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신상옥, 1959

by.주유신(영화평론가) 2012-12-12조회 10,478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외무부 건물 안에서 성희(주증녀 분)는 영숙(최은희 분)에게 총을 쏜다. 그러나 이 살인 미수 사건에 대해 성희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결국 성희를 변호하기 위해 나선 영숙의 고백에 의해서 두 여자 간의 감추어진 비밀이 밝혀진다. 

영화의 플롯은 여성성과 모성 또는 우정과 모성 사이에서 분열되고 유동하는 여성들이 ‘사적 진실을 공적으로 재현’하는 데에서 겪게 되는 어려움을 보여준다. 따라서 영화의 주된 긴장은 두 여성의 재생산 능력의 차이와 낳은 정과 기른 정 사이의 갈등 그리고 두 여성 모두에게 치명적인 비밀이 공적 영역을 통과하는 과정을 둘러싸고 발생한다. 미혼 여성의 자유로운 섹슈얼리티와 원치 않는 임신 그리고 상류층 기혼 여성의 불임은 여성 내부의 섹슈얼리티 차이에서 기반하는 다른 종류의 ‘모성’을 통해서 모성 멜로드라마를 전개시킨다면, 공적 영역 속에서 왜곡되고 심문당하며 결국은 ‘사회적 추문’이 되어버리는 여성들의 사적 진실은 필름 느와르를 구성해낸다.

영화는 불안정하고 숨가쁘게 전개되는 근대성에 직면하여 두 여자가 맞게 되는 ‘위기의 서사’를 중심으로 일관되게 구조화된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이상적으로 보이던 중산계급 가정이 과연 붕괴되고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다른 한편으로는 미혼 여성의 자유로운 섹슈얼리티가 결국은 어떤 식으로 처벌받게 될 것인가를 둘러싸고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런 서사화의 과정은 여성 등장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외화시켜내는 ‘가정과 거리’라는 두 종류의 지리적 공간, 즉 사적/공적, 여성중심적/남성중심적 공간들을 가로지르면서 전개된다.

철저하게 남성적이고 권위적인 공간 속에서 두 여성들의 진실은 말 그대로 계속해서 ‘미끄러져 버리는데’, 이것은 이 사건을 두 여자와 한 남자 간의 치정 관계로 읽어내는 신문의 헤드라인을 통해서 더 강화된다. 따라서 영화 속에 등장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공적 공간인 ‘검찰청’에서 이루어지는 성희에 대한 심문과정에서는 ‘신문’으로 대표되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사회적 여론과 시선 그리고 침묵으로 봉인되어 버리는 여성들의 사적 진실 간의 대립이 긴장감 있게 묘사된다. 결국 여성들의 진실을 밝혀내는 것은 남성의 권력이나 이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수단들이 아니라 한 여성에 대한 다른 여성의 우정과 헌신, 즉 여성 간의 연대(female bonding)이다. 그 결과 사적 영역에나 어울리고 그 안에 한정되어야할 ‘여성들의 이야기’는 공적 질서를 일순간 무효화시키고 그 질서와 끊임없이 길항하는 그 무엇이 된다.

그러나 필름 느와르와 모성 멜로드라마라는 두 가지 이질적 장르로 이루어진 영화의 구조는 여성의 죄를 조사하고자 하는 남성의 시도와 이를 좌절시키고 마는 여성들의 이야기 간의 지속적인 긴장을 더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영화의 서사는 ‘누가 범인인가’보다는 ‘범죄가 왜 일어났는가’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희생자와 가해자, 거짓과 진실의 경계를 선명하게 가르는 남성적인 법의 담론에 비해서, 인생의 점차적인 변화, 맥락의 중요성, 상호관계들의 성격을 강조하는 여성의 담론이 지니는 우월성을 지속적으로 노출시킨다.

영화의 이런 측면은 주로 플래쉬백 구조와, 이 부분을 지배하는 여성 시각에서의 내래이션에 의해서 가능해진다. 특히 영숙의 목소리로 진행되는 내레이션은 필름 느와르와 멜로드라마 부분을 연결해준다면, 멜로드라마 부분에서 성희에게 임신을 하게 된 자신의 처지와 심정을 설명하거나 아이에 대한 자신의 모성적 욕망을 강하게 주장하는 여성의 말들은 여성 주체성과 그 내부의 모순을 복합적으로 발화하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그녀의 이야기는 양가성을 지니는데, 한편으로 그녀의 고백은 ‘살인미수 사건이 치정에 얽힌 것’이라는 공적 담론을 무효화시키는 ‘진실’의 기능을 한다면,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모성에 대한 영숙의 주장은 주관적 상상에 기반한 ‘허구적 욕망’임이 밝혀지면서 영화 마지막에 무효화되는 이중적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 플래쉬백 구조를 통해 전개되는 현재와 과거 간의 긴장은 안과 밖,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거짓과 진실, 허구와 실제 등을 둘러싼 본질적 긴장으로 나아가면서, 영화 텍스트를 정교하게 중층화시키는 동시에 텍스트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원적 대립 간의 경계에서 유동하게 만들어준다.

멜로드라마는 여성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모순과 갈등의 구조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여성을 전통적인 지위에 다시 묶어두려는 궁극적인 의도와는 반대로, 왜 끊임없이 여성들이 기존의 질서와 가치관으로부터 이탈할 수밖에 없는지 그리고 또 어떤 방식으로 이탈하는지를 보여주게 된다.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에서 낭만적 사랑, 사회적 자유 그리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가져다 줄 수 있는 쾌락과 위험의 가능성을 두루 맛보고 결혼으로 진입한 영숙은 이미 전근대적 현모양처일 수가 없다. 특히 이 영화는 여성과 남성 간의 그리고 사회계급들 간의 수많은 관계들을 포괄하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간의 대립을 통해서 이 과정을 형상화하여 보여준다. 물론 결말에 이르면 ‘결혼’이라는 매개물을 통해서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이 어렵사리 화해와 균형에 도달하지만, 그 과정에서 복잡하고 치열하게 전개되는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간의 대립과 불화, 배제와 포함의 역학은 근대를 살아가는 여성 주체들의 이야기를 더 없이 역동적으로 재현하는 성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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