀는 그 말을 듣고 이렇게 덧붙였다. “노력해주세요. 불행한 일이 없도록.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요” 이번에는 화면 안으로 교회 종소리가 들려온다. (off_sound_in_frame) 길용은 간단하게 대답한다. “영, 교회로 가지 않겠소. 하느님과 목사님이 계신 곳에서 부탁할 일이 있소” 그녀도 흔쾌히 대답한다. “좋아요” 그리고 끝. 이때 여기에는 죽은 여섯 명의 건달들과 동백마을까지 쌀 다섯 가마를 리어카에 싣고 왔다가 뜬금없이 전투에 참여하여 죽은 사내를 위한 어떤 애도의 시간도 없다. 마치 그들은 처음부터 있어야 할 자리가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영화에서 말끔하게 사라진다.
 
7인의 사무라이 스틸

황야의 7인 스틸
“우리는 또 다시 진 걸세.”, <7인의 사무라이>(위), <황야의 7인>(아래)
 
나는 이 엔딩에 대해서 약간 더 논쟁을 하고 싶다. <7인의 사무라이>는 몹시 긴 시간 동안 도적 떼들에 맞서 일곱 명의 사무라이들과 농민들이 싸우는 이야기지만 사실은 마지막에 모든 싸움이 끝난 다음 떠나가면서 사무라이들의 첫째인 감베이가 또 다른 사무라이에게 하는 그 유명한 대사, “우리는 또 다시 진 걸세. 우리는 졌어. 이긴 것은 농부들이야” 라는 그 말 때문에 찍은 영화이다. 사무라이들은 농부가 아니다. 그들이 다룰 줄 아는 것은 칼이지 농기구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 마을을 떠나야 한다. 사실 그 승리는 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제부터 사라져 가는 계급이자 존재들이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한 시대의 끝을 알리는 신호가 될 것이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졌고 한 시대가 끝나가고 있었다. 어디서 다시 시작해야 할까. 천황의 항복 이후 9년 후에 만들어진 영화. 임권택은 <바람 같은 사나이>를 휴전 이후 16년 뒤에 만들었다. 물론 이 영화는 처음부터 <7인의 사무라이>처럼 야심적인 기획이 아니었다. 나는 두 영화를 마주 보게 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고 이미 말했다. 내가 질문하려는 것은 길용이 왜 처음부터 여기 남아야만 하나의 이야기로 <바람 같은 사나이>가 성립 되냐는 것이다. <황야의 7인>도 일곱 명의 카우보이들은 멕시코 국경의 이 마을에 와서 도적 떼를 물리친 다음 마찬가지로 떠난다. 마을은 그들의 것이지 이들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새로운 도적 떼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마치 원래의 자리에 돌아가기 위한 것처럼, 마치 제 자리에 복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래서 자기의 권리를 되찾듯이 길용이 돌아오는 것이 중요하다. 약간의 가정. 여기서 한국전쟁을 괄호치고 이야기의 형식을 조금만 비틀면 단지 그의 동생 여섯 명과 리어카꾼의 죽음만이 아니라 공비들의 시체가 논두렁에 즐비하게 널리는 전투마저 길용이 돌아오기 위해서 필요하다면 할 수 없이 치러야 한다, 고 예언하는 운명적인 귀환이 마침내 완성되는 과정이라고 부르고 싶을 지경이다. 오이디푸스가 돌아오기 위해서는 그의 아버지를 죽여야 하며, 아버지는 아들의 귀환을 위해서 그때 그 순간에 그곳을 지나면서 아들에게 죽어야만 한다. <바람 같은 사나이>는 시작하면 공비들이 산에서 마을에 내려와 양민을 학살하고 쌀 다섯 가마를 요구한 다음에 물러가지만 이 장면은 동시에 길용이 고향에 돌아오는 것을 막는 유일한 장애물인 아버지가 공비들에게 처형을 당하고 아들 길용이 돌아올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는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다음 홀로 남은 딸이자 길용의 어린 여동생 옥이를 길용과 결혼하지 못한 영희가 돌본다. 나는 다소 냉담하게 물어보고 싶다. 영희는 길용의 어린 여동생 옥이를 돌봐야 할 어떤 의무도 없다. 그런데 왜 그녀는 엄마 없는 옥이를 엄마처럼 돌보는 것일까. 질문을 정식화시킬 필요가 있다. 나는 이 모든 장치들이 정교하게 짜여진 (하지만 따분한) 오이디푸스 이야기의 변주곡이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읽었다면 처음부터 다시 읽기 바란다. 핵심은 이 모든 귀결이 목적론에 따라 작동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따라가던 우리를 멈칫 세우는 것이다. 무엇이 이 영화 안에서 우리를 두렵게 만드는가. 이 이야기가 괴상한 것은 우연이 다른 우연 없이 서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때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우연(들)이 가까이 접근할 때 갑자기 이 모든 것을 잡아먹는 것은 고향이라는 집합 안의 블랙홀이다. 여기에는 두 개의 관점이 있다. 길용은 고향을 떠나온 사람이고, 이 영화는 이 주인공을 따라가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는 그것을 잃었고 그런 다음 되찾으려고 한다. 다른 하나는 거기에 있는 고향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잃은 것도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되찾을 것도 없다. 그 마을에 사는 농부들의 생명을 담보로 하여 쌀을 내놓으라고 해도 내줄 쌀이 없다. 텅 빈 마을. 거기에 쌀 다섯 가마를 갖고 길용이 돌아온다. 아버지는 죽었고 아들은 그 자리를 메우기 위해 고향에 찾아온다. 간단한 도식. 마치 그 둘은 형식과 내용처럼 서로를 끌어당긴다. 이때 서로는 서로에게 수행적인 임무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그런 다음 두 개의 임무 사이에서 갑자기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한 오이디푸스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여기에 이르면 약간 과격하게 반격하고 싶어진다. 이건 히스테리인 줄 알았는데 정신분열에 빠진 오이디푸스 판본이 아닌가요. 그리고 여기에 무서운 국가가 있다. 차례로 등장하는 검열의 심급들. <바람 같은 사나이>는 정확하게 그 자리에서 자포자기한 영화이다. 그런 다음 재빨리 가족 안으로 후퇴하였다. 
 
7인의 사무라이 스틸

황야의 7인 스틸
떠나는 사람들, <7인의 사무라이>(위), <황야의 7인>(아래)

바람 같은 사나이 스틸 이미지
남는 사람, <바람 같은 사나이>

 
아직 할 말이 남았다. <바람 같은 사나이>는 매정한 영화이다. 감정선은 대부분 끊어졌으며 인물들 사이에서 만들어질 수 있는 네트워크는 거의 가녀리게 여겨질 정도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전쟁과 여교사>를 떠올려보면 그게 기이하게 보일 정도이다. 심지어 거기서는 감정이 과잉한 나머지 그 선이 어느 순간부터 서로 엉키기까지 한다. 두 영화의 동일한 배경. 하지만 서로는 서로에게서 완전히 벗어난다. 역사라는 사건은 영화의 뒤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앞에서 존재하고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는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살아가야 한다, 살아나야 한다. 이때 임권택은 영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하나의 실험처럼 다룬다. 이 말을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임권택은 실험영화를 찍은 적이 없다. 하지만 그가 만드는 매번의 작업은 각각의 실험이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실험의 흔적이다. 나는 어디서부터 그 선이 끊어진, 자취가 어디선가 사라진, 여기서 저기로 이동하는 관점의 뿌리 자체가 어디론가 뽑혀버린, 그래서 마치 포기해버린 것만 같은 자리에서 이리저리 흩어진 흔적들에 대해서 말하는 중이다. 이 영화를 반복해서 보아도 길용과 여섯 명의 건달들 사이에서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줄 정도로 나누는 우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잘 설명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설명 없이 이 영화의 서사는 성립될 수 있는가. 그들은 그저 장르의 법칙을 따르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고 그런 다음 자기에게 내어준 운명을 따른다. 그런 다음 오직 길용만이 희생의 열매를 맛본다. 그에게는 그럴만한 자격이 있을까. 하지만 왜 다른 이들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일까. 대답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들은 길용이 여기에 머물면 갈 곳이 없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막내가 하느님의 왕국으로 향하는 것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고향 이외의 모든 장소가 마치 비-장소(non_place)처럼 다루어지고 있다. 공비들이 그렇게 위협적으로 출몰해도 마을 사람들 중에 이곳을 떠날 결심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조금만 이 영화와 적대적인 관계가 된다면 마치 길용이 고향으로 돌아오려는 안간힘이 거의 필사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여기에는 그가 고향으로 돌아와야만 하나의 주체로 성립될 수 있다는 최종적인 명제가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때 핵심은 떠나간 자만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원상복귀의 갈망이다. 여기서 떠나갔을 때의 시간과 돌아올 때의 조건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줄여나갈 것인가에 대한 만족할만한 대답은 어디에도 없다. 그것이 이 영화 안에서 우리를 두리번거리게 만든다. 나는 이미 <바람 같은 사나이>가 몇 차례이고 밤의 영화라고 말했다. 임권택에게 이 영화는 두 개의 입구를 보여주는 중이다. 하나는 다찌마와리 액션활극으로 가는 길이다. 임권택은 그런 다음 몇 년간 충실하게 이 장르를 찍었다. 그런 다음 여러 가지 이유로 반공영화를 만들어나갔다. 이 두 개의 입구는 사실은 하나의 길로 향하는 도정의 시작이다. 그 길의 끝에는 고향이 있다. 하지만 그때 임권택은 아직 확신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있을 것이다, 라고만 어렴풋하게 말한다. 위장하고 있는 화해. 은밀한 야심. 고전적인 작가주의 이론은 거기에서 시작했고 결국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라고 서명할 것이다. 나는 거기에 있을 지도 모를 여백을 이용하여 보충하고 싶다. 물론이다. 그러기 위해서 임권택은 장애물들을 차례로 제거해나갈 것이다. 같은 말이지만 말소시켜 나갈 것이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하겠다. 말끔하게 청소할 것이다.반복해서 말하겠다. <바람 같은 사나이>는 매정한 영화이다. (계속) 

추신_ <바람 같은 사나이>는 현재 영화 시작하고 11분 52초 동안 사운드 네가가 유실되었다. 이후의 장면들로 충분히 내용을 유추할 수 있긴 하지만 몇 장면들은 대사가 몹시 궁금하다. 특히 (이미 언급한) 목사가 길용을 설득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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