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미완성 100주년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19-11-08조회 24,564
단성사 사진
<단성사>

올해는 한국영화 100주년의 해다.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에서 김도산이 연출한 연쇄극 <의리적 구토> 이후 1세기, 한국영화는 100년을 살았다. 올해 한국영화계는 그 세월을 기념하는 다양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많은 영화제에서 100주년을 기념하는 섹션을 만들었고, 학계와 관련 기관에서 학술 작업이 이뤄졌다. 그 중심은 한국영화10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로, 10월 27일 ‘영화의 날’에 포커스를 맞춰 여러 사업과 학술 행사와 공연을 준비했다. 100명의 감독이 100초의 러닝타임으로 단편영화를 제작했으며, ‘한국영화 100장면’을 담은 책자도 발간되었다. 타임캡슐 이벤트, 영화인과 대중의 만남, 관련 전시 등도 있었다. 풍성했다.

하지만 하나가 빠졌다. 100년이라는 역사는 있건만, 그 역사를 담은 책은 없다. 한국영화 100장면에 대한 책이 나온다고 하지만, 그건 여러 필자들의 조각 글을 모은 것일 뿐이다. 역사가의 관점이 투영된, 한 세기의 우리 영화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한 책은 ‘한국영화 100주년’을 맞이하는 2019년에 나오지 않는다. 기술되지 않은 역사를 역사라 할 수 있을까? 우리에겐 물리적으로 100주년이 왔을 뿐, 역사적으로 100년이 정리된 것은 아니다. 

물론 한국영화사를 다룬 책은 종종 나왔다. 여러 필자들의 논문을 모은 전문서나 사실 나열 중심의 연보 스타일 서적이 있었고, 핵심을 간추린 소책자 형식도 있었다. 하지만 한 명의 역사가가 자신이 선택한 자료와 방법론과 관점을 통해 만든, 이른바 ‘통사’는 한국영화사를 대대적으로 기념하는 이 시점에 나오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런 책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50년 전인 1969년, 지금은 세상을 떠난 이영일 선생이 <한국영화전사>를 내놓았다. 반 세기 한국영화에 대한 통사인 이 책은, 내가 접한 유일한 ‘제대로 된’ 한국영화 통사 서적이다. 여기서 ‘제대로’라는 건 저술 자체의 퀄리티를 의미하는 건 아니다. 이 책을 쓸 당시 선생의 나이가 30대 중반 정도였고 전범으로 삼을 만한 선행된 작업도 없었으니, 꽤 두툼한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젊은 영화사가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덤벼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통해 한국영화 50년은 비로소 역사가 되었다. 

<한국영화전사>가 나온 지 50년이 흘렀다. 그 50년 동안 그 누구도 통사다운 통사를 쓰지 않았고, 이제 100주년을 맞이했다. 이번 기념사업을 제대로 의미 있게 하려고 했다면, 공모를 통해 몇 년 전부터 뜻 있는 연구자를 선정해 지원하고 올해 그 성과물을 내놓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업회는 부랴부랴 꾸려졌고, 그런 비전을 품기엔 시간이 너무 없었다. 적잖은 영화제와 저널과 기관에서 100주년을 이야기하지만, 결국 특별전을 하고 리스트를 뽑을 뿐이다. 조금은 아이러니다. 한국영화가 100년이 되었다는데, 우린 그 100년의 정체를 명확히 알지 못한다. 그저 몇 편의 영화 제목과 감독과 배우의 이름이 환기될 뿐이다.
 

바란다면, 한국영화 100주년이 한국영화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역사 서술의 계기라도 되었으면 한다. 특정 시기를 다룬 시대사나 배우나 정책 같은 특정 테마에 관한 개별사, 혹은 감독과 배우에 대해 계보를 그린 책들은 있었고 그 성과들도 꽤 된다. 이젠 그런 연구 성과들을 토대로, 다수의 연구자들이 각자의 시점을 견지하며 이영일 선생이 채우지 못한 50년을 아우른 한국영화사를 정리할 때가 왔다. 여기엔 지구력 있는 공적 자금의 지원이 필요하고, 어떤 사명감을 지닌 영화사가가 필요하며, 그들에겐 자유롭게 자료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좀 더 바란다면, 조금은 개성 있는 통사가 나왔으면 한다. 지금까지 한국영화사가 몇몇 남성 작가 감독들을 만신전에 봉헌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면, 이젠 그들을 조금은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겠다. 역사적 사실 나열이 아닌, 당대의 문화적 맥락이 반영된 해석 중심의 영화사도 있었으면 좋겠다. 장르나 산업 같은 키워드를 중심으로 100년을 재해석한 작업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본다. 1세기를 맞이한 한국영화. 올해 화려한 이벤트 이후엔 ‘비로소’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