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후드 리차드 링클래이터, 2014

by.이용철(영화평론가) 2015-01-09조회 12,346
보이후드
애초 작성한 리스트에는 23편의 영화가 포함되어 있었으나, 10편만 선정해 달라는 요청에 따라 여러 편의 영화를 제외해야 했다. 2014년의 영화로 선택한 <보이후드>의 리뷰에 앞서 전체 리스트를 수정 공개함을 알려 드린다. 

이용철 영화평론가의 23편

2014년의 영화
보이후드 Boyhood, 리처드 링클레이터, 2014

다섯 편의 장르영화
나를 찾아줘 Gone Girl, 데이비드 핀처, 2014
더 홈스맨 The Homesman, 토미 리 존스, 2014
다크 밸리 Das Finstere Tal, 안드레아스 프로차스카, 2014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The Wolf of Wall Street, 마틴 스콜세지, 2013
콜드 인 줄라이 Cold in July, 짐 미클, 2014

로버트 패틴슨이 나온 두 편의 영화
더 로버 The Rover, 데이비드 미쇼드, 2014
맵 투 더 스타 Maps to the Stars,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2014

다섯 편의 아트하우스
더 원더스 Le meraviglie, 알리체 로바허, 2014
도원경 Jauja, 리산드로 알론조, 2014
실스 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올리비에 아싸야스, 2014
언어와의 작별 Adieu au langage, 장 뤽 고다르, 2014
에덴 Eden, 미아 한센 로브, 2014

두 편의 다큐멘터리
야만의 땅 Pays Barbare, 예르반트 지아니키안/안젤라 리치 루키, 2013
위로공단, 임흥순, 2014

두 편의 한국 드라마
절경, 남근학, 2014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 2014

여섯 편의,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한 영화
호스 머니 Cavalo Dinheiro, 페드로 코스타, 2014
사랑스러운 자매 Die Geliebten Schwestern, 도미닉 그라프, 2014
프랑스 공주 La Princesa de Francia, 마티아스 피녜이로, 2014
아프리오리 Mula sa kung ano ang noon, 라브 디아즈, 2014
신이 되기는 힘들다 Trudno Byt Bogom, 알렉세이 게르만, 2014
위플래쉬 Whiplash, 데미언 차젤, 2014

(링클레이터는 <스쿨 오브 락>의 개봉 후에 아역 배우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한다. 영화지 「사이트 앤 사운드」와의 인터뷰 도중 그 편지에 관한 질문을 받고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멋진 시간을 함께 보냈음을 상기시키는 한편으로, 아이들에게 배우의 길을 걸어가라고 부추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들의 인생에서 보낸 하나의 좋은 챕터가 곧 가장 좋은 시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신 곁에 머무는데, 나는 그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긍정적인 순간들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언제나, 그게 완성된 것이 아닌 경험을 위한 것이라 여긴다. 

부모의 이혼으로 메이슨과 누나 사만다는 엄마와 함께 산다. 아빠는 멀리 알래스카에서 일한다고 했다. 뒤늦게 학업을 시작한 엄마는 공부와 아이들 뒷바라지를 위해 친정이 있는 휴스턴으로 이사 가기로 결정한다. 때마침 아빠도 근처로 거처를 옮긴 차였다. 이후 12년 동안의 시간 흐름을 담은 <보이후드>는 제목 그대로 메이슨의 소년기이자 누나 사만다의 소녀 시절 이야기이고 엄마와 아빠의 이혼의 기록이다. 촬영은 실제로 2002년부터 2013년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사실만으로도 <보이후드>는 충분히 감탄을 불러낼 만하다. 링클레이터는 이미 ‘비포 연작’을 통해 (동일한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과 그들의 관계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어떻게 변화하는지 잘 보여주었던 감독이다. 그리고 <스쿨 오브 락>(2003)이나 <배드 뉴스 베어즈>(2005) 같은 장르영화를 만들 때면 어김없이 어린 아이들과 어울려 놀았던 사람이다. 그에게 <보이후드>가 뜬금없는 작업이 아니란 이야기다. 기실 영화가 12년 정도의 시간 흐름을 담았다고 해서 무조건 열광할 일은 아니다. 예를 들어, 마이클 앱티드는 1964년부터 지금까지 50년이 지나도록 ‘업(Up) 연작’을 계속 연출하고 있다. 소년의 성장을 20년 넘게 극화한 프랑수아 트뤼포의 ‘앙투안 두아넬 연작’은 또 어떤가. 그래서 <보이후드>에서 우선 관심이 갔던 것도, 시간 속에서 인물을 포착하는 감독의 태도였다.

TV 프로그램의 한 코너로 시작된 ‘업 연작’은 매번 유명한 문구 - ‘7살 때까지 아이를 맡겨 달라. 그러면 인간을 보여주겠다’ - 로 문을 연다. 이 문구를 살짝 바꾸면 곧 <보이후드>의 모토가 된다. ‘7살짜리 꼬마를 맡겨 달라. 그러면 소년 시절을 보여주겠다.’ <보이후드>를 본 평자들은 누구나 ‘업 연작’의 영향을 이야기하며, 링클레이터 또한 인터뷰에서 앱티드의 영화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처지였음을 내비친 적이 있다. 2012년의 <56 업>까지 매 7년마다 한 편씩의 영화로 발표된 ‘업 연작’은 현실의 인물에서 ‘가족, 친구, 애정, 교육, 계급, 타자, 빈부, 정치, 기회, 종교, 도덕, 꿈’을 읽어내 영국의 미래를 논하고자 했던 작품이다. 사회의 축소판이자 거대한 실험장으로 발전한 ‘업 시리즈’의 감동은 삶의 예측 불가능성에서 나온다. 신비롭게 자유자재로 흘러가는 삶의 전개 방향이야말로 다큐멘터리로서 ‘업 시리즈’가 드러낸 진정한 가치인 것이다. <보이후드>의 주인공 엘라 콜트레인은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는 평범한 6살 아이였으며 영화가 만들어지는 12년 사이에도 배우로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보이후드>는 콜트레인과 직업 배우들이 서로 소통하며 찍은 반 다큐의 느낌을 준다. 링클레이터는 매해 소년에게 일어난 변화를 영화에 반영했음은 물론 콜트레인이 직접 소년기의 대사를 풀어낼 수 있도록 이끌었다고 한다. ‘업 연작’이 시간의 경과 위로 사회와 문화의 지도를 그리려 한 작품이라면, <보이후드>는 한 소년의 얼굴 그리기에 더 치중한 작품이다. 긴 세월에 걸쳐 콜트레인이라는 배우와 메이슨이라는 인물이 은연중에 작가처럼 참여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소년의 성장을 연대순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보이후드>는 ‘앙투안 두아넬 연작’과 비교될 수밖에 없다. 트뤼포는 앙투안 역할을 맡을 배우로 어린 장 피에르 레오를 선택했고, 감독과 배우와 인물이 어우러진 다섯 편의 영화 - <400번의 구타>(1959), <앙투안과 콜레트>(1962), <훔친 키스>(1968), <부부의 거처>(1970), <사랑의 도피>(1979) - 가 긴 시간에 걸쳐 완성되었다. 그런데 트뤼포 자신이 말했듯이 ‘앙투안 두아넬 연작’은 고전적이고 낭만적인 드라마이며, 그러한 성격은 <보이후드>의 자연스럽고 사실적인 지향점과 어느 정도 상치되는 부분이다. 꼭 그 점이 아니어도 나는 <보이후드>와 비교되어야 할 작품이 ‘앙투안 두아넬 연작’이 아니라 장 외스타슈의 <나의 작은 연인들>(1974)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 소년 다니엘의 딱한 형편은 <보이후드>의 메이슨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다니엘은 할머니와 살다 어머니를 따라 프랑스 남부로 이사 가게 된 소년이며, <나의 작은 연인들>도 소년 다니엘이 성장해 어른의 문턱에 이르기까지를 다룬다. 단, 외스타슈가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링클레이터의 그것과 많이 다르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보이후드>와 상반되게) <나의 작은 연인들>은 극 중 소년의 외모가 별로 변하지 않은 상태를 지속시키며 외부의 세계와 단절된 인상을 강화한다. ‘앙투안 두아넬 연작’과 마찬가지로 감독의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나의 작은 연인들>을 굳이 불러내 비교하려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영화의 후반부에 나오는 짧은 장면 때문이다. 다니엘은 한 소녀와 노변 풀밭에 누워 있다. 곧 어른이 돼 순수의 시대와 작별을 고할 소년은 문득 하늘을 바라본다. 그의 눈에서 금방 눈물이라도 흐를 것 같다. 이 장면은 <보이후드>의 첫 쇼트 - 여섯 살 메이슨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 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흡사 링클레이터는 고통스럽고 아픈 소년 시절을 보낸 다이넬의 시간을 돌려 메이슨이라는 소년의 이야기를 다른 태도로 새롭게 쓰려는 듯하다. 그는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애쓴다. 자신을 포함해 당신들도 소년 시절의 통증을 겪었음을 알고 있는 까닭에, 극에 뛰어들어 아파하는 척하지도 않는다.

링클레이터 영화의 특징은 ‘단순한 자연미’다. 장르 영화를 찍을 때도 그렇지만, 그것이 더 잘 드러나는 경우는 그만의 소품을 찍을 때다. <비포 미드나잇>(2013)이 몇 개의 장면으로 구성되었는지 확인해보라. 영어에 ‘Don’t make a scene(야단법석을 떨지 마라)’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의미는 달라도 링클레이터 영화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매년 사나흘 동안 제작진과 배우들이 모여 15분 분량의 촬영을 거듭한 <보이후드>에는 사건이라 부를 만한 게 일어나지 않는다. 상업영화로서 너무 심심해 보일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어느 날 어느 십 대 소년의 집을 방문해서 목격한 장면을 손질하지 않고 내놓는 것, 그 이상을 영화는 욕심 내지 않는다. 지금 장면이 어떤 해에 벌어진 일인지 구분해 밝히지 않기에, 흐르는 음악과 열중하는 게임과 구경 간 스포츠 경기와 정치적 이슈에 대한 이야기 등으로 대충 어느 정도 지점의 상황인지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어떤 장면에서는 배우가 카메라를 보는 실수를 하는데도 숨기지 않아 자연스러운 맛을 강조하기도 한다. 부모를 비롯한 인물들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소년이 겪을 성싶은 일들이 그저 그렇게 일어났다 사라지는 게 다인 것 같은데 <보이후드>는 시간의 에센스를 놓쳤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그건 소년의 얼굴 덕분이다. 그냥 몸이 커지고 머리 스타일이 바뀌는 게 다가 아니다. 시간이 흘러가고 세상이 변화하면서 흘린 흔적은 차곡차곡 쌓여 메이슨의 얼굴에 자국을 남긴다. 16살 생일을 맞는 해에 메이슨의 얼굴은 밉다. 이전까지 오랫동안 사랑스러운 모습을 유지했던 콜트레인은 무슨 일인지 잔뜩 우울한 표정과 지저분한 얼굴로 메이슨이란 인물을 연기한다. 사춘기여서 그랬을 터인데, 링클레이터는 일부러 예쁘게 분장하지 않았고, 콜트레인도 통과 중인 시기가 입혀준 표정을 거짓 마스크로 가리지 않는다. 

링클레이터는 <보이후드>를 찍는 과정이 결과물보다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나는 영화를 보면서 어떻게 끝을 맺을지 궁금했다. 상영시간이 165분인 영화가 대체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에서 막을 내릴까. 평범한 영화였다면 메이슨이 차를 몰고 집을 떠나는 장면에서 끝났을 것이다. <보이후드>로 인해 유명해진 인디그룹 ‘패밀리 오브 더 이어’가 부른 <히어로>가 배경음악으로 흐른다. ‘나는 당신이 바라는 큰사람이 될 마음이 없어요. 나는 여기저기서 사람들과 싸우고 싶어요. 나를 놓아줘요’라는 가사가 엄마의 품을 떠나는 장면과 썩 어울려 이 정도면 엔딩으로 훌륭하다 싶었다. 끝없이 뻗은 텍사스의 도로를 보며 누구나 감동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링클레이터는 그런 감상을 빚을 생각이 없다. 다시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자. 소년은 잔디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며, 배경음악으로 ‘콜드플레이’의 <옐로>가 흐른다. 노래의 가사는 ‘별을 바라봐, 별은 너와 너의 행동을 모두 보고 있어’이다. 소년이 무엇을 보는지 모르는 나는 대낮인데 설마 별을 보는 건 아니겠지, 라고 생각했다. 또는 내 생각과 달리 소년이 자신만의 별을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소년이 보는 것은 화면 바깥에 놓인 무엇이었다. 곧 누군가 소년을 부르고 소년은 극 중 현실로 돌아온다. 이어 12년의 시간을 산다. 내성적인 소년은 사진을 사랑하는 청년으로 자라 대학교에 입학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이제 소년은 하늘이 아닌 자기 앞을 정면으로 바라본다. 조금 슬픈 얼굴의 여섯 살 소년은 엷은 미소를 띤 열여덟 살 청년으로 컸다. 변하지 않은 것 하나, 첫 장면처럼 마지막 장면에서도 메이슨은 화면 바깥을 응시한다. 청년이 된 메이슨이 바라보는 것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은 또 다른 메이슨에 해당하는 자신을 바라본다고 말할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앞에 펼쳐진 미래를 기대하는 게 아니겠냐고 말할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되었든 <보이후드>는 시간을 과거에 흘러간 어떤 것이라는 개념으로 소비하지 않는다. 시간은 언제나, 살아가야 할 매 순간이자 현실이라고 <보이후드>는 말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나의 소년기를 향수로 기억하는 게 아니라 나의 소년기 혹은 삶의 한순간을 다시 한 번 더 살고 있었던 거다. 메이슨의 알싸한 성장통이 나의 것인 양 내 몸이 반응한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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