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박구 - 나의 아버지 박구 감독

by.박경삼(명지대 교수,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교장) 2008-11-11조회 1,260

박구 감독님은 나의 아버지이자 나에게 영화 예술의 혼을 불러 넣어주신 스승이시다. 또한 아버님의 생애는 처절했던 우리나라의 근대사 만큼 인생의 시련속에 예술가로서 긍지를 버리지 않고 살아오신 분이기도 하다 음악가로, 이 나라 가극의 선구자로, 사진작가로 그리고 영화 연출가로 변신하는 아버님의 모습은 감히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화려한 예술가의 멋진 모습이였다 생각하며 이 글을 통해 思父曲의 마음으로 나의 아버지 박구 감독님을 회고한다. 박구 감독님은 1911년 함경남도 함흥시 산수동에서 청염한 유학자이신 박치근 의 5남매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강점이 시작된 이 땅의 선대들이 그랬듯이 가난과 고통 속에 얼룩진 가슴속에 억눌린 한은 소년 창석(박구감독의 본명)의 감성을 발전시키는데 큰 계기가 되었다.



16세의 나이로 고향 함흥을 떠나 홀 혈 단신으로 일본 동경으로 건너간 이유는 보다 넓은 세계에서 예술가가 되어 보겠다는 집념이 발동한 까닭이었다 난생처음 일본 동경에 온 소년 창석은 이국 생활의 우여곡절 속에 동경음악전문학교에 다니며 크라리넷을 전공한다 당시 일본 음악계의 크라리넷 명 연주자였던 와다나베의 수제자가 된 아버님은 열심히 연주법을 터득하여 마침내 어엿한 크라리넷 세션맨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후 일본빅타레코드사의 전속 연주자로 활약하며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재즈에 심취하여 당시 동경의 재즈구룹무대에 참여해 연주자로 경험을 쌓은 후 27세의 나이로 경성으로 돌아온다 귀국후 역시 빅타레코드사의 지점 책임자가 된 후 조선에서 처음으로 창단된 재즈 오케스트라 '히비끼'를 창단 1935년대 재즈를 이 땅에 접목시키는 선구자의 역할을 하셨다.



그 후 빅타 가극단을 인수 반도가극단으로 이름을 바꾸어 당시로는 드물게 민족시대극을 전문으로 하는 가극을 상연하게 된다 당시 반도 가극단의 레퍼토리는 '견우직녀''''심청전''장화홍련전''콩쥐팟쥐''에밀래종'등 우리 민족의 화려한 야사만을 골라 가극으로 제작했다 그 이유는 일본어로 강제되는 문화속에 유일하게 우리의 자존심을 지켜가기 위해선 조선어 사용이 시대극에 한하여만 가능했던 맹점을 활용 하셨기 때문 이였다 아버님의 민족 색채는 반도가극단의 단장으로 시대극 고집에서 자명하게 들어 나있다 특히 반도가극단은 우리나라 연기자의 산실로 백성희,허장강,김희갑,김승호,장치희,서혜영 등 유명인을 많이 키워냈으며 반도가극단 출신이 아니면 행세를 못할 정도로 많은 배우가 양산되었다. 영화의 본격적인 출현으로 사양길에 접어든 가극은 풍전의 등화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 후 아버님은 평소 좋아했던 사진촬영의 실력으로 쉽게 영화에 입문하게된다 우리나라 사진작가협회 창단 발기인으로 영상에 남다른 이론과 실기가 능숙하셨던 이유로 영화계 진출이 가능하셨다 '자유부인 (속)'을 필두로 반도영화사의 작품이 선을 보이고 국내에선 처음으로 해외로케이션 작품인 '낙엽'으로 필리핀 올로케이션을 감행 한 것으로 세중에 관심을 모았다고 기록되어있다 그 후 인생극장, 백설공주,식모등 고인이 되시기 전 까지 20여 작품을 제작감독 하셨다.



1970년 초 한국영화법의 개정으로 인해 영화제작의 자유가 구속받으며 아버님은 제작에서 손을 놓으셨다 자의든 타의든 열악한 영화제작여건에서 작가가 영화를 마음껏 만들 수 없는 시대환경을 항상 염려하시던 아버님의 한을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1975년 마지막 작품으로 다큐멘터리 한일합작인'이향에 지다'라는 작품은 한 고려 도공의 비극을 쫏는 르뽀르타쥬형식의 영화로 외인들에게 끌려간 도공을 통해 우리민족의 한을 묘사한 작품으로 당시 일본에서는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작품으로 아버님의 유작인 샘이다 그러나 지금 그 필림 원본의 행방을 알 수 없어 안타까울 다름이다. 



스승으로서의 아버지......



내가 16살이 되던 해였다 아버님은 항상 사진을 찍으시고 나에게 암실 일을 맡기셨다 난 곧잘 사진을 현상하고 인화 작업을 했는데 하루는 내가 사진을 찍겠다고 카메라를 사달라고 졸라댔다 아버님은 심사숙고 끝에 카메라를 한 대 주셨는데 난 불만 이였다 다름아니라 아버지가 주신 카메라는 연동이없는 구식 주름상자 35미리 카메라인 독일제 '레티나1'이였다 촬영경험이 없는 나에게 그 카메라는 너무 어려운 것 이였다 특히 이 카메라는 초점과 노출을 목측으로 설정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후 몇 달이 지나 나는 아버지가 주신 카메라의 뜻을 알게 되었다 기본원리를 중시하는 아버님의 가르침은 묵시적이었고 내 스스로의 연구만으로 터득해야 한다는 자력을 키워 주신 것이다 난 그 후 베트남전선의 종군카메라맨으로 활약하며 아버님의 주름상자 카메라의 철학으로 살아 귀국했다 난 특히 아버님을 좋아했고 아버님 역시 나를 사랑하셨다 밤이 가는 줄도 모르고 꼬박 예술에 대한 강의로 날을 밝히던 그 옛날이 오늘 나를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아버님은 이론가였다 그리고 노력가였다 7순이 넘어서 까지 영어 콘사이스를 뒷 주머니에 넣고 다니시며 학문에 대한 열의를 보이셨던 그 분의 열정은 지금 생각해도 존경이 갈 다름이다.



아버님은 우리영화계에서 명장감독은 아니셨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멋을 아는 명감독이셨다는 것은 아버님의 후배들에게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때로는 진고개 신사로 후배들의 어려움을 위해 자신을 던저 도와주시던 자상한 모습은 영화계에 유명하다 .영화 감독으로서 감독협회를 창설 회장을 맡으셔 감독협회의 기초를 이뤘으며 또 영화인으로서 영화인협회장 서리를 맡으시는등 한국영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70년 영화공로자가 되시기도 하셨다 나는 항상 아버지의 이러한 모습이 부럽고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아버지가 현장에서 내뿜는 레디고의 함성에 도취해 공부도 다 버리고 촬영장으로 뛰어가곤 했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아버님이 고인이 돼신지 18년이 되어 온다.



1984년 내가 미국에 유학을 하고 있던때 부고를 받고 허탈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예술가로서 아버지, 인간으로서 나의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 하시고 이 세상에 안 계시다는 것을 생각하니 난 갑자기 그리움이 사모 친다 아버지를 뒤이어 같은 길을 가고 있으나 아직 이렇다할 작품 하나 내지 못한 것에 난 늘 마음이 죄스럽다 그러나 언제인가는 당신이 가르쳐준 영화예술의 진수를 아버지의 무덤 앞에 꼭,꼭 내놓으리라 다짐하며 오늘 이 뜻깊은 나의 아버님 작품 회고전에 다시 한번 내 아버지의 멋있는 잔상을 새겨 보려 한다.

박경삼(명지대 교수, 한국애니메이션고등학교 교장)/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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