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 스파이크 존즈, 2013

by.김형래(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안필름마켓실장) 2014-12-22조회 8,913
그녀

전자음으로 이뤄진 불안하고도 여린 선율 속에 무표정한 남자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등장한다. 표정없던 남자의 얼굴에서 뭔가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금세 미소가 번지며 말하기 시작한다. 뭐지? 혼잣말? 그런데 본인 얘기는 아닌 것 같고 일단 좀 더 기다릴 수밖에 없다. 아~!

40대 중반이지만 여전히 장난꾸러기 소년과 같은 호기심 가득한 눈망울을 지닌, 감독 스파이크 존즈의 작품을 접할 때면 매번 크고 작은 탄식이 잇따른다. 그의 넘치는 (장난기를 포함한) 끼와 상상력에 대한 시기와 놀라움이 섞인 탄식은 풋 하고 터져 나오는 웃음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정확하지 않은 어느 미래, 손편지 대필 회사에서 작가로 일하는 테오도르는 무심하게 스팸메일은 삭제하지만, 섹시 스타의 화보는 꼭 확인하는 이혼 예정남이다. 게임과 채팅룸으로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극복하려 해보지만, 돌아오는 건 고양이 사체에 흥분하는 여자뿐. 그마저도 거절 못 하고 응해주는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그에게 선물처럼 ‘그녀’가 등장한다. 그리고 첫 마디를 건넨다. “Hello? I’m here.”

베를린영화제에서 상영됐던 존즈의 2010년 단편 <아임 히어 I’m Here>의 여자 로봇 프란체스카가 남자 로봇 셸든과 세상에게 하고 싶은 말이 ‘I’m here’였고, 최인호의 단편 <타인의 방>에서 남자가 자신의 집 문 앞에서 끝내 하지 못했던 말도 ‘I’m here’였다. 그토록 듣고 싶고, 말하고 싶었던 한 마디는 나의 존재를 일깨워 줄 단순한 인사였을 것이다. 이름을 불러주고 나서야 꽃이 됐듯 최초의 인공지능 운영체제 OS1, 사만다는 테오도르의 대화 상대가 되어 연신 질문하고, 대답하며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이혼서류의 서명만을 남겨둔 채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테오드르의 일상은 사만다의 등장으로 조금씩 변화해간다. 사랑은 사랑으로 잊혀지고, 항상 시작은 전보다 나은 사랑인 것처럼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저 신기하기만 했던 대상이 감정을 지닌 인격체로 느껴지는 건, 테오도르의 기분에 맞춰 목소리의 톤까지 조절해가며 실감 나게 위로해주는 사만다, 스칼렛 요한슨의 탁월한 목소리 연기가 한몫한다. 워낙 개성 있는 목소리를 가져 인지하기 쉬운 배우이기에 등장할 때부터 떠오르는 건 사실 실제 모습이다. 극 설정 자체에 빠져드는 데는 인지할 수 없는 일반 여성의 목소리가 나았겠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목소리이기 때문에 관객도 OS1을 여성으로 받아들이기 쉬웠을 테다. 게다가 감독의 위트가 엿보이는 ‘점’ 신을 보고 나면, 요한슨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된다.

둘의 관계는 ‘몸을 갖고 싶다’는 그래서 상대와 같아지고 싶다는 사만다의 욕심으로 인해 위기를 맞지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극복한다. 운영체제와의 사랑이 주변 사람에게 자연스레 인정받는 설정은 무척 재미있다. 3명이 가는 커플 여행이라니! 매번 존즈가 창조한 세상에서는 이상한 환상은 당연하고 평범한 현실이 되고, 주인공은 더 인간적이어서 생각할 구석을 만들어내곤 한다. 바쁘게 돌아가는 도심 속의 개 인간의 귀갓길(뮤직비디오 <다 펑크 Da Funk>)이나 도서관에서 일하는 로봇 셸든(단편 <아임 히어>)의 출퇴근길에 인간과의 어색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불붙은 남자(뮤직비디오 <캘리포니아 California>)까지도 그저 어딘가로 급히 달려가는 남자일 뿐이다. 조금 다르다는 점 말고는 그들은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한다. 테오도르와 사만다의 사랑은 그저 사랑 그 자체를 얘기하기 위한 설정으로서 기능한다.

불안하게 이어가던 그들의 사랑은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혼자만 독점할 수 없다는 걸 아는 순간파경에 이른다. 자신은 사만다가 동시에 대화하는 8,316명 중 하나이며, 641명과 함께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상대에 대한 독점적 소유욕이 사랑의 한 속성이라면, 결국 그들은 양보할 수 없는 차이점이 문제였다. 물론 이런 이유가 아니라도 내 품으로 감당할 수 없는 단계로의 성장을 준비하는 상대방은 놔줄 수밖에 없다. 또 하나의 사랑을 보내며 한 단계 성숙해진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편지에 담아 전부인 캐서린에게 보낸다. 타인의 감정만을 대신하는 사이 정작 자신에게는 솔직하지 못했던 그는 신기루 같았던 사랑을 뒤로하고, 차분하게 또 다른 사랑을 기다린다.

스스로 솔직하며 짧은 인생, 즐겁게 살자.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치이고, 연신 사랑에 실패하는 현대인을 풍부한 감성으로 위로해주는 <그녀>를 통해 감독은 정작 그렇게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그리고 게임에서가 아니라 진짜 세상에서 인간끼리 서로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서로 위로하며 즐겁게 그렇게 살자, 라고.

파스텔톤의 원색 가득, 황홀하고 아름다운 미술과 의상 속에 감성이 뚝뚝 묻어나지만, 그 안에서 자제하고 자제해도 어쩔 수 없이 표출되는 감독의 B급 취향이 사실 더 큰 재미였다.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웃음이 가득하다. 극 중 테오도르가 즐겨 하는 게임 속 욕쟁이 캐릭터, 외계인 소년의 목소리가 존즈라면? 존즈의 영원히 늙지 않을 것 같은 상상력과 괴짜스런 장난기는 어쩌면 아이 같은 코맹맹이 목소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실없는 생각을 해본다. 그에게는 오지 않았던 변성기처럼, 재미없는 어른으로 크기보다 지금 그대로 탄식과 웃음이 어우러지는 작품을 계속 만들어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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