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티 뉴스, 한미동맹의 기록 (1) (계속)

2023-11-17 ~ 계속
리버티 뉴스, 한미동맹의 기록 (1) (계속)
한국영상자료원은 2012년부터 2년 간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와 함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 소장 중인 ‘리버티 뉴스' 필름 624릴(총 620회차)을 수집, 보존 중이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이하여 이 중에서 당대 흐름을 이해하기에 좋다고 판단되는 20회분을 선별하여 2차에 걸쳐 VOD 기획전으로 순차 공개한다. (2차 바로가기)

뉴스릴과 '리버티 뉴스'에 관한 전반적인 배경을 알고 싶다면 아래 항목을 눌러 읽어보기 바란다. 이어지는 각 영상에서도 같은 방법으로 관심 있는 개별 소식의 자세한 내용을 참고할 수 있다.
한미동맹 70년의 불가사의국제관계에 관한 불변의 법칙. 국가는 국익에 따라 행동한다. 그리고 그 누구도 이에 대해 비난할 수 없다.‘국가 간의 우정’이라든지 ‘인도적인 원조’라는 다분히 전략적인 수사들은 대중이 이 냉혹한 현실을 외면하거나 단순히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것일 뿐, 국제관계의 비정함은 엄연히 존재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한국의 관계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적'인 정서가 개입되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가 10년을 이어갈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데, 복잡한 시계 장치처럼 수많은 요소와 변수가 맞물려 돌아가는 현대의 국제 정세 속에서 두 국가가 70년 동안 동맹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심지어 첫 30여 년 간 전방위적으로 지속된 미국의 대한원조는 한국이 회생 불능의 상태에서 기적적으로 재건하여 소위 선진국의 반열에 들어서는 데에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매 순간 두 나라의 국익을 위해 결정하고 협력하다 벌써 70년 째 함께 하게 되었을 뿐, 결코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그리고 다행히도 이 동맹관계는 양국 모두는 예상보다 더 좋은 결과를 안겨다 주었으며 동북아시아의 안정에도 크게 기여했다.
뉴스릴, 세계를 설득하라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세계 질서를 재편하고자 했고 냉전의 형태로 최소한 45년 동안 치열하게 대립했다. 이 과정에서 미국은 제국주의의 잔재를 걷어내고 전쟁의 폐허에서 재건하는 것을 돕는 ‘선의의 주체’로서 세계 각지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어쩌면 이것은 장기적인 관점의 투자였고 세계사에서 처음 있는 초대형 실험이었다. 문제는 제 아무리 미국이 경이로운 수준의 경제규모와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사상 최강대국이라고 해도 전 지구를 대상으로 국력을 쏟아붓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미국의 각종 구호, 원조, 차관은 해당 지역이 미국의 리더십과 비전에 동조하고 자국에 대한 개입과 관리를 수용하며 빠른 경제자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호응한다는 전제 하에 의미가 있었다. 이를 위해 미국 해외공보처(USIA)는 전 세계 76군데의 미국 공보원(USIS)을 통해 다각적인 홍보 활동을 전개했는데, 그 중 가장 효과적이었던 홍보 수단이 바로 뉴스릴이었다.
‘리버티 뉴스’가 기록한 것들주한 미 공보원(USIS-Korea) 산하 리버티 프로덕션은 1952년 5월 19일 <리버티 뉴스 제 1호>를 시작으로 1967년 5월 30일 721호까지 장장 15년 동안 ‘리버티 뉴스'를 제작했다. ‘리버티 뉴스' 시리즈는 한국전쟁 기간 중에는 보름 주기로, 전후에는 매 주마다 창원의 상남영화제작소에서 제작, 공개됐다. TV 방송의 영향력이 아직 미약하던 1960년대 중반 이전까지 ‘리버티 뉴스'는 지역 상영관, 문화원 및 미 공보원 영화과와 한국인 순회업자를 통해 남한 전역에 배급됐다. 보통 10여분 내외의 분량에 국내소식과 해외소식이 차례로 수록됐는데, 한미군사동맹의 굳건함이라든지 대한원조의 현황과 성과를 주로 다루면서도 노골적인 프로파간다를 지양하고 당시 한국인들에게 균형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구실을 했다. ‘리버티 뉴스'가 시대를 기록한 영상으로서 의미있는 점은 장기간 지속적으로 당대의 주요 핵심을 건드렸다는 것이다.
‘리버티 뉴스’ 맛보기리버티 뉴스'는 한미동맹과 그로 인해 전개됐던 구호, 원조 사업들을 다층적으로 확인하고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기에 매우 좋은 영상들이다. 아울러 조금 더 풍부한 맥락을 조사하고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적극적인 감상자'들이라면 ‘리버티 뉴스'가 던져 주는 단서들이 좋은 시작점이 될 것이다. 특히 원조를 둘러싼 역학관계는 시혜자와 수혜자 간의 단순한 단방향 관계가 아니라 미국의 국방부, 국무부, 의회, 한국 정부 당국 및 기업가, 유엔의 원조 관련 조직들, 미국 및 국제 민간 원조 단체들은 저마다의 입장과 이해관계를 두고 때론 줄다리기를 하고 때론 타협하는 복잡한 양상을 띄었다는 점에서 자못 흥미롭다. 물론 ‘리버티 뉴스'는 그런 복잡한 내막들을 매끈하게 봉합하여 짧은 단신으로 제공됐고,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요약본으로서 충분하다.
상영본에 관한 참고 사항⚠‘리버티 뉴스'는 대체로 국내소식과 그에 이어지는 해외소식으로 구성됐다. 이번 기획전의 마지막 영상인 631호는 이례적으로 해외소식이 국내소식보다 앞에 삽입됐다. 한국영상자료원은 뉴스릴의 경우 각 소식들의 한 회차 내 위치와 편집 흐름을 보존하기 위해 가능하면 소식별로 분할하지 않고 전체 영상으로 공개한다는 방침이다. 다만 해외소식은 대체로 당시 USIS-Korea가 미국의 허스트 메트로톤 뉴스릴(Hearst Metrotone Newsreel)의 푸티지를 가져와 사용했던 것으로 확인되므로 저작권 문제로 본 영상에서 제외했음을 알려드린다.

⚠ 한국영상자료원 보유 자료 기준으로 ‘리버티 뉴스'는 384호부터 721호까지 영상 도입부에 공개 시기에 대한 정보를 표기했다. 수록된 내용의 시점과 비교해 보면 이 정보의 표기 형식은 [월] [주] [연도 끝 자리]인 것으로 보인다. 이를테면 “- 6 2 1-”은 “6월 / 둘째 주 (또는 두 번째 호) / 1961년"을 의미한다. 이 정보는 표기가 생략되기도 하고 순서나 형식이 일시적으로 바뀌기도 했다. (앞의 예에 적용한다면 “- 1 2 6 -” 또는 “66-6-1”)

⚠ 수집된 필름은 대체로 네거티브 필름이므로 색보정 작업이 되어 있지 않다. 일부 프린트 보유본을 확인해 보면 다양한 품질의 소스를 합본했다는 특수상황 또는 신속한 보도를 위한 짧은 작업기간 때문에 제작 당시 아예 색보정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어 보인다. 그러나 화면이 어두워 촬영 시간대를 오해할 여지가 있거나 정보가 식별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원활한 감상을 위해 기초적인 색보정 작업을 거쳐 영상을 공개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이 어두운 경우는 실제 촬영 시간대가 야간 또는 새벽이었기 때문에 밝기를 그대로 두었음을 알려드린다.


상영작품
  • 01. 리버티 뉴스 제445호 , 1962
    ¶ 1962년 2월 셋째 주 소식
    445-01. 우박 2호 작전‘우박 2호 작전' 훈련은 한국군 3개 사단과 미국, 터키, 태국 등 주한 UN 3개국 부대의 75,000명이 참가한 대규모 동계모의군사훈련으로서 1962년 2월 5일부터 8일까지 강화도 지역에서 실시되었다. 최초의 한미 연합 군사훈련으로 알려져 있는 1954년의 ‘포커스 렌즈’ 훈련 이래로 이런 대규모 합동 훈련들은 북한의 남침에 대한 대응 태세를 점검하고 미군와 UN군의 군사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것이 실질적인 전쟁 억제 효과가 있었는지에 대한 견해는 분분하나 아직 전쟁의 기억이 생생한 한국 국민들에게 한미군사동맹이 굳건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줌으로서 사회 안정을 기하는 효과는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통상 1962년의 이 훈련이 ‘우박작전'으로 불리고 있으나, 실은 1958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실시됐던 ‘우박작전'에 이은 2호 작전이었다.

    445-02. 울산공업지구 기공식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과 군사정권은 1962년 1월 5일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26일 경남 울산 지대를 공업지구로 지정한 데 이튿날 울산공업지구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이 영상은 2월 3일의 기공식에 관한 소식이다. 사무엘 D. 버거 주한 미국대사의 축사 내용을 중심으로 칼 빙거 서독대사와 송요찬 내각 수석 등이 등장하지만 박정희 의장은 발파 단추를 누르는 손만 촬영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같은 소식을 다룬 대한뉴스에서 박의장이 전면에 부각되고 함께 참여한 기업인들 모습도 함께 등장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런데 울산에 정유, 비료, 제철공장을 세우고 중공업을 육성하겠다는 이 야심찬 계획은 당시 가장 조건이 유리했던 미국국제개발처(USAID)의 차관을 유치한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는 미국 케네디 대통령 행정부가 새로운 대외원조법(1961년 제정)에 근거하여 대한 원조 정책의 재편을 모색하던 과도기였으며 USAID도 울산 공업 단지의 운영 주체, 자본 구조, 제조 방식 등 여러 부분에서 한국의 계획과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협의에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결국 울산공업지구 건설은 1962년 말 통화개혁의 실패와 인플레이션, 외환위기의 우려 속에서 한국이 USAID의 의견을 수용한 이후 1964년 즈음부터 본격화됐다.

    445-03. 국토건설단 창단1962년 2월 10일 오전 11시에 중앙청 홀에서 거행된 국토건설단의 창단식 장면이다. 국토건설단의 전신은 장면 내각이 ‘국토의 복구와 건설 및 실업자 구제’ 목적으로 1960년 11월 말에 창설한 ‘국토건설본부'로서 병역을 필한 30세 미만의 대학졸업자를 대상으로 모집하도록 되어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은 병역 미필자들을 양성화하고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일환으로 추진되는 건설 현장에 투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국토건설본부’를 ‘국토건설단’으로 변경하여 창단시켰다. 국토건설단원은 건설원과 기간요원으로 나뉘는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건설원은 현역병에 준해 군 형법의 적용을 받았고 28세 이상의 병역 미필자가 18개월 이상 복무하면 예비역의 자격을 부여했다. 국토건설단은 산업도로, 철도, 댐 등의 건설에 투입되었으나 작업 부진, 군대식 운영에 대한 반발, 집단 늑막염 사태, 월동 준비 예산의 부족 문제 등이 불거져 결국 이듬해 1월 1일을 기해 해산됐다. 영상에는 조성근 국토건설청장의 식사, 송요찬 내각수반의 훈시, 선언문 낭독 및 국토건설단기 전달식이 이어진다. 김동하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의 모습도 나오지만 그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격려사를 대독하는 장면은 포함되지 않았다.

    445-04. 미대사 박 의장께 책선물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1962년 2월 7일 신임 인사차 예방한 윌리엄 L. 마지스트레티 주한 미국 부대사와 필립 하비브 정치담당참사관을 의장실에서 영접했다. 이 자리에서 사무엘 D. 버거 주한 미국대사는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사인한 대통령의 1961년도 연설집 “To Turn the Tide”를 박정희 의장에게 전달했다.

    445-05. 전기줄 공장대한전선주식회사는 설경동이 적산기업인 조선전선주식회사 시흥공장(현 서울 금천구청 인근)을 불하받아 창립한 한국 최초의 종합 전선 제조 회사이다. 이 영상은 시흥공장이 미국 원조자금으로 서독의 현대식 시설을 도입하고 서독, 일본 등지에서 기술을 습득한 전문 인력에 의해 가동되어 한국전력주식회사, 체신부, 미8군 등 국내 전선 수요처에 납품하는 것은 물론 해외 수출도 계획 중이라고 안내하고 있다. 재정 및 기술원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자립’하고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무역 질서에 한 일원으로 편입되는 일련의 과정은 미국의 대외원조 정책의 지향점과 맞닿아 있었다. 더욱이 대외원조법에 근거한 미국의 새로운 대외원조 정책에서도 전력, 통신 산업 분야를 우선적으로 고려했던 점을 감안하면 대한전선주식회사의 사례가 잘 들어맞기도 하다.

    445-06. 대구의 고아결연1962년 1월 20일, 대구여자중학교 강당에서 경상북도 지역 126명의 고아를 양자·양녀로 보내는 합동결연식이 열렸다는 소식. 한국전쟁으로 수많은 고아들이 생겨났지만 한국사회는 이들을 돌볼 여력도 기반도 부족한 상태였으므로 한동안 주한미군 및 국제민간원조 단체들의 많은 도움을 받았다. 본 소식은 지역사회에서 고아 문제 해결을 위한 적극적인 사업을 전개한 하나의 모범 사례로서 편성된 것으로 보인다.
  • 02. 리버티 뉴스 제474호 , 1962
    ¶ 1962년 9월 둘째 주 소식
    474-01. 순천의 수해1960년대까지는 한국전쟁으로 파괴됐던 사회,경제 기반을 안정화하는 것이 시급했으므로 재해 방비 및 대응 체계, 기반 시설을 마련하는 것이 후순위로 밀릴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재난, 재해 현장에는 미군이 함께 투입되어 구조와 복구작업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또한 피해를 입은 민간인들에 대한 사후 구호에도 미국 및 국제 민간원조단체들의 도움이 있었는데, 영상에는 1962년 8월 28일 오후 5시 경 전라남도 순천시의 저수지 둑이 집중 호우로 인해 무너지면서 많은 사망자와 수재민이 발생하자 주한 미 대사관, 주한 미 공보원,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Korea) 측에서 긴급 구호 자금을 모아 대한적십자에 전달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474-02. 부켄 교수에 명예 법학박사고려대학교의 경영학 교육 체계 발전에 공헌한 것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고려대 유진오 총장이 레슬리 J. 뷰켄 워싱턴대학 교수에게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수여했다는 소식이다. 1957년 12월, 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Olin Business School)은 미 국무부와 고려대, 연세대 대상의 경영교육 현대화 원조 계약을 체결하여, ‘Korea Project’로 명명한 6년 간(1958~1964)의 원조 및 교류 활동을 진행했다. 뷰켄 교수는 이를 위해 파견단에 포함됐다.

    474-03. 박의장 전라도 시찰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전라도 지방 시찰 소식. 당시 신문보도를 참고하면 1962년 8월 22일에서 24일까지 진행됐으며 영상에는 24일의 일정이 담긴 것으로 파악된다. 영상에 나오는 화순탄광은 1930년대부터 채굴을 하던 전남 화순군 동면 복암리 일대의 광산 중 종방탄광과 남선탄광이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통합된 호남 최대 탄광으로서, 석탄의 안정적인 공급이 우선 과제였던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여건 등의 고질적인 문제로 인해 1960년대까지 파업이 계속되는 등 질곡의 역사를 거쳐오다가 2023년 폐광했다. 호남비료공장은 당시 충주비료공장에 이어 두 번째로 건설되는 비료공장으로서, 인근 화순탄광에서 연료를, 영산강에서 공업용수를 수급하기 원활한 입지조건을 지닌 나주에  착공했다. 그러나 여러가지 문제에 부딪혀 건설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었고 박의장이 방문했을 때는 아직 준공을 3개월 여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474-04. 통계 조사경제기획원 통계국이 미국에서 빌려 온 ‘전자계산기’를 사용하여 인구조사, 취업자 누계, 국가 자원 등의 통계를 내고 있는 장면이다. 더 이상 수기로 작업하지 않고 최신 기술을 사용하여 과학적으로 국가 업무를 처리하고 있으며, 이를 미국이 돕고 있다는 메세지를 담고 함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화면에 나오는 ‘전자계산기'는 IBM사의 ‘IBM 24 카드 천공기’ 모델로서 통계 수치를 키패드로 입력하면 이를 카드에 천공해 주는, 즉 종이 문서를 천공카드로 옮겨주는 것까지만 하는 장치였다. 다시말해 편철 문서의 수치들을 엑셀에 일일이 옮겨적는 것과 유사한 일종의 디지털화 작업을 하고 있는 장면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이렇게 천공카드로 옮겨진 수치들을 가지고 연산까지 하는 것은 이후 1967년 ‘IBM 1401’ 모델을 월 임대료를 주고 대여하면서부터 가능했다. 보통 이를 한국 최초로 컴퓨터가 사용된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참고로 한양대에서 이보다 앞선 1964년 5월 27일에 대형 컴퓨터를 최초로 제작했다는 소식도 있다.) 신문기사 등을 보면 디지털 방식으로 보다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통계관리를 해야 한다는 한국 측 관계자들의 문제의식은 전부터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미 대한원조 당국도 미국 민간기업을 대동하여 이미 1950년대 중후반부터 한국과 협상을 진행했다. 실제로 미국의 최신기술(컴퓨터)를 월 임대하여 활용한 기록은 신문기사 기준으로 1958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474-05. 핸드볼서울 운동장에서 열린 한일 친선 핸드볼 경기 대회 소식. 일본고교와 동성고등학교와의 대전에서 일본에 패배했다.
  • 03. 리버티 뉴스 제483호 , 1962
    ¶ 1962년 11월 둘째 주 소식
    483-01. 한미 차관협정한국의 김유택 경제기획원장과 J. H. 에드워드 주한미국경제협조처(USOM/Korea) 부처장이 디젤기관차 도입을 위한 협정을 체결했다는 소식이다. 이제 미국의 대외원조정책 변화에 따라 군사원조가 결합된 응급구호와 무상원조의 시대가 저물고 미국국제개발처(USAID)의 차관을 매개로 하는 경제원조의 시대에 돌입했음을 알 수 있다. 파괴된 선로의 복구 및 확장, 철도 동력의 현대화(증기에서 디젤로) 및 기관차 증량은 산업용 화물 운송, 산업용 석탄 등의 부족 등과도 연결되는 중요한 문제로서 1962년 교통부 사업계획에서도 대부분 주요사항으로 포함돼 있었다.

    483-02. 건설소식순천에서의 주택 신축 현장과 시찰 중인 박정희 의장의 모습. 이해 여름에 발생한 최악의 수해로 인해 보금자리를 잃은 시민들에게 거주공간을 마련해 주는 것은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일이었다. 각종 성금, 원조금을 모아 군민 합동 건설이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다. 1962년 10월 30일 오후 2시 반 경에 거행된 광주공군기지 기공식 소식이 이어진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경상북도 잠종장의 준공식 관련 소식은 1960년대 중반 한국 잠업의 전성기를 예고하는 듯 하다.

    483-03. 해군 소식해군사관학교 1962년도 명예중대 명명식 풍경과 2차대전에 참전했던 잠수함이 한국 해군 훈련에 협조할 예정이라는 소식. 해군사관학교는 전통적으로 매 평가성적, 훈련실적, 국군도수체조, 군가경연, 구보, 축구 및 수영 경기 등 여러 부문의 경쟁을 통해 ‘명예중대'를 선발하여 생도간의 단결을 도모하고 훈련 동기를 북돋는다. 명예중대에게는 명예중대 깃발이 수여된다. 이와 유사한 내용은 미군 관련 기록영상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미군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도 있다.

    483-04. 미국 학생극단미국 오레곤 대학교의 학생극단이 서울과 대구에서 한국 학생들을 위해 공연을 하는 영상.

    483-05. 스포쓰서울 운동장 특설 링에서 미국의 레이 페레스 선수와 우리나라의 강춘원 선수의 친선 복싱 경기를 펼쳐 강선수가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문교부에서 발기한 학생경조대회(1962.10.26.~28. / 경기결과 신문보도) 풍경이 이어진다.
  • 04. 리버티 뉴스 제529호 , 1963
    ¶ 1963년 9월 넷째 주 소식
    529-01. 대구에 불영상에서 구체적으로 소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화재가 발생한 건물은 일제강점기부터 대구역 부근에 있었던 대구좌(대구극장)이다. 이 화재는 1963년 9월18일 오후 1시 40분 경에 발생하여 건물이 전소됐다. 이후 1966년 9월 25일 신축 개관하여 운영되다가 2002년 11월 4일에 폐관했다. 한국과 미군 소방대원이 공동 진화하는 모습이 보인다.

    529-02. 미국 육군장관 내한반스 미국 육군장관이 1963년 9월 18일부터 사흘 간 한국군 시찰 등의 일정을 소화하는 에 김포공항을 통해 입국해 사흘 동안 한국에 머물러 한국군을 시찰하는 등 일정을 소화하고 기자회견하는 모습이다. 주한미군 감축은 계획된 바 없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긴다. 미국의 새로운 대외원조정책은 군사원조를 줄이는 대신 경제원조 비중을 높이는 것을 주요 골자로 했는데, 이는 한국에서만큼은 큰 반발을 불러왔으며 미국조차도 국방부와 국무부 사이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책과 현실의 불일치 때문에 군비 축소가 지연되고 원조액은 줄어들거나 원조 결정이 함께 지연되는 등의 문제가 한동안 있었다.

    529-03. 공업계 소식서울의 일신공업사에 고주파 용접기 등 새로운 시설들이 설비되어 제품 생산 시간이 단축됐다는 보도.

    529-04. 4-H 방문객한국농촌청소년사업협조위원회가 주최하는 국제농촌청소년교환사업을 통해 1963년 4월 아이오와 주립대 학생인 케이스 로저스가 한국에 와서 농촌생활하는 모습. 4-H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되어 해방 후 국내에 소개됐고 농촌진흥청이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전개됐다. ‘4-H’라는 명명은 머리(Head), 마음(Heart), 손(Hands), 건강(Health)의 앞 글자 ‘H’를 의미하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지', ‘덕', ‘노', ‘체'로 번역됐다. 원래는 농촌 청소년 대상의 운동 및 학습단체로 시작했으나 이후 이촌향도 현상에 따라 성격이 수차례 변하기도 한다. 연령대  학습한다. 1960년대는 4-H 운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이고, 자발적인 농촌 기술 개량, 근면과 협동 등의 덕목을 농촌사회에 함양하는 역할을 했다. 이는 새마을 운동의 성격과도 맞닿아 있으므로 실제로 많은 4-H 클럽 출신들이 새마을 운동을 선도하여 활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29-05. 씨름 대회대한씨름협회와 한국일보사 주최로 1963년 10월 19일부터 경복궁 특설경기장에서 열린 제6회 전국장사씨름대회 경기 모습이다.
  • 05. 리버티 뉴스 제536호 , 1963
    ¶ 1963년 11월 셋째 주 소식
    536-01. 유솜처장 귀임1964년의 대한 경제원조와 관련한 협의차 1963년 10월 18일에 미국으로 출국했던 USOM/Korea(주한미국경제협조처)의 제임스 S. 킬렌 처장이 11월 6일 귀국했다는 내용이다. 이 시점의 이슈는 미국의 대한원조 규모 축소 여부, 한국의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재정안정성 확보 등이었다. 세계 각지의 USOM은 원조 수혜국에 파견된 현지 사절단의 개념으로 운영됐으며, 1961년 이후로 미국 워싱턴의 USAID(미국국제개발처)는 USOM들의 총괄 본부의 성격을 띠었다. 예를 들어 킬렌이 1962년 3월 경 박정희 군사정부의 울산공업단지 조성 계획에 대한 긍정적인 의견을 담은 예비 보고서를 USAID로 제출했고, USAID가 이에 대해 추가 정보를 요청하는 회신을 보냈던 것은 이런 체계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USOM/Korea는 1963년 7월에 신설된 한미경제협력위원회를 통해 경제기획원과 대한원조자금 및 물자의 사용에 관한 서로의 입장 차이를 조율했다.

    536-02. 팔 데이 -친선의 날-영상에 별다른 설명은 없지만 다른 해의 신문기사를 참고하면 ‘USO 팔 데이’(USO Pal Day)는 미국위문협회(USO)가 주최하여 매년 11월 경에 해외 파견 중인 미군 병사를 현지 가정에 초대하여 우호를 증진하고 노고를 위로하는 행사이다. 본 영상은 제8회 행사의 일환으로 1963년 10월 31일에 미군 모범병사 3인이 조선일보 방일영 사장의 집에 초대받아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과 또 다른 병사들이 이화여대를 견학하고 부채춤 등 학생들의 무용 공연을 관람하는 광경을 담고 있다.

    536-03. 종합 어시장 준공1963년 11월 1일 당시 국내 최대 규모의 현대식 어시장인 부산종합어시장 수산센터가 개장했다는 소식. 부산종합어시장은 국제협조처(ICA)의 25만 달러 원조 결정에 따라 1957년 설립계획이 수립되고 1960년 10월 부지가 확정된 데 이어 이듬해 6월부터 건설에 착수하는 등 여러 해에 걸친 과정을 거쳐 개장하게 됐다. 이렇게 장기간이 소요된 원인은 어시장에 적합한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하는 부지를 검토하는 문제가 쉽지 않았던 것에 있다. 심지어 부지가 결정된 이후에도 부산시와 해운업계를 중심으로 부지 적격성 논란이 계속됐다. 결국 부산종합어시장은 개장한지 3년 만인 1966년부터 다시 남항 이전 검토를 시작하여 1971년 1월에 남항 이전 공사가 완료됨으로서 ‘부산공동어시장'이라는 이름으로 새출발하게 된다. 이상의 14년 간의 여정을 통해 현대식 어시장 건설이 얼마나 어려운지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수산업이 주요 수출산업이자 국민건강 증진을 위한 산업으로서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됐는지 알 수 있다.

    536-04. 지방소식마산에서 열린 종합문화제, 전라남도에서 열린 도내 4-H 경진대회 소식이다. 마산의 종합문화제는 국제친선 목적의 가장행렬이 있었는데, 다국적 문화를 나타내는 행렬 중에 ‘가족계획’, ‘단란한 가정', ‘부모의 도리' 등의 현수막이 등장해 이색적이다.

    536-05. 대학 카니발서울대학교와 이화여자대학교 학생들이 서로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창경궁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대학제’를 열었다는 소식.

    536-06. [캠페인] 결핵예방 강조구간1963년 11월 6일부터 12일까지의 결핵예방 강조주간을 맞아 예방접종과 집단검진, 환자의 격리치료 등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캠페인 영상이다.
  • 06. 리버티 뉴스 제550호 , 1964
    ¶ 1964년 2월 넷째 주 소식
    550-01. 미국대사 관훈클럽서 연설사무엘 D. 버거 주한 미국대사가 언론인들의 모임인 관훈클럽에서 한 연설의 주요 장면들이다. 그는 이 자리에서 주한미군 축소 우려를 불식시키고 대한원조의 산업적 성과를 강조하는 한편, 서독 등 여러 나라의 차관 유치와 한일관계 정상화의 당위성을 연결시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했다. (참고로 이듬해 한일기본조약이 체결된다) 이 연설은 차관, 다자성, 군사-경제 분리 등 미국의 새로운 대외원조 원칙과 잉여농산물 원조 등 당시의 복잡한 키워드가 집약되어 있고 미국이 이에 대해 수혜국인 한국에 전달하고 설득했던 논리나 방식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550-02. 서강대학 졸업식1964년 2월 8일, 서강대학교 제1회 졸업식 영상이다. 존 데일리 서강대 2대 학장이 졸업식들에게 학위를 수여한다.

    550-03. 기동차와 뻐스 충돌1964년 2월 12일 창원군에서 발생한 기동차와 버스 충돌사고 소식. ‘기동차'는 증기를 동력으로 하는 기차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550-04. 한일 푸로레슬링1964년 2월 13일 장충체육관에서 한일프로레슬링대회가 열렸다. 이 영상은 일본 아라쿠마, 토다 두 선수와 한국 장영철, 우기환 두 선수의 경기 장면이다. 리버티 뉴스의 특징 중 하나는 한국인의 정서를 세심히 고려했다는 것이다. 모든 내레이션을 한국어로 더빙했다든지 대일감정을 자극할 만한 일본 소식을 가급적 전하지 않았던 것이 그 증거이다. 단, 앞서 한일 친선 핸드볼 경기 소식을 봐도 스포츠 소식의 경우는 어느 정도 예외였다. 그런데 알려진 바로는 정작 미국 본토의 국제공보처(USIA)는 일본 소식을 한국에도 적극적으로 소개할 것을 권고했으나 주한 미공보원(USIS-Korea)이 국내 사정을 감안하여 제외했다고 한다.
  • 07. 리버티 뉴스 제557호 , 1964
    ¶ 1964년 4월 둘째 주 소식
    557-01. 미국 대사 원조에 대해 성명사무엘 디 버거 주한미국대사가 한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특별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미국의 대한원조 현황을 자막으로 보여주면서 미국의 대한원조는 계속해서 진행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557-02. 무제한 송전한국전력회사 진의종 부사장에 의하면 한국은 전력난에서 벗어났으며 무제한 송전이 가능하게 되었다고 한다. 분단 이후 남한은 북한의 단전 조치 등으로 에너지 안보 위기 의식을 절감하고 있었다. 석탄 채굴과 수급에 주의를 기울였던 것, 제1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댐과 발전소 건설을 우선적으로 추진했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557-03. 부활절부활절을 맞이하여 교회 성가대가 성가를 부르는 모습이다. 성바오로 보육원 어린이들도 수녀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성가를 부르고 있다. 또한 보육원 아이들이 부활절 달걀을 색칠하는 모습이다. 서울에 거주하는 미국 어린이들을 부활절을 맞이하여 나무 밑둥 등 여기저기 감춰진 달걀 찾기 놀이를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장면의 장소는 <Archives Korea : 1930-1940> 일부 장면에 동일하게 나오는 곳이다. 이러한 장면 비교를 통해 이 장소가 미 대사관 담장 인근임을 유추할 수 있다.

    557-04. 아시아 청소년 배구대회1964년 3월 30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아시아 청소년 배구 선수권대회 소식. 대만과 태국, 한국과 일본의 경기 주요 장면이 소개된다.
  • 08. 리버티 뉴스 제574호 , 1964
    ¶ 1964년 8월 둘째 주 소식
    574-01. 휴전 협정조인 11주년정전협정 11주년을 맞이해 한국전쟁을 회상하는 영상이다. 미국은 이 전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인지하고 있으며 강력한 군사적 지원을 통해 전쟁 억지력을 유지, 강화해 나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는 한국인의 안보의식을 고취하는 표면적인 목적 이면에 미국 원조정책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에 대한 미군의 영향력은 축소하지 않을 것이라는 메세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574-02. 나일론 공장 준공국내 두 번째 나일론 공장인 한일 나일론 공업 주식회사의 준공식 소식이다.

    574-03. 농업계 소식미국의 농촌 청년 교환 프로그램에 따라 미국인 2명이 한국 농촌에서 생활하는 모습과 성 이시돌 농촌개발협회가 공군의 협조를 통해 서울에서 제주도로 돼지 2천 마리를 공수해 왔다는 소식을 담고 있다. 성 이시돌 농촌개발협회는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 신부(한국명: 임피제)가 한라산 중턱에 마련한 성 이시돌 목장을 시초로 하여 1961년에 설립됐으며 육지에서 돼지를 사들여 양돈목장을 운영하고 이로서 빈곤에 허덕이던 제주도민의 경제적 자립 기반을 마련하는 사업을 전개했다.

    574-04. 스포오쓰부산 송도 해수욕장의 피서객 풍경, 체육교사와 군인들이 합동으로 수상 안전 교육을 하는 모습을 담았다. 당시 피서지 풍경에 대한 더 풍부한 내용은 KMDb 영화글에 소개되어 있다.
  • 09. 리버티 뉴스 제595호 , 1964
    ¶ 1964년 12월 다섯째 주 소식
    595-01. 한국 국민에게 보내는 브라운 미국대사 송년사윈스럽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가 한국 국민들에게 전하는 새해 인사를 담은 영상이다. 브라운 대사는 버거 대사에 이어 1964년 8월 14일 부임했다. 한국의 문화유산에 대한 찬사와 산업 발전 성과를 언급하고 있다.

    595-02. 새로운 선박 진수대한조선공사가 새로 건조한 한국 최대 화물선 ‘남성호'의 진수식과 교육, 연구용 실습선 ‘백경호', 그리고 참치잡이 어선 ‘화양호'에 대한 소개 영상이다.

    595-03. 인천-버뱅크 결연미국 캘리포니아주 버뱅크 시와 인천시 사이에 맺어진 자매결연의 일환으로 버뱅크 출신 주한 미군 병사들을 초청하는 행사가 열렸다는 소식.
  • 10. 리버티 뉴스 제631호 , 1965
    ¶ 1965년 9월 둘째 주 소식
    631-05. 한미 용역 계약 체결1965년 8월 6일 USAID(미국국제개발처)와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 사이에 한미용역계약이 체결됐다는 소식이다. 이로써 그간 일본에서 주로 해 왔던 미군 군용차량 및 발전기의 보수 용역을 한국에서 맡게 됐다.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는 일제강점기 말에 태평양전쟁에 투입될 일본 소형 잠수함을 건조하던 인천의 ‘조선기계제작소’가 그 전신이다. KMDb의 다른 영상에서 1948년 경의 잠수함 건조 도크 풍경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기계제작소는 해방 후 국가에 귀속된 이후 국방부와 상공부 사이에서 표류하다가 1963년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법'에 의해 국영기업 한국기계공업주식회사로 재출발했다.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한국 최대 기계공업 회사로서 자리매김했으나 경영악화로 대우중공업으로 인수됐다가 현재는 두산인프라코어로 이어져 오고 있다.

    631-06. 미국 차관 받은 방직 공장범양회사가 인조섬유 공장을 부산에 건립하기 위해 USAID(미국국제개발처)와의 차관협정을 했다는 소식이다.

    631-07. 원양 어선부산 대한조선공사에서 열린 원양어선 광명호 진수식 풍경이다. 아울러 영부인 육영수 여사가 직접 명명한 진달래호의 입수 장면도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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