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김용훈, 2020

by.안시환(영화평론가) 2021-01-19조회 1170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김용훈, 2020)은 그 제목에서부터 자신이 어떠한 인물을 담고 있는지 밝히고 있다. 그 제목에 따르면 그들은 ‘짐승들’이다. 영화는 그들이 짐승이 되어가는 과정보다는 짐승들이 얽히고설키며 서로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잔혹한 광경을 보여주는 일에 방점을 찍는다. 나는 이 잔혹한 풍경을 보면서 왜 그렇게 많은 이들이 죽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물론 그것이 짐승들로 가득한 세계의 이치라고 말한다면 나로서는 할 말이 없긴 하다. 하지만 생존이 삶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버린 세계를 반복적으로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야말로 ‘비평적 개입’을 포기하는 일이자 스스로를 짐승의 세계의 일원으로 인정하는 꼴이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어쩌면 <지푸라기라도…>는 오로지 생존만을 위해 전력 질주하는 인물들이 지배하는 지금의 한국영화(또는 한국사회)를 또 다른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징후인지도 모른다. 

<지푸라기라도…>는 돈가방을 보여주며 시작한다. 우리는 누가 이 돈가방의 주인인지 알지 못한다. 영화가 원하는 것은 이 돈가방의 주인이 누구인지가 아니라, 이 가방 안에 돈이 담기는 과정에서 탐욕에 눈먼 자들이 보여주는 짐승 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애인이 사라지며 짊어진 빚을 허덕이며 크게 한탕을 노리는 태영(정우성), 그런 그를 이용해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고 싶은 연희(전도연), 돈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사채업자 두만(정만식), 하루하루의 생활비에 시달리며 살아가는 중만(배성우)은 각자의 사연으로 돈가방을 차지하기 위한 사투를 벌인다. 물론 돈가방을 사이에 둔 쟁탈전에서 인물들의 광기어린 탐욕을 보여주는 것은 장르 영화의 클리세다. <지푸라기라도…>가 여섯 개의 장으로 에피소드를 나누고, 과거의 사연을 현재의 사건인 전개하는 트릭을 쓰며, 신체를 요란하게 절단하는 잔인한 장면 등을 보여주는 하드고어적인 표현을 차용하는 등의 잔재주를 부린다 해도 이 전형성에서 탈피하지는 못한다. 
 

<지푸라기라도…>는 돈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독하고 잔악해질 수 있는지 그리려 한다. 애인을 배신하는 것 정도는 애교에 가깝고, 차로 산 자를 깔아뭉개고 신체를 난도질하는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가진 것 없는 자에게 더 매정하게 구는 것이 자본주의의 이치고, 그래서 돈 앞에서 절박해지는 것이 없는 자들의 인지상정이긴 하지만, 인물이 절박한 것과 그런 그들의 행동이 설득력을 갖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들은 각자의 사연을 보여줄 뿐, 그것을 가지고 자신들이 왜 그런 행동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불나방처럼 돈에 날아가 자신의 몸을 불태울 뿐이다. 그러니 관객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의미한 피의 향연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그들은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다. 설득력을 갖지 못한 절박함을 바라보는 것은 참으로 고문 같은 일이다. 이러한 면에서 <지푸라기라도…>의 제목에 삽입되어 있는 ‘짐승’이라는 단어는 일종의 알리바이 역할을 한다. 그들은 짐승이기 때문에 인간성이 거세되어야 하고, 그래서 돈가방 앞에서 자동기계처럼 자신의 탐욕을 분출하면 그만이다. 그들은 ‘살아남는 것’이 삶의 모든 것이 되어버린 지금 한국사회의 초상화다. 

이러한 면에서 <지푸라기라도…>가 하나의 징후일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는 <곡성>과 <부산행> 이후 유행하는 좀비 영화에서 오로지 살아남는 일에 천착하는 인물들을 마주하곤 한다. 지금의 한국 영화가 관객에게 전시하는 것은 (유무형의) ‘괴물’ 앞에서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하는 인간군상의 모습이다. <곡성>의 종구(곽도원)는 칼에 찔려 죽는 순간까지 자신이 왜 이런 파국을 맞이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부산행>과 <서울역>, <#살아있다>의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세계에서 인물이 할 수 있는 것은 안간힘을 다해 도망치는 것이 전부다. 한마디로, 오로지 생존만을 위한 전력 질주. <지푸라기라도…>와 일련의 좀비 영화 등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삶’이 아니라 ‘생존’의 절실함이다. 생존 자체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워질 때, 또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는 것은 사치에 가깝다. 그래서 지금의 한국 영화에는 ‘삶’이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생존은 인간적 삶의 기본 전제다. 그렇기에 생존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도 추한 것도 아니고, 선도 악도 아니다. 생존의 추구가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인간이 생존을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것과 그것만이 유일한 가치로 자리매김 되어 있는 것은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지푸라기라도…>은 그 엔딩에서 (원작과는 달리) 중만의 부인(진경)에게 돈가방을 선물한다. 등장인물 중 유일하게 돈가방의 존재를 몰랐던 인물에게 돈가방이 흘러 들어간다는 점에서 어떤 아이러니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이 결말은 영화적인 우연 그 이상이 아니다. 돈가방은 생존을 가능하게 할지라도 삶의 가능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것이 삶의 희망이 아니라 서사적 기만에 더 가깝게 느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 한국영화를 휩쓸고 있는 생존주의는 “사회적인 것의 성스러운 환상이 벗겨진, 인간의 생물학적 나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사회적인 불가능이 생산하는 마음의 형식”(김홍중, <사회학적 파상력>, p.292)이다. <지푸라기라도…>가 절망스러운 것은 단지 생존주의에 빠진 인물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상상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절박한 인물을 낭떠러지 앞으로 몰아가는 지금의 한국 영화가 앓고 있는 병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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