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희
Choi Eun-hee / 崔銀姬 / 1926  ~  2018
본명
최경순 (Choi Kyeong-soon)
대표분야
배우, 감독
데뷔작품
새로운 맹서 1947
활동년대
1940, 1950, 1960, 1970, 1980, 1990, 2000,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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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총각선생 (최은희, 1972)
공주님의 짝사랑 (최은희, 1967)
민며느리 (최은희, 1965)

주요경력

1943년 극단 아랑 입단
1947년 <새로운 맹서>로 영화계 데뷔
1953년 신상옥 감독과 함께 신필림 설립
1966년 안양영화예술학교 설립(이사장)
1969년 언양영화예술학교 취임(교장)
1972년 극단 배우극장 설립(대표)
1984년 북한영화 <약속> 감독
1986년 미국으로 망명
1988년 수기 <조국은 저하늘 저멀리> 상, 하권(미국, 일본, 한국판) 출간
1997년 미국 LA에서 연극 <오! 마미> 출연
2001년 극단신협 대표

2002년 안양 신필림 영화예술센터 설립(대표)
2003년 안양신필름예술센터 학장

2004년 동아방송대학 연극영화과 석좌교수
2005년 성결대학교 연극영화과 석좌교수
2007년 제3회 앙드레김 베스트스타어워드 특별상
2007년 7월~ 제1회 천마 신상옥 청년영화제 집행위원회 위원장
2007년 자서전 <고백> 출간
2011년 제56회 대한민국예술원상 연극, 영화, 무용 부문 수상자

기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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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6년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최경순(崔慶順)이다(편집위원회, 김기제). 1943년 배우 문정복(文貞福)의 소개로 극단 아랑(阿娘)에 연구생으로 들어가서 해방 전까지 활동했다. 해방 후에는 재건된 토월회(土月會),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 등에서 무대생활을 했으며, 신경균의 <새로운 맹서>(1947)에 출연하면서 영화에도 데뷔했다. 이후 <밤의 태양>(1948), <마음의 고향>(1949) 등의 작품에 출연했다. 전쟁 기간 중에는 피난지 대구와 부산에서 국립극단 신협(新劇協議會)의 주요 무대에 올랐으며, 황남(黃男)의 권유로 신상옥(申相玉)의 <코리아>(1954)에 출연했다. 이를 필두로 본격적으로 신상옥과 신필름 영화의 전문 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꿈>, <젊은 그들>(1955), <무영탑>(1957) 등을 거쳐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부터 흥행에 주가를 올렸다. 이어 <지옥화>(1958),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자매의 화원>, <춘희>(1959), <로맨스빠빠>, <백사부인>, <돌아온 사나이>(1960) 등 신필름 전속으로 여러 편의 영화에 출연했으며, 홍성기?김지미의 <춘향전>과 격전을 벌인 <성춘향>(1961)이 크게 성공하면서 전성기를 맞았다.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1961), <열녀문>(1962), <쌀>, <로맨스 그레이>, <강화도령>(1963), <벙어리 삼룡>, <빨간 마후라>(1964) 등 연이어 대작들을 발표한 그는, 1965년 <민며느리>를 통해 한국영화 사상 세 번째 여성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감독 작품은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선생>(1972)으로 이어진다. 또한 후학양성에도 관심을 쏟아 1966년 안양영화예술학교를 설립했으며, 1969년에 교장으로 취임했다. 1970년대에도 지속적으로 영화출연과 극단 배우극장 설립 등 무대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1978년 안양영화예술학교 교류사업차 방문한 홍콩에서 돌연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이후 뒤이어 북한으로 오게 된 신상옥과 함께 신필름영화촬영소를 세우고 <탈출기>(1984), <소금>, <심청전>(1985) 등에 출연했으며, <약속>(1984)을 감독하기도 했다. 1986년 오스트리아 빈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1999년 남한으로 귀국했다. 2001년 극단 신협의 대표로 취임했으며, 이듬해에는 안양에 신필름영화예술센터의 설립을 주도했다(최은희). 촬영감독 김학성과 이혼 후 신상옥과 결혼했다. 해방 후 한국영화사를 대표하는 배우라 할 수 있다.

* 참고문헌
김기제 편, 『한국연예대감』, 성영문화사, 1962, 203쪽.
최은희, 『최은희의 고백』, 랜덤하우스코리아, 2007.
편집위원회 편, 『영화백과 제1권』, 정치평론사, 1975, 147쪽.

[작성: 김한상]
출처 : 여성영화인사전
최은희(崔銀姬)

배우, 감독, 캐스팅 디렉터. 1926년 11월 20일 경기도 성남 출생. 본명 최정순.

최은희를 만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그는 연극과 영화에, 남한과 북한에 그리고 배우와 감독으로서의 역할 모두에 걸쳐 있다. 최은희는 소극적인 인상과는 달리 방공호에서 만난 배우 문정복씨의 권유로 극단 아랑에 발을 들여놓고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집을 뛰쳐나가 무대로 나갔던 당찬 여성이었다. 이렇게 열 여덟에 <청춘극장>의 하녀역을 시작으로 최은희는 조선연극회, 토월회, 극협, 신협에서 모진 시련과 고통이 서린 계속적인 연기변신을 꾀했고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47)로 영화계에 첫 발을 들여놓았다. 일제의 강제징용에 끌려갔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에 돌아온 청년들이 동네 처녀들과 힘을 합하여 부정과 폐습을 타파하고 황폐한 어촌을 재건해가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최은희의 60년대 초 출연작 <상록수>(61, 신상옥)와 <쌀>(64, 신상옥)의 원조격이었다. 그는 영화평론가 변인식의 표현을 빌면 조미령, 노경희, 이민자, 윤인자, 문정숙, 도금봉, 그리고 김지미에 이르는 이른바 "비로드 시대의 여우들" 중에서 개화기 신여성에 적역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영화배우로서 확실히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자신을 확고하게 한 것은 윤용규 감독의 <마음의 고향>(1949)에서였다. 새벽 범종 처럼 낮고 은은한 울림이 있는 이 영화에서 그녀는 동승을 보며 죽은 자식을 떠올리고 그와 교감하는 과부의 심경을 섬세하고 절제있게 묘사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동심초>(59, 신상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61, 신상옥)에서 보이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의 과부의 위치와 그로 인한 내면적인 정적인 연기의 자락을 미리 보여준 셈이었다. 특히,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옥희 어머니인 최은희가 사랑방 손님(김진규)에게 이끌리는 심리와 갈등은 비켜간 시선이나 공간적인 거리감, 그리고 소복을 입은 그녀가 피아노를 치는 장면 등으로 요약되어 있다. 그의 내면으로 향하는 열정과 고뇌 같은 것들이 전통과 근대의 갈림길에 서있던 당시의 여성관객들의 내면에 울림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최은희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그녀는 자신이 가진 '동양적 용모와 체취를 되풀이하는' 역할에 만족하지는 않았다. <지옥화>(58, 신상옥)를 통해 양공주와 밀수꾼들, 그리고 주한미군이 뒤엉켜있는 1950년대 한국사회에 들이댄 거울에는 지적이면서 강인한 최은희의 이미지가 전도되어 비친다. 그녀는 여기서 몸의 교환가치로 세상을 살아가며 끈끈하게 버텨내는 기지촌 소냐로서 전후의 황폐함속의 팜므파탈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결국 그녀는 시궁창에서 뒹굴다가 연인의 칼에 찔려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그녀의 뇌쇄적인 몸놀림이나 표정, 그녀의 과감함 등은 황폐하고 희망없던 당시 사회를 역설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이런 최은희의 다양한 '얼굴'은 당시의 여성 관객들에게 다양한 담론적 위치를 부여했던 이지형, 감각형, 순정형, 육체형 등의 분류법에 대한 하나의 도전이었다. 하지만 최은희의 회고에 따르자면 당시의 관객은 그녀에게서 도발적인 여성상보다는 전통적 여성상을 보기를 원했던 것 같다. 양공주로 분한 <지옥화>와 얼굴에 천연덕스럽게 애교점을 찍은 유부남 애인을 가진 바걸로 등장한 <로맨스 그레이>(63, 신상옥)가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 분노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양한 그녀의 '얼굴'은 신상옥감독과의 파트너십에 의해 강화되기도 하고 유지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느 여대생의 고백>(58, 신상옥)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59, 신상옥) 이후 한국영화계에 뿌리를 내린 신필름의 영욕의 세월은 아마 최은희가 없었다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 시작이자 절정은 <성춘향>(61, 신상옥)이었다.한국적인 애정표현의 정석을 보여주었으며 신분사회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던 이 영화는 2개월간의 장기 상영으로 32만 관객을 동원했는가 하면 일본, 미국, 홍콩 등으로 수출함으로서 영화산업과 해외진출에 대한 꿈에 잔뜩 부풀어 있던 신필름의 야망에 불을 붙였을 것이다. 이후 최은희가 출연한 신필름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열녀문>(62, 신상옥) <빨간마후라>(64, 신상옥) <강화도령>(63, 신상옥) <이조잔영>(67, 신상옥) <벙어리 삼룡이>(64, 신상옥)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즉, 120편이 넘는 영화인생의 대부분을 신필름과 함께 한 그는 신필름의 살아있는 자산이었다.
최은희가 1965년 우리 나라의 세 번째 여성감독으로 메거폰을 잡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당시 한국적 영화왕국을 자랑하고 있었던 신필름안에서의 그녀의 위치때문으로 보인다.
즉, 신필름안에서 단지 배우중 하나였거나 감독의 부인으로서가 아니라 그녀는 그녀가 출연했던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65, 임원식)에서의 민비 처럼 조용한 가운데서도 야심 만만한 도전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분명 그녀보다 먼저 감독이 된 여성 감독들인 박남옥이나 홍은원보다는 훨씬 유리한 조건 아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60년대에 <민며느리>(65) <공주님의 짝사랑>(67) 단 두편을 연출한 것을 보면 1960년대 한국사회에서 여성감독이 되고 여성감독으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연출한 첫 영화 <민며느리>는 민며느리(최은희)인 점순의 신산하고 고된 삶을 묘사하면서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부부의 애정에 기반한 핵가족으로의 재편을 의미심장하게 역설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단초를 제공하지만 어떤 강한 불가항력앞에 순종하며 결국 '착한' 가부장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은 그동안 신필름이 만들어온 일련의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며느리>는 시어머니 역의 황정순과 친정어머니 역의 한은진이 민며느리와 딸이라는, 점순에 대한 각각의 입장의 차이를 세세하고 절절하게 묘사하고 최은희 자신이 어린 남편을 설득하는 무게있는 연기를 보여준 덕에 신필름의 여타 작품과는 다른 분명한 개성이 넘치는 영화가 되었다.
그의 영화인생은 아직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은 그 소란스러웠던 납북사건의 미스테리까지 더해져 깨뜨려지지 않은 신화 저편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신화는 점차 역사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변재란)

출연
-47 새로운 맹서. -48 밤의 태양. -49 마음의 고향. -54 코리아. -55 꿈, 젊은 그들. -57 가거라 슬픔이여, 다정도 병이련가, 무영탑. -58 다시찾은 양지, 돈, 어느 여대생의 고백, 자유결혼, 지옥화, 촌색씨, 형제. -59 가난한 애인들, 고개를 넘으면, 그 여자의 죄가 아니다, 꿈이여 다시 한번, 내사랑 그대에게,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동심초, 삼여성, 자매의 화원, 자유결혼, 춘희, 황혼의 애상. -60 돌아온 사나이, 려인, 로맨스빠빠, 백사부인, 사랑의 역사, 슬픈 목가, 이 생명 다하도록, 청춘의 윤리. -61 군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서울의 지붕밑, 성춘향, 의적 일지매, 주마등, 한국의 비극. -62 검풍연풍, 대심청전, 마음대로 사랑하고, 맹진사댁 경사, 무정, 불러도 대답없는 이름이여, 사랑과 죽음의 해협, 산색시, 산울림 칠 때마다, 열녀문, 원한의 일월도, 29세의 어머니, 천하일색 양귀비, 폭군연산. -63 강화도령, 로맨스그레이, 며느리의 비밀, 보은의 구름다리, 철종과 복녀, 횃불. -64 검은 상처의 부르스, 계동아씨, 님은 가시고 노래만 남어, 달기, 명동에 밤이 오면, 벙어리 삼룡, 벽오동 심은 뜻은, 빨간 마후라, 새벽의 비상선, 쌀, 이대로 죽을 수 없다, 치마바위, 평양감사, 해녀. -65 가을에 온 여인, 날개부인, 대폭군, 동경아 잘 있거라, 민며느리, 배비장, 여간첩 에리샤, 이 여자를 보라, 청일전쟁과 여걸민비. -66 나는 매국노, 대원군, 서유기, 숙부인, 흑도적. -67 네 자매, 다정불심, 문정왕후, 산, 타인들. -68 목가, 무숙자, 속 팔도강산, 여, 여자의 일생. -69 겨울부인, 내일은 죽을지라도, 물망초, 사랑은 가고 세월만 남아, 시댁, 육군 김일병, 이조여인잔혹사, 저 눈밭에 사슴이. -70 만종. -72 해 달 별 그리고 사랑, 효녀심청. -73 딸부잣집. -74 진아의 편지, 한강. -75 동거인, 빨간 구두, 아이러브 마마, 애창. -76 어머니와 아들. -81 탈출기. -84 그때 죽어도 좋았다. -85 소금. 캐스팅 디렉터 -90 마유미. 연기지도 -94 증발.
감독
-65 민며느리. -67 공주님의 짝사랑. -72 총각선생. -85 소금.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1926년 11월 20일 경기도 광주 출생. 본명은 최경순.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 가운데 한 사람이다. 1943년 배우 문정복의 권유로 극단 '아랑'에 입단하면서 연극생활을 시작했고, 해방 후 토월회, 극협,신협등에서 활동을 하다가 1947년 신경균 감독의 <새로운 맹서>를 통해 영화계에 데뷔했다. 이후 그녀는 <밤의 태양>(박기채,1948),<마음의 고향>(윤용규,1949)등의 영화에 주연으로 발탁되면서 급성장하기 시작했고, 1950년 한국 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지 부산에서 신인감독 신상옥을 만나면서 그녀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이후 그녀는 신상옥의 영화에 대개 주연으로 출연하면서 인고하는 조선적 여인상과 근대적 욕망의 여인상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이미지로 등장하여, 독특한 자신만의 이력을 쌓았다.그녀의 영화감독 데뷔는 1965년 <민며느리>를 통해서였다. 당시 대한민국 영화계의 반을 차지한다고 했을만큼 막강한 라인업을 가지고 있던 신필름에서 최은희가 주연한 영화로서,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돈 때문에 민며느리로 들어간 점순이 어린 신랑,모진 시어머니 사이에서 고생하다가 결국 시어머니의 사랑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황성준이 시어머니역을, 한은진이 친정 어머니 역으로 열연한 이 영화는 전통적 사회의 여성이 겪는 고통을 섬세한 감각으로 다루었지만, 비평이나 흥행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이후 그녀는 공주님이 저자 거리에서 겪는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 <공주님의 짝사랑>(1967), 총각 선생이 시골 학교로 부임하면서 벌어지는 일을 다룬 <총각 선생>(1972)등을 연출했다. 그녀는 감독보다 배우로서의 인지도가 높은 사람이다. 후학들에 의해 여성감독으로서 다시 발굴되면서 감독 최은희로 재인식되고 있지만, 감독으로서 확실한 입지를 굳혔다고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배우로서의 대성이 감독으로서의 성공을 막은 경우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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