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대협>, '트랜스내셔널'한 어떤 고립에 대하여

by.이영재(영화연구가) 2022-04-20조회 1,281

1. 1970년대의 한국영화는 그 독특한 조증과 울증의 세계로 기억될 것이다. 이를테면 1974년 경이적인 흥행성공을 기록한 <별들의 고향>이 마련해낸 70년대의 여주인공 경아는 까르륵거리는 웃음과 흘러내리는 눈물로 기억된다. 혹은 <바보들의 행진>의 저 과도한 명랑과 내러티브 공간의 바깥으로 번져나오는 우울을 생각해보라. 프로파간다적 명랑성이라 할만한 대책없는 웃음과 영화 안에서는 거의 해명되지 않는 우울의 왕복. 이 감정의 기복은 너무 극심하고 빈번해서 한 편의 영화 내에서, 그러니까 컷과 컷의 연쇄 안에서 그 적소를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인다.(물론, 검열의 문제가 있다. 우리는 몇몇 참혹한 사례들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다.) 1970년대 한국영화를 보는 데 있어 끊임없이 영화 바깥을 참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조울증의 영화들은 영화를 국가 시책의 방도로 삼고자 했던 정책자들의 과도한 개입과 이제 막 등장한 대중의 상상태와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한 장사치들의 욕망이 얼기설기 엮여진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그 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에 놓여있던 액션영화는 어떠한가? 그러니까 도시 하위계급 남성들의 값싼 오락거리이자, 국가의 직접적인 치안의 대상이며(이런 영화들이 상영되던 장소는 가장 빈번한 경찰력의 검속 대상이었다는 점을 상기해보라), 때때로 통국가적 장르의 위용을 과시하며 장사꾼들의 주머니를 채워주었던 바로 그 장르 말이다. 

2. 임권택의 1972년 영화 <삼국대협>은 액션 히어로의 트랜스내셔널한 교류의 역사 속에서 만날 수 있는 가장 복합적인 동시에 가장 고립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제목 그대로 이 영화에는 일본의 맹협(盲俠) 자토이치와 홍콩의 외팔이 독비도(獨臂刀), 한국의 의적 일지매가 모두 등장한다. 당시의 광고. “중국의 외팔이, 일본의 맹협, 한국의 일지매가 한꺼번에 나온다!” 이 광고 문구는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를 간결하게 전달한다. 동어반복이지만, 다시 한 번 말하건데 자토이치와 독비도와 일지매를 한 자리에 모으는 것.  

<삼국대협>이 만들어지기 일년 전, <신자토이치 부셔라! 중국검>(일본 제목)=<독비도 대전 맹협>(홍콩 제목)이 <외팔이와 맹협>이라는 심플한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해 인기를 끌었다. <자토이치> 시리즈의 22번째 작품이자 <독비도> 시리즈 중 하나로 카운트되는 이 일본-홍콩 합작영화는 아마도 1970년대 초 이 지역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던 가장 대담한 기획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자토이치와 독비도는 아시아를 석권하고 있던 당대의 액션 히어로들이었다. 1962년 제1작을 내놓은 이래 <자토이치> 시리즈는 1960년대 내내 일본 내에서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절대적인 인기를 구가하였다. 이 시리즈의 주요 수입처였던 홍콩의 쇼브라더스는 이 시리즈의 직접적인 영향하에서 자신들이 새롭게 전개해나갈 신파 무협영화의 기본틀을 완성하였다.(더 나아가서 말하자면 당시의 쇼브라더스 라이브러리에서 <자토이치> 시리즈를 컷 바이 컷으로 ‘사숙’한 신필름의 임원식과 최경옥은 자토이치-카츠 신타로의 맹인 검법을 응용, 여성 맹인 검사 이야기 <맹수>와 <비연맹녀>를 만들었다.) 그리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쇼브라더스는 <독비도>(한국 제목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를 통해 신파 무협영화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으며, 이로써 외팔이-왕우라는 자토이치-카츠 신타로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린 액션 히어로가 탄생하였다.

자토이치와 외팔이가 대결하는 <신자토이치 부셔라! 중국검>=<독비도 대전 맹협>은 <에이리언 VS. 프레데터> 같은 기획이다. 물론 훨씬 더 성공적인. 문제는 이 절대 강자들의 대결을 어떤 결말로 이끄는가이다. 즉, 누가 이기는가의 문제. <신자토이치 부셔라! 중국검>=<독비도 대전 맹협>은 이 문제를 각각의 자국 관객들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적절한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일본 버전에서는 자토이치가 이기고, 홍콩 버전에서는 독비도가 이긴다.

다시, 1971년 <외팔이와 맹협>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했던 당시로 돌아가보자. 이 영화는 위장 일본영화가 아닌가라는 논란이 있었으나 일본-홍콩 합작 서류 사본을 제출함으로써 개봉될 수 있었다. 인기 절정의 ‘외팔이 독비도’와 더불어 전광석화 같다는 소문만 무성했던 맹인 자토이치의 오리지날 검법을 드디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이 영화의 흥행은 예상대로 성공적이었으며, 서울에서만 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참고로 말하자면 이 순간에 확인된 ‘자토이치’의 흥행가능성은 한국에서 개봉될 수 없었던 이 일본영화의 판권을 사들이도록 만들었고, 곧 <자토이치>의 한국 버전 <죽장검>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돈방석에 앉을’ 거라고 예측됐던 이 영화는 그러나 흥행에 실패했으며, <자토이치>처럼 시리즈로 만들고자 했던 당초의 기획은 좌초되었다.)

<외팔이와 맹협>에서 이루어진 자토이치와 독비도의 기념비적인 만남을 염두에 둔다면, 이로부터 촉발되어 여기에 한국산 히어로 일지매까지 가세한 <삼국대협>은 이로부터 한발 더 나아간 것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이들 앞에 공동의 적을 설정해둠으로써, 불필요한 우열 가르기를 지양하고 히어로들이 힘을 합쳐 적을 무찌른다는(이 적은 물론 악독한 일본인이다) 산뜻한 쾌감까지를 선사하고자 한다. 이 영화의 간략한 줄거리. 때는 임진왜란 직후인 조선중기. 조선의 검객 일지매는 일본이 빼앗아간 왕의 보검을 찾아서 일본으로 향한다. 일본에서 외팔이와 맹협을 만난 일지매는 이들과 힘의 우열을 가리다가, 결국 마지막에는 셋이 모두 힘을 합쳐 공통의 적이자 사원(私怨)의 대상인 악당 구로다와 대결한다.

<삼국대협>이 진정 흥미로워지는 것은 이 영화가 자신의 줄거리에도, 그리고 이 줄거리가 전달하는 그 어떤 도상에도 전적으로 무관심하다는 데에 있다. 첫 번째, 이 영화는 일단 설정상 세 나라가 모두 개입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임진왜란을 불러오고 있지만, 이 설정은 다만 삼국의 캐릭터를 불러모으기 위한 장치에 불과해 보인다. 즉, 이 시대배경을 그럴듯하게 만들어줄 디테일도, 역사적 관점도 전혀, 부재한다.

두 번째, 명백히 당대의 인기있는 히어로들을 빌려오고 있지만 여기에는 자토이치-카츠 신타로도, 독비도-왕우도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에 카츠 신타로를 그럴듯하게 흉내내기 위해 흰 눈자위를 희번뜩거리는 김희라와, 왕우를 흉내내서 머리를 하나로 틀어올리고 한쪽 팔을 옷소매에 숨긴 채 외팔이가 된 김기주를 볼 수 있을 뿐이다. 게다가 이 영화는 원본을 모방하는 데에 있어 그 어떤 심혈도 기울이지 않는다. 의상, 제스처, 무기 등 대부분의 디테일은 원본으로부터 어긋나 있다. 맹협은 장발이며(자토이치는 짧은 머리이다. 이 독특한 헤어스타일은 맹인 안마사인 자토이치가 사회적 약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유력한 징표였다), 외팔이는 장검을 사용하는 데다가 검은 옷도 입고 있지 않다(검은 옷이 홍콩 무협영화에서 차지했던 의미와 부러진 칼이 <독비도>에서 가지고 있던 내러티브적-신체적 의미를 생각해보라!). 다시 말하자면 이 맹협은 자토이치를 흉내내고 있으나 자토이치는 아닌 말 그대로 (한국어 번역인) 맹협이며, 외팔이는 독비도를 흉내내고 있으나 독비도는 아닌 (마찬가지로 한국어 번역인) 외팔이일 뿐이다.

세 번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유일한 관심은 맹협과 외팔이와 일지매라는 세 인물의 등장에 있다. 정말로 그것이 유일한 관심인데, 왜냐하면 이들은 등장할 뿐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들은 종종 슬랩스틱 코미디와 같은 움직임을 연출하거나, 옷 바꿔입기와 같은 작은 소극들을 만들어낸다. 아무도 자신의 캐릭터에 대해 믿지 않으며, 그것이 만들어내는 이야기 또한 믿지 않는다. 그리고 가장 난감한 순간이 마지막에 온다. 세 히어로는 드디어 힘을 합쳐 구로다의 집에 쳐들어간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강력한 구로다의 일격에 세 명의 칼이 모두 잘려나가고, 흘러내리는 바지춤을 움켜쥔 채 도망다니는 이 우스꽝스러운, 거의 비루해 보이는 히어로들의 형상은 과연 무엇일까?

3. 정성일의 다음과 같은 언급은 여기에 대한 가장 적절한 묘사일 것이다. “우스꽝스러운 슬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상황의 무의미. 내가 여기서 보는 것은 달리 말하기 힘든 우울증이다.”1) <삼국대협>에 관한 가장 길고, 가장 정교한 분석일 이 글에서 정성일은 이 ‘우스꽝스러운 슬픔’을 임권택이라는 작가(무)의식 안에서(혹은 임권택을 통해 한국영화사의 부단한 계보를 형성시키고 하는 그의 의도 속에서) 발견해내고 있지만 아마도 이것은 임권택만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보여주는 지지부진한 조울증이야말로 1970년대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었는가를 실감케 하는 것인지 모른다.

베트남전 특수를 거치며 한국은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서 대중사회로 진입해가고 있었으나 민족중흥을 외치는 독재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폐쇄적인 언설공간으로 이를 마름질하고자 하였다. 세계를 향한 열림은 마치 베트남전과 이 나라가 관계맺던 방식만큼 왜곡되어 있었다. <삼국대협>이라는 저 ‘빈곤한 이미지’야말로 이 순간 한국영화가 가닿은 가장 국제적이고, 가장 지엽적인 한 형상에 다름 아닐 것이다.

***
1) https://www.kmdb.or.kr/story/5/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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