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용삐용B무비]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신재인, 2001

by.허경(정발산 영화거구) 2014-01-28조회 11,228

똥을 먹는 장면이 가장 유명한 영화는? 단연코 존 워터스의 <핑크 플라밍고>를 들겠다. 쓰레기 영화의 영원한 히로인, 드래그 퀸이자 게이였던 디바인이 방금 배출된 따끈따끈한 실제 개똥을 주워 먹는 장면은 영화 마지막 부분에 쓰여 충격을 통해 이 영화가 묘사하는 쓰레기 같은 세상이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했다.
 

<핑크 플라밍고>의 똥 먹기

신재인 감독이 영화아카데미 재학시절 만든 <재능 있는 소년 이준섭>은 그 장면의 확장판 같은 영화다. 나는 개인적으로 학창시절을 그리 달콤하게 기억하고 있지 않다. 왕따를 당하거나 힘든 환경에 놓이지는 않았었지만 그랬다. 선생들하고 나는 늘 사이가 좋지 않았고, 몇몇 친한 친구를 제외하면 딱히 이야기를 나눌만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였는지 늘 동네 오락실에서 시간과 돈을 축내곤 했다.) 아마 지금 20대 초중반이 되었을 영화 속 준섭이는, 나보다 조금 더 외로워 보인다. 무엇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는 허술한 아이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질감 때문에(나이가 적든 많은 어떤 조직이든 그런 ‘다름’ 때문에 손해를 보는 사람은 항상 있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따돌림을 당하는 준섭이는, 남다른 재능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엄청난 비위다. (이 재능이 그를 더 힘들게 하고 있기도 하다.)
 
먹는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먹는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사실 어린 시절을 생각해보면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샤프심을 씹어 먹거나, 지우개를 조금 떼어먹거나 하면서 친구들을 웃기기 위해 노력하는. 준섭이는 그런 친구들의 심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가 이런 행동을 ‘웃기기 위해서만’ 하지는 않는다는 게 다른 점이다. 준섭이는 일련의 행동들을 본인의 사회적 생존과 직결 지어 생각한다. 이렇다 할 다른 재능이 전혀 없기 때문일까? (배역을 연기한 배우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그렇게 보인다.) 그는 미래에 본인이 하고 싶은 일, 꿈을 모두 이 비위에 연결하여 생각한다. 이를테면 지구침공을 위해 화성에서 온 외계인의 비행기에 잠입해 내부 부품들을 다 먹어버려 전쟁을 막는다던가, 언젠가 식량자원이 부족해질 때 마치 예수와 같은 모습으로 ‘인간의 능력은 무한하다. 뭐든 먹어도 살 수 있다’고 복음을 전파해 기아를 해방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진리를 영접한 노숙자들은 밥이 아니라 그릇을 먹고 빵이 아니라 빵을 싸고 있는 비닐을 먹으며 감격한다.) 그 꿈에는 항상 준섭이가 좋아하는 소녀 같은 반 은혜가 있다. 뭐 물론, 잘하는 게 이상한 걸 먹는 것뿐이라 소년은 소녀 앞에 가서 연필을 씹어 먹거나... 하는 게 애정표현의 전부다. (가끔 지우개도 먹는다.)
 
소년의 상상
소년의 상상

그러던 어느 날, 은혜는 준섭에게 “너 나 많이 좋아하니?” 라고 묻는다. 딱히 잘하는 것 없는 준섭이 고백을 할 리가 없다. 우물쭈물하는 소년에게 소녀는 말한다. “너. 내 똥도 먹을 수 있어?”

준섭이가 얼마나 긍정적이고 밝은 아이인지는 이다음부터 절절하게 나타난다. 준섭은 은혜의 똥을 먹어치운 후, 은혜와 여자 친구들의 환호를 받고 다른 여자에게 고백 비슷하게 양말을 먹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옆에 있는 친구는 “얘는 아무거나 먹는 줄 아니?” 라고 말한다.) 그를 괴롭히던 남자친구들도 “내가 졌다.” 며 화해를 청하고, 급기야 담임선생님의 주례로 은혜와 결혼까지 한다.

물론 이것은 모두 허구이다. 은혜가 싼 똥이 들어있는 양은 도시락통(이른바 ‘벤또’로 더 널리 통하는)을 바라보며 상상한 밝은 미래. 이 대책 없이 밝기만 한 소년은 수저를 들고 도시락통을 연다. 
 
도시락통 속의 똥
도시락통 속의 똥

2001년 제작된 <재능 있는 소년 이준섭>은 신재인이라는 감독을 세상에 알린 영화다. 위의 글을 읽어봐서 알겠지만 참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감독은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에 적절한 연출과 힘 있는 이미지를 엮어 이준섭이라는 소년이 처한 곤경을 잘 표현해 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준섭이의 기행이라기보다는 다른 아이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이다. 보고 나면 괜히 씁쓸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영화에 등장하는 예쁜 아이들이 취하는 잔혹한 태도들 때문일 테다. 그들은 “저런 걸 먹어도 괜찮은 거야?” “애초에 저런 걸 먹는 건 잘못된 거 아니야?” 라고 말은 하지만, 그에게 기어코 똥을 내민다. 단 한 사람도 자신의 편을 들지 않는 세계에서, 준섭이는 늘 자신의 놀라운 비위로 대단한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고 보면 그가 가진 가장 큰 재능은, 똥도 먹을 수 있는 미칠 듯한 비위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좋은 상황을 상상해내고야 마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아니었을까. 

신재인 감독은 이후에도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나 <신성일의 행방불명>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힘 있는 이미지에 우화 같은 이야기가 얹혀 당시 단편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재능 있는 소년 이준섭>이 ‘남들과 다른’ 점을 가지고 있던 한 아이에게 가해진 폭력을 다룬 영화라면, <그의 진실이 전진한다>는 고문, <신성일의 행방불명>은 무조건적으로 주입되는 신앙이 가진 폭력의 속성을 다뤘다. 그녀의 영화가 특별했던 것은 ‘탐구’, ‘연구’, ‘구성’ 같이 심각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를 다루는 많은 영화에 달리는 수사와는 다른 방향으로 돌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성경 구절에 있는 문장인 것처럼 썼지만 영화 마지막 크레디트에 ‘창작한 것이다.’ 라고 밝히고 있거나, 심각하게 바라보고 분석하며 질문하는 기자들에게 ‘변은 따로 보고 밥은 같이 먹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고 답하는 식이다. 본인 스스로 ‘원형질의 상상력’이라고 불렀던 창작의 비밀은 그녀의 영화가 대부분 우화의 형식으로 만들어지는 원인이기도 했을 것이다. 영화 정보 사이트를 뒤지면 어머니가 좀비가 되어 나타났다는 이야기를 가진, 2007년에 제작된 <어머니가 상했다>는 영화를 연출했다고 올라가 있지만 어디서도 볼 수가 없다. 한국 영화판에서 몇 안 되는 상상력과 그것을 구현시킬 능력을 갖춘 감독의 오래 지속되고 있는 안식일은 언제쯤 끝날까? 누군가가 말했던 ‘슈퍼 울트라 영화천재’ 까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누군가가 말한 ‘한국에 없었던 재능’이라는 데엔 충분히 공감하는 데 있어, 언제가 되었든 좋으니 꼭 신작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녀의 가장 최근 활동은 신아가, 이상철 감독의 <밍크코트>에 단역으로 출연한 것이었다.

감독: 신재인
각본: 신재인

재능있는 소년 이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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