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속녀 마르셀로 마르티네시, 2017

by.조혜영(영화평론가) 2019-01-21조회 8,574
상속녀 스틸

작게 열려진 방문 틈새로 누군가가 거실을 엿보고 있다. 나이프와 크리스탈 같은 식기류부터 식탁까지 온갖 가구들을 둘러보며 품평하는 여자와 그에 응대하는 여자가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놓치지 않으려 고집스럽게 염탐하는 이 주관적 시점은 시선을 통해 대상을 소유하는 힘을 갖기보다는 지극히 두렵고 불안해 보인다. 심지어 이 시선은 곧 손님을 응대하던 여자에게 들켜 차단당한다. 이 주관적 시점의 주인은 첼라이고, 문을 닫은 이는 그녀의 오래된 연인 치키타이다. 여성 주인공에 의해 서사가 추동될 뿐만 아니라 단역까지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여성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엄청난 밀도감으로 그려낸 파라과이 영화, <상속녀>는 이 첫 장면을 통해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이는 자, 그리고 그것의 권력 관계의 이분법을 내파하고 새롭게 창조하며 시작한다. 훔쳐보는 첼라의 시선은 왜 힘을 갖지 못하고 불안한가, 그녀의 시선을 차단하는 손은 보호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통제와 지배를 위한 것인가? 여성들의 세계에서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50대 중반의 레즈비언 커플, 첼라와 치키타는 부유한 엘리트였지만 현재는 빚더미에 올라 갖고 있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치욕적인 상황에 처한다. 더 이상 구겨질 자존심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대외적 관계와 재정을 책임져 왔던 치키타가 은행과의 소송에 휘말려 감옥에 가게 된다. 치키타는 특유의 적극성과 사교성으로 감옥에 금세 잘 적응한다. 반면 수줍고 내성적인데다 치키타 덕분에 세상물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첼라는 그 존재감을 더 잃어가는 듯 보인다. 여전히 철없는 부잣집 소녀 같은 첼라는 그저 방안에서 아침마다 마시는 차의 찻잔의 위치와 쟁반 종류를 트집 잡으며 탐미주의적인 일상을 보존하는 데 집착한다. 현재에 마주한 재난-늙음, 시들시들한 연인관계, 다 써버린 재산-을 인정할 수 없는 그녀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과거의 어느 시간에 고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젊은 시절의 사진에 눈을 돌린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견고한 치키타의 보호막이 사라지자 오히려 첼라에게 마법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차를 갖고 첼라는 운전기사 노릇을 하며 생전 처음 돈을 벌어 보고, 젊고 매력적인 앤지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너무나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느끼며 자기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저 나이든 한 여자의 성적 욕망에 대한 영화만은 아니다. 또한 계급, 노동, 정치 혹은 자기 삶의 통제력에 대한 사회적 풍자이기도 하다. 파라과이의 독재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첼라와 치키타는 오히려 안온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만의 오랜 친구와 공동체 속에서 레즈비언 연인들은 어떤 동성애 혐오도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그녀들이 상속받은 부와 계급 덕택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가능했던 우정마저도 치키타의 것이지 첼라의 것은 아니다. 사실 치키타가 큰 잘못을 했다기보다는 오랜 관계가 그들의 역할을 고정시키고 서로의 모든 것을 안다고 확신하며 서로의 잠재성을 갉아먹고 녹슬게 만들었을 것이다. 부, 계급, 오랜 연인 등 모든 방어막이 사라지자마자 첼라는 바로 도전을 맞닥뜨린다. 그것은 가려놓았던 혐오와 계급의 재위치화이며, 사회적 역할과 위치의 재조정은 그녀에게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여겼던 새로운 욕망과 열정을 불 지핀다. 

옆집에 사는 부자 노부인 피투카는 치키타가 어디에 갔는지를 캐물으며 카드게임 모임에 자신을 데려달라고 부탁한다. 사실상 그건 자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안 좋은 소문을 내겠다는 은근하지만 공공연한 위협이다. 그렇게 평생 부모, 연인, 하녀 등에 의해 돌봄을 받던 첼라는 생전 처음 자신 스스로를 포함해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과 운전을 하는 것은 자신의 성적 역할의 재조정이자 계급의 추락이다. 그녀는 받는 자에서 주는 자로, 소비하는 자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자로, 욕망 받는 자에서 욕망하는 자로 이동한다. 그녀는 피투카 뿐만 아니라 함께 카드를 치는 다른 노부인들을 차로 데려다주고 돈을 받으며, 고속도로를 달려 앤지와 앤지의 엄마를 병원에 데려다준다. 점점 더 자신감을 얻게 된 첼라는 앤지에 대한 마음도 함께 키워간다. 

상속녀

과거에서 현재로, 고립된 방 안에서 외부 세계로, 이자 관계에서 다자 관계로 나아가는 전진의 서사는 어떤 면에선 고립되고 무기력하고 위선적이었던 파라과이의 엘리트를 풍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기 삶의 통제력의 회복이든, 꺼져가던 욕망의 부활이든, 아니면 엘리트 계층에 대한 사회적 풍자든 이 전진의 서사는 강렬한 영화적 쾌감을 선사한다. 마르셀로 마르티네시 감독은 이 전진의 서사를 그려내기 위해 첼라의 주관적 시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초반에는 프레임 대부분이 문으로 가려져 있고 종종 완전히 차단당하던 첼라의 시선은 운전을 하고 자신감을 얻어가면서 점점 넓어진다. 식기와 가구를 둘러보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훔쳐보기 위해 열어두었던 방문의 틈은 점점 더 넓어지다 마침내는 방에서 나와 하녀 대신 직접 가격 협상을 한다. 식탁을 비싼 값에 판 첼라는 급기야는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고 보기 싫다고 버렸던 식탁을 들인다. 단순히 방 밖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과 취향에 이질적인 것을 들이며 자신의 계급성을 흩트린다. 한편 초반에 첼라의 시점으로 보이는 앤지는 얼굴이 프레임에서 잘린 채 몸만 보였다. 그러나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부끄러워하던 첼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글라스를 찾아 끼고 자신을 숨기기보다 타인의 시선을 적극적으로 초대한다. 앤지를 향한 그녀의 욕망이 강해질수록 그녀의 시선과 공간은 바람이 부는 베란다로, 밤거리로 점점 더 열리고 확장된다. 

<상속녀>는 첼라의 주관적 시선 폭의 확장, 이동성의 확대, 서사의 진전을 정교하게 연계한다. 나는 마음의 문제든, 뇌 속의 작동이든, 내장이 뒤흔들어지는 감각이든, 내적인 것을 외화하는 능력은 영화라는 기계의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라고 믿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화의 그러한 역량을 잘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상속녀>는 다른 이에게는 감지되지 않을 수도 있는 한 인간의 휘몰아치는 내적 변화-모멸감, 슬픔, 수치심, 우울감, 이기심, 활력, 욕정, 사랑 등-와 모험을 회피하지 않고 전진하는 운동성을 당사자의 시점과 구도를 통해 드러낸다. 그건 굉장한 영화적 쾌감이다. 거울을 비추거나 대립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녀만의 시점과 운동성을 통해 만들어 내는 내적 변화의 시청각화는 한 나이든 레즈비언 여자를 하나의 우주로 만들어 버린다. 

갑작스럽게 치키타가 돌아와 다시 그녀의 삶을 지배하려 하자 첼라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녀는 치키타가 팔아버리려 했던 차를 갖고 떠나버린다. 치키타가 첼라를 찾지만 그녀는 더 이상 프레임에 있지 않다. 시선을 좁히거나 떨어뜨리며 자기 주변의 공간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던 첼라는 아예 프레임 밖으로 나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던 그 영화적 우주를 폭파하고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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