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쪽의 이야기  앨리스 우, 2020

by.듀나(영화평론가) 2020-12-18조회 1,636
반쪽의 이야기 스틸
올해는 13편을 골랐다.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영화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빈 폴, 사마에게인데, 이들은 모두 작년 영화라고 한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빼면 내 리스트는 허망해질 것이고, 사마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에서 공장생산되는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회고조의 제2차 세계대전 영화들이 걱정되는 관객들은 빈 폴이 이 상황에서 얼마나 강력한 치료제인지 알 것이다.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을 보자. 남매의 여름밤벌새의 뒤를 잇는 올해의 한국 영화이다. 하지만 극장 바깥을 보면 난폭하고 정신없고, 충무로 내부에서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보건교사 안은영이 질주하고 있다. 인비저블 맨은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할리우드의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지, 이를 벗어나면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레디 오어 낫은 호러 영화가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다고 해서 뻔뻔스러운 장르적 즐거움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소년시절의 너는 동아시아 교육 시스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공감과 공포를 모두 느낄 수밖에 없는 폭탄 같은 멜로드라마다. 월드 오브 투모로우 에피소드 3: 앱센트 데스티네이션스 오브 데이비드 프라임을 만들면서 돈 허츠펠트는 21세기의 가장 훌륭한 SF 삼부작 영화를 완성했다. 작은 아씨들을 빼먹고 오래된 고전의 새로운 재해석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딕 존슨 이즈 데드에서 영화 만들기의 작업은 감독의 가족사와 아름답고 유쾌한 조화를 이룬다. 퀸스 갬빗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이전엔 아카데미를 노리고 만들어졌던 훌륭한 드라마들이 넷플릭스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

반쪽의 이야기를 해보자. 이 작품은 올해 본 영화들 중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 될 텐데, 그건 내 어린 시절 덕질과 관련있다. 어렸을 때 나는 요새 중고등학생들이 아이돌을 파듯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팠다. 실존 인물을 판 게 아니라 에드몽 로스탕이 자신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 재창조한 코쟁이 시인을 판 것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길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건 좀 무의미한 일이다. 어린 시절은 아무 것에나 심장이 찔리기 마련이고 그 상흔은 꽤 오래간다. 그냥 그랬다고 할 수밖에.
 

반쪽의 이야기는 내가 본 시라노 각색물과 파생물 중 최고다. 그리고 나는 꽤 많은 작품들을 보았다. 장 폴 라프노가 감독하고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나오는 시라노는 많이들 결정판으로 여기고 있지만 둔중하고 맥빠진 영화라 영 별로다. 호세 페러가 아카데미 상을 받은 마이클 고든의 할리우드 영화는 그보다 낫지만 좀 녹화된 연극 같다. 프레드 셰피시가 감독하고 스티브 마틴이 코쟁이 소방서장으로 나오는 록산느가 오히려 괜찮다. 마이클 레만의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은 성별을 뒤집은 사랑스러운 영화이다. 시라노 연애조작단은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지만 편지 대필이라는 설정만 남고 캐릭터가 빠져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오페라, 뮤지컬, 텔레비전 드라마, 라디오 각색물들이 있고 이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훌륭한 시라노 영화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만 읽으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구식 설정을 영화의 현대적인 설정 속에서 이치에 맞아 보일 수 있도록 개조하고 그 안에서 세 주인공들을 바보스럽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시라노를 만들어야 한다.

원작은 큰 문제가 없다. 원작이 나왔을 무렵에도 과거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무대극, 심지어 대사 대부분이 시인 운문극을 보면서 설정의 사실성을 따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새 시리노 이야기의 배경이 21세기 미국 고등학교라면 사정이 다르다. 

사실 반쪽의 이야기에서도 시라노의 설정은 아주 잘 맞지 않는다. 일단 지금은 아무도 종이 편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이건 영화가 대사를 통해 직접 언급하고 넘어가는 내용이다. 하지만 21세기의 변화한 사회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설득력 있는 시라노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의 새 시라노는 편지를 대신 쓰기도 하지만 모바일 문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 시라노를 만들어야 한다. 로스탕의 시라노는 코가 지나치게 컸다. (실존 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우린 외모지상주의 사회를 살고 있으니 외모의 핸디캡은 여전히 먹힌다. 하지만 원작이 백년 넘게 써온 소재 안에서 경쟁하기는 쉽지 않다.

반쪽의 이야기가 택한 것은 인종과 성별이다. 이 영화의 시라노는 중국계 동성애자 여성이다. 조금 뒤에 역시 넷플릭스에서 풀린 블라이 저택의 유령과 비교할 만 하다. 모두가 아는 고전 이야기의 주인공을 현대 또는 가까운 과거로 데려와 새로운 핸드캡을 주기 위해 퀴어 설정이 도입된 것이다.

단지 여기서 ‘선택’이라는 단어는 잘못 쓰였다. 이 영화를 쓰고 감독한 앨리스 우는 새로운 시라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인종과 성별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인종과 성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라노를 선택한 것이다. 미국에 사는 중국계 퀴어 여성인 감독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알마나 쉽게 시라노가 되는지 알고 있다. 반쪽의 이야기는 아무도 믿지 못할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조된 상황을 보자. 엘리 추는 사교성 없는 중국계 학생이다. 동양인은 자신과 아버지밖에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 모범생인 엘리에게 학교 미식축구 선수인 폴 먼스키가 접근해 온다. 폴은 엘리가 자기 대신 짝사랑하는 애스터 플로레스에게 편지를 써주길 바란다. 엘리는 이전부터 돈을 받고 다른 학생들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있으니 이건 또다른 아르바이트에 불과하다: 폴이 모르는 건 엘리 역시 애스터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정을 수정하면서 반쪽의 이야기는 원작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시라노는 자신의 아바타로 잘생긴 크리스티앙을 내세웠다. 둘은 모두 백인 남자로 그들의 차이는 당시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다. 시라노의 정신과 크리스티앙의 외모의 결합이라는 비유도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엘리는 시라노처럼 ‘자신과 같은 부류지만 더 잘생긴 누군가’를 내세우지 못한다. 반쪽의 이야기는 자신 또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판으로 ‘나’라고 칠 때 그 ‘나’가 고의적으로 실제 자신을 비껴가는 사람들.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지 못하고 아바타를 빌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대신 아바타로 등장하는 건 이성애자 백인남자다. 자신이 아닌 것의 총집합.
 

이건 굉징히 잔인하고 날카로운 코미디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쪽의 이야기는 그런 영화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길을 간다. 영화는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이 이야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글도 못쓰고 말도 못하며 생각이 단순한 폴도 어리석지는 않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좁은 생각 안에 갇혀 있다. 하지만 폴은 늘 자기 바깥으로 나간다. 처음엔 그냥 대필작가로 머리를 빌리려 했던 엘리와 친구가 되고 결국엔 엘리의 입장을 이해한다. 사기의 희생자로 그려지기 쉬운 록산느 역할의 애스터도 마찬가지다. 후반 설정을 잘 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엘리와 애스터의 대화에는 진짜 소울메이트를 만난 사람들의 흥분이 느껴진다. 디지털 시대가 일방적인 시라노의 편지 공격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로스탕의 시라노는 백인 남자 예술가의 자뻑 이야기다. 아무리 오랜 덕질 대상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시라노의 이야기는 비극적인 예술가자 자의로 감추고 있던 비밀이 죽음 직전에 밝혀지면서, 그 자뻑이 하늘을 찌를 때 끝이 난다. 하지만 남자 예술가의 일방적인 편지가 아닌 세 청소년의 열린 대화를 다룬 반쪽의 이야기는 더 성숙하다. 시라노와는 달리 이들에겐 미래가 열려있다. 그들은 이 소동이 끝난 뒤에도 계속 성장하면서 아직 어디로 흐를 지 알 수 없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엘리 추는 ‘나’가 자기자신인 글을 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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