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말이 안 되면서 되는 것

by.윤아랑(영화평론가) 2023-08-03조회 2,906

어쩔 수 없이 고다르를 베끼면서 얘기를 시작해야겠다. 우리들 사이에 '한국고전영화'란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걸까? 『한+ 국어대사전』에 따르면 문화예술에서 논하는 고전이란 "시대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후세 사람들의 모범이 될 만한 가치를 지닌 사상집이나 문예 작품"을 일컫는단다. "모범"이란 표현에 딴지를 걸고 싶어지긴 하나, '세계고전문학'이나 '클래식 음악' 같은 말이 통용되는 바를 떠올려보면 그래도 말뜻에 납득이 가긴 한다. 그런데 '한국고전영화'라? 나로선 이 말을 기어이 꺼내려다가도 결국엔 어색해서 주춤하게 된다. 과연 한국영화에 있어 고전이란 무얼 지칭할 수 있을까. 아니, 과연 무엇이 고전일 수 있을까. 당신의 생각이 정말 궁금한데, 왜냐하면 나는 이 물음 모두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쟁점, 한국영화에 고전기가 있다면 이는 언제부터 언제인가? 달리 말해 한국영화의 뼈대가 세워진 시기는 언제인가? 한반도에 영화 기술이 들어오고 식민지 조선인들이 그것을 활용하기 시작한 일제강점기일까, 아니면 이 시기를 포함해 한반도 영화계의 짧은 해빙기였던 광복 전후일까, 그도 아니면 한국전쟁부터 5.16 쿠데타 직전까지인 이승만 정부 전후일까, 이도 아니면... 확언하기 어렵다. 사실 고전영화라는 말 자체가 실은 '옛날 영화'를 좀 더 고상하게 부르려는 세속적 용어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나, 미국이나 일본의 영화사 연구에서 고전기라는 범주가 이런 용법을 넘어 이론 안에서도 ('파벌'에 따라 구분은 상이할지언정) 어느 정도 설정되어있다는 걸 떠올리면, 한국영화의 경우는 역시나 이질적일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는 식민지나 군사 정권의 경험을 가진 비 서구 국가들의 공통적인 현상이 아닐까? 하지만 (발리우드 스타일이 일찍이 굳게 자리 잡은) 인도나 (빈곤한 환경으로 인한 문화적 혼종성을 오히려 '내수용'으로 스타일화한) 브라질의 영화사를 떠올리니 금방 생각을 고쳐먹게 된다. 요컨대 한국영화사에 있어 "일제강점기"나 "유신 체제 시기" 같은 사회적 구분은 가능하더라도 자체적인 '고전기'에의 설정 및 구분은 임의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어째서? 아마 21세기 전까지 한국영화가 스스로 독자적인 문화로서 성립된 적이 없기 때문이리라.
 

오해를 피하고자 서둘러 덧붙이건대, 나는 윗세대 영화인들의 문화적 투쟁을 폄하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 그들 다수의 오만한 행보와 의심스러운 작업에 대해선 깊은 불만이 있어도, 그들의 투쟁의 결과를 향유하며 살아가는 입장인 만큼 투쟁 자체에 대해선 오히려 깊은 존경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투쟁이 (사실 현재진행형으로) 오랫동안 이어진 것은 역시 한국영화가 독자적인 문화는 아니란 의식을 모두가 갖고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우리는 1998년 필름 발굴 작업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국가가 일제강점기 때의 영화를 단 한 편도 소유하지 못했음을 알고 있고, 1970년 이후 외국영화 수입쿼터제를 충족하기 위해 수많은 한국영화가 제작되기'만' 했음을 알고 있으며, 제작이고 비평이고 무관하게 1980년대의 '신세대'들이 총체적인 고립무원의 환경에서 활동을 겨우겨우 이어갔음을 알고 있고, 같은 1980년에 공개되었음에도 (당시 국산영화 최대 흥행작이었던) 〈미워도 다시 한번 '80〉 대신 〈전원일기〉를 '옛날'의 지표로 흔히 떠올리고 있다. 역사의 연속이나 단절을 논하기도 전에 이미 사람들의 지속적인 관심을 받지 못해 독자적인 문화로 선 적이 없고, 그러니 (우스꽝스럽게도, 선후배의 엄격한 계열은 있어도) 스타일과 방법론에 있어 표준이나 관습으로 삼을 역사적 대상이 내부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영화에 고전기는 역시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두 번째 쟁점, 한국영화에 있어 고전으로 기능하는 영화가 얼마나 있나? 아마도 이 물음에 당신은 즉각 김기영의 이름을 거론할 것이다. 그래, 확실히 창작자든 관객이든 한국영화와 깊이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하녀〉를 비롯한 김기영의 영화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이외에는? 아니, 그 이전에 이 조건 자체를 뒤집어봐야 하지 않을까. 고전이란 이미 그 자체로 주어지는 게 아니라 사후적인 (재)평가 속에서 (위태롭게) 성립된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가령 에드거 앨런 포우가 오늘날 같은 문학의 정전에 등재되도록 선제적으로 상징투쟁을 벌인 건 당대의 미국인들이 아니라 샤를 보를레르를 위시한 프랑스 상징주의자들이었으며, 이 상징투쟁의 영향은 포우가 죽고 한 세기 이후에야 미국에 도달했다. 또 오랫동안 잊혀졌던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바흐 사후 세간에 재발견된 것은 물론 젊은 펠릭스 멘델스존의 강력한 열정 때문이기도 했으나, 관습을 타파한 새로운 예술적 장을 마련하고자 한 (멘델스존을 포함한) 신세대 음악가들의 전투적인 의식과, 국가와 종교에 대한 세간의 믿음을 굳건히 하고자 한 지식인들의 계산적인 의식이 예기치 않게 연합하여 이끌어낸 결과였다고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김기영이 1990년대에 거장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것은 당대의 영화광들에게 공통적인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의식? '우리에게도 컬트영화가 필요하다'라는 '국제적'인 의식. 많은 연구자와 비평가들이 합의했듯, 오늘까지 이어지는 김기영의 위상은 여기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에 더해, 영화사 연구자 금동현은 「협잡꾼 당신-『김기영 평전』을 위한 단편(1)」에서 김기영의 1971년 이후 영화들이 대부분 (해외 영화제 실적을 중요시한 문화융성정책에 따라) 시체스 국제영화제를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음을 지적하며, "해외를 경유하여" "한국 혹은 한국영화라는 구조에 순응/활용하는 김기영의 행위성"을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여기서 조금만 더 발을 내딛으면 우리는 "여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조건들에 의해 뒤틀린 (...) 한국영화의 부정교합 자체가 도착적인 미학으로 승화된 것"으로서, 곧 가장 한국영화적인 한국영화로서 김기영의 영화들을 재정의하는 영화평론가 유운성의 「이식과 기생 : 봉준호의 <기생충>을 계기로 다시 읽는 임화의 영화론」과 마주치게 된다. 그렇다면 김기영의 '귀환'은 역사의 관점에선 필연적인 결과였을까? 확신할 수야 없지만, 90년대 이후의 김기영 수용에 또 다른 (무)의식이 있었으리란 '잠재적인' 가설은 분명 흥미진진하며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한국영화가 가진 것은 집단적인 스타일과 방법론이 자의적으로 형성된 고전기가 아니라, 각각의 스타일과 방법론 사이에 일말의 계열을 만든 환경인 게다.

한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김기영 같은 취급을 받은 이는 결국엔 김기영뿐이었다. 물론 이만희와 임권택 역시 한국영화사의 만신전에 올랐다. 하지만 이만희는 2005년 〈휴일〉의 발견과 함께 뒤늦게 관객들을 (다시) 자극한 경우였고, 임권택은 이미 영화계 내외에서 한국영화의 아버지상으로 군림했으나 오히려 그것이 그를 제작자에게나 관객에게나 (부정적인 의미에서) 예외로 취급받도록 만들었다. (내친김에 부연하자면, 나는 한국영화의 가장 이질적인 작가는 다름 아닌 임권택이라고 보는 쪽이다) 요컨대 이들에겐 김기영 만큼의 폭넓은 애정이 주어지지 않은 것이다. 더군다나 2000년대 들어 대기업 자본의 (재)진입으로 인해 통째로 재편되기 시작한 한국영화산업은 충무로에 기반을 둔 21세기 이전의 영화 혹은 영화인들 대부분을 망각과 은퇴로 몰아넣었고, 한국영화사에는 또 한 번의 극심한 단절이 일어났다. 예컨대 이순재는 알아도 김지미를 아는 한국의 2~30대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한국영화에는 고전으로 기능하는 영화가 터무니없이 적은 것이다. (한국의 문학과 대중음악에서도 비슷한 단절이 일어났었지만, 이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는 언젠가 다른 자리에서 해야 할 것이다)

세 번째 쟁점, 그렇다면 추후에 21세기 이전의 한국영화들이 고전으로 성립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터무니없는 도박을 요구하는 것이므로 곧장 대답을 내뱉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심스럽게 입을 떼보자. 지금 같은 단절의 상황이 연속되는 한은 역시나 어렵지 않을까? 이는 앞서 언급한 '대중적' 단절만 지시하지는 않는다. 옛날 한국영화를 새로운 고전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엔 (결코 많지는 않은) 국내 시네필들의 몫일 터이다. 한데 그들이 영화 제작 환경에 편입되는 것도, 옛날 한국영화를 끈질기게 보러 다니는 것도, 아예 이런저런 극장을 다니며 영화 관람을 지속하는 것도 요원한 게 요즈음의 상황이지 않던가? 한국영화를 이루는 행위자들은 갈수록 서로 간의 마주침과 뒤섞임 없이 분열되기만 하고 있다. 이 행위자들에게 책임을 온전히 돌리려는 것도, 행위자들이 서로 반드시 마주치고 뒤섞여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이런 상황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게다가 대다수의 국내 시네필들은 (어느 시대의 작품이건 간에) 한국영화에 별다른 관심을 갖고 있지도 않다. (2010년대 전후로 한국영화사 연구의 헤게모니가 국문학과로 옮겨간 것은 그 결과이자 원인일 테다) 후기 자본주의 하에서 '국제적인 것'이 대도시와 대도시 간의 연결로서 블록으로만 환원되는 것과 유사하게, 국내 시네필들은 한국영화와 거의 단절된 채 '국제적인 것'에 스스로의 위치를 잡는다. 그 원인에 대한 규명은 본고에서 책임지고 논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므로 넘어가야겠지만, 하여튼 옛날 한국영화의 낮은 접근성은 (불균질한 더빙을 비롯한) 형식적 층위의 어색함에서만 기인하지는 않는 것이다.
 

부끄럽게 고백하자면 비평을 업으로 삼고 있는 나 역시도 이런 상황의 바깥에 있지는 않아서, 불과 몇 주 전인 5월 7일에 강수연 배우 1주기 추모전의 일환으로 상영된 〈경마장 가는 길〉을 (거의 8년 만에 다시) 보고 나서야 나는 앞선 쟁점들을 포함한 '한국(고전)영화'를 문제다운 문제로 여기게 되었다. '한국'도 '영화'도 '한국영화'도 온전히 믿지 않는 장선우의 태도가 이 영화를 통해 순식간에 전염됐다고나 할까? 그동안 옛날 한국영화들을 찾아보고 그에 관한 연구들을 찾아보았어도, 또 동시대의 믿을 만한 동료들이 한국영화와 씨름한 결과물들에 지지를 보냈어도 나는 결국 '한국(고전)영화'를 개입해야 할 문제로는 전혀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혹은 다소 의무적으로 수행한 제스쳐들을 갖고 스스로가 이미 개입하고 있다 착각했던 건 아닐까. 말하자면 이 글은 그런 늦은 깨달음에 따라 서둘러 쓴 반성문이라 해도 좋다.

이렇게, '한국고전영화'는 몹시 잠정적인 개념으로 남는다. 하면 우리는 이런 잠정성에 대해 어떤 리액션을 취해야 하는가? 리액션으로서 큐레이션에 대해선 영화연구자 박진희가 이미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 – 나의 경우」를 통해 솔직하고 재밌는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럼 리액션으로서 비평이나 연구는? 실망스럽게도 많은 이들은 두 개의 우회로만을 길로 인식하고 있던 것 같다. 이미 고전으로 꼽힌 작품들만 텍스트로 삼거나, 아니면 사회적 압력에 주목해 한국영화사를 연민해야 할 상처투성이로만 기술하거나. 나는 그 대신에, (21세기 이전의 한국영화들이 고전으로 성립될 리 만무한) 당장은 이 잠정성을 고스란히 전면화하는 길을 택하고 싶다. 허황된 관념이 된 '한국영화'가 환희에 이른 지 얼마 안 돼 금방 처참히 붕괴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그 붕괴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있어 (실패와 망각과 단절과 분열로 나타났던) 오랜 기반이었음을 적극적으로 증언해야 하지 않을까? 다만 붕괴가 새로운 사유를 가능케 하리라는 식의 역전적 논리가 아닌, 붕괴 속에서 하여튼 '한국(고전)영화'라는 것이 잠정적으로나마 존재해왔다는 식의 '경험론적' 논리를 갖고서 말이다. 지난날 전복적이라 여겨졌던 형식을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게 대안 우파들인 요즈음에 역전적 논리는 부정적인 조건의 부정성을 간과할 위험이 크다. 그러니 (헤이든 화이트를 따라)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우리에게 기반이 주어진다는 것을 명심한 채 말을 이어가자. 가령, (한국의 모든 문화예술이 그렇지만) 이념으로서의 리얼리즘은 영화의 안과 밖 모두에 있어 어떤 기형적인 형체로써 ‘반복’되어왔는가? 금동현과 유운성이 간접적으로 일러주었듯 한국영화에 있어 붕괴와 반복은 한 몸이다. 달리 말해 붕괴의 반복이야말로 한국영화의 조건이요 전통이다. 그렇기에 나는 새로운 것 대신 오래된 것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우리와 단절된, 하나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오래된 것을. ‘한국영화’와의 대면은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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