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뉴우스]제주 4.3과 <산> 미국공보원, 1963

by.공영민(영화사연구자) 2018-04-10조회 6,001
산(The Mountain)

지난주 화제가 된 ‘대통령 제주 4.3 추념사’에서 1978년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부터 최근 영화 <지슬>, <비념>까지 제주 4.3사건을 주제로 한 문화예술 작품들이 거론되었다. 그렇다면 1970년대까지 4.3은 영화에서 한 번도 다루어지지 않은 것일까? 다음은 <산(The Mountain)>1)이라는 영화 도입부에 삽입된 내레이션이다. 

“1948년 4월 3일. 네 번째 달의 세 번째 날. 치욕의 날. 제주도 사람들은 절대로 잊지 않을 날. 우리는 조용한 섬사람들입니다. 고립의 정적에 익숙한 자연과 신의 뜻에 적응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 끔찍했던 날 고요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비명으로 인해 산산조각 났습니다. 겨우 몇 달 동안 제주도 인구의 4분의 1이 말살됐습니다. 6만 명이 죽음을 당했고 8만 명이 집을 잃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왜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합니다.”2)

이처럼 4.3으로 인한 제주도민의 죽음과 피해를 비교적 가감 없이 전달하는 <산>은 놀랍게도 최근작이 아니다. 1963년 미 공보원이 제작한 42분의 중편 문화영화이다. 이 영화는 아마도 1950~1970년대 거의 유일하게 제주 4.3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일 것이다. 그러나 <산>은 제주도의 비극을 다분히 프로파간다적 방식으로 그리고 있다. 
 
무장대의 방화로 집을 잃은 고 씨
무장대의 방화로 집을 잃은 고 씨

 무장대를 추격하는 토벌대
 무장대를 추격하는 토벌대

토벌대 사이에서 담을 쌓는 주민들의 모습
토벌대 사이에서 담을 쌓는 주민들의 모습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독립을 했다는 즐거움이 사그라든 후 세상은 굉장히 혼란스러웠다는 것입니다. 정부는 없었지만 우리는 통치 받고 있었고 군대는 없었지만 공산주의자들이 일부 껴 있던 경찰대가 있었습니다. 이 파괴 분자들의 세력은 밤에 남몰래 북에서 내려오는 동료들로 인해 강화되었습니다. 그리고 대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위의 내레이션을 통해 알 수 있듯 영화는 무장대와 토벌대 사이에서 희생당한 민간인들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긴 하지만 시각은 다분히 편파적이다. <산>은 4.3으로 아내와 아들을 잃고 어린 딸과 이웃에 홀로 남겨진 다섯 살배기 남자 아이를 데리고 거주지인 산에서 쫓기듯 도망 나와 해안에 정착한 고 씨의 삶을 그린다. 고 씨는 남자 아이 이름을 ‘사삼’이라 짓고 과거를 숨긴 채 자신의 아들로 키운다. 시간이 흘러 산으로 돌아가 재정착에 나선 고 씨는 성인이 된 사삼과 딸 을순에게 숨겨왔던 지난 일들을 밝힌다. 친남매가 아닌 것을 알게 된 사삼과 을순은 결혼을 하고 가족은 산간을 일구며 살아간다. 
 

한라산을 바라보는 고 씨
한라산을 바라보는 고 씨

 
해녀일을 하는 을순을 찾아온 사삼
해녀일을 하는 을순을 찾아온 사삼

땅을 개간하는 고 씨 가족의 모습
땅을 개간하는 고 씨 가족의 모습

 
<산>은 전반적으로 무장대의 잔혹함을 강조하며 악으로 규정하고 토벌대를 민간인을 보호하는 선으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반공선전영화의 한계를 갖는다. 4.3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전형적인 반공영화라는 점에서 새로울 것이 없지만, 흥미로운 점은 그동안 숨겨왔던 제주도의 비극과 혼란했던 당시의 상황을 전면에 드러내는 영화를 ‘이 시기 왜 제작했느냐’이다. 그 배경에는 1963년 대통령선거와 1964년의 한일회담 그리고 한라산국립공원계획 등의 관광개발을 비롯한 제주도 종합개발이라는 여러 가지 선전요인이 있었다. 

이 영화가 제작된 1963년 여름, 한국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복잡한 현안으로 혼란스러웠다. 연말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정부 여당과 야당의 선거 후보 문제로 정계는 시끄러웠으며 미국이 한일국교를 압박하며 한일회담이라는 뜨거운 이슈가 연일 뉴스에 오르내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3년 6월 초 박정희의 제주도 시찰 후 4.3사건 이재민 복구사업 지시가 내려졌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공고문을 통해 이 사업이 영화 제작에 중요한 배경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부가 제주도를 다방면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이재민의 재정착이 필요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4.3을 언급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특히 제주도의 관광개발을 위해서 새로운 선전과 홍보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제주도를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 홍보 선전하기 위해 과거를 어떤 식으로든 매듭짓고 포장하는 전략 중 하나로써 이 영화가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63년 이재민 복구사업 공고문
1963년 이재민 복구사업 공고문

무장대에 고문당하는 주민
무장대에 고문당하는 주민

토벌대와 맞서는 무장대 대장과 대원들
토벌대와 맞서는 무장대 대장과 대원들

제작 주체인 미 공보원은 한일국교 이후 제주도를 방문할 해외 관광객들과 4.3 이후 일본으로 이주한 수많은 제주도 출신 재일교포들의 문제도 염두에 두었을지 모른다. 따라서 영화는 제주도의 비극적인 역사를 다루되 4.3은 한국 내부의 사상전쟁으로 벌어진 지나간 과거이며, 현재 제주도는 공산주의에 승리한 자유주의의 희망이 피어나는 새로운 땅이라는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제시한다. 제작주체인 미 공보원은 4.3 당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미군정의 모습은 삭제한다. “어떻게, 왜 일어났는지” 밝힐 계획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미 공보원은 그보다는 영화에서 악의 무리로 그려지는 무장대의 재현에 심혈을 기울인다. 제작진은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를 모델로 한 극 중 배역에 조천중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홍성중을 캐스팅했는데, 조천중학교는 바로 이덕구가 교사로 재직한 학교였다. 홍성중은 이 영화를 계기로 영화배우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그는 <산>을 촬영할 당시 겪었던 내적 갈등을 2015년 한국영상자료원 구술사3)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는 4.3과 이덕구에 대한 엇갈린 평가, 무고하게 희생된 주민들의 비극을 내색하지 못하고 지시하는 대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던 제주도민의 정체성을 담담히 밝힌다.   

1950~1970년대 제주도는 국가 홍보선전영화에서 주로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관광지역으로 그려졌으며, 극영화에서는 문명이 곳곳에 닿지 않은 낙후된 지역으로 그려지곤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산>은 거의 유일하게 4.3을 다룬 영화라는 특징을 갖지만 그 이면에는 한국 정부와 미국 공보기관의 프로파간다 전략이 있었던 것이다. 

1) <산(The Mountain)> - 한국영상자료원 험프리 렌지(Humphrey W. Leynse) 콜렉션 소장자료
2) 고려대학교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3) 한국영상자료원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1 - 윤일봉‧홍성중‧고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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