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산
Kim Do-san / 金陶山 / 1891  ~  1921
본명
김영근 (Kim Yeong-geun)
대표분야
감독, 배우, 시나리오
활동년대
191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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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국경(國境) (김도산, 1923)
의적 (김도산, 1920)
형사의 고심 (김도산, 1919)
시우정(是友情) (김도산, 1919)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 (김도산, 1919)

주요경력

1911년 임성구의 혁신단 조직에 참가
1919년 10월 27일 최초의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 상연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김도산은 서울 출생으로 상동예배당 안에 있는 상동학교를 다녔다. 신극의 선구자인 이인직의 문하에서 배웠다. 원각사에서 활동하다가 원각사가 해체 한 1911년 임성구, 김소랑, 박창한 등과 더불어 혁신단을 조직하였다. 이후 김소랑과 개량단을 조직하지만, 1917년 김소랑이 따로 취성좌를 조직하자 김도산도 신극좌를 조직하고 단성사를 중심으로 공연을 하였다. 내한한 일본극단의 연쇄극에 자극을 받은 김도산은 1919년 단성사주 박승필의 후원을 얻어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촬영하였다. 기술적 문제 때문에 일본 덴카쓰(天活) 소속 기사 미야카와 소우노스케(宮川早之助)를 데려와야 했지만, 1919년 10월 27일 일반에 공개된 <의리적 구토>는 한국영화사에 있어서 한 획을 그은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김종원). 김도산의 연쇄극이 큰 성공을 거두자, 임성구 일행과 김소랑 일행도 연쇄극을 촬영하기 시작하였다. 김도산은 계속해서 <시우정(是友情)>, <형사고심>(1919), <의적> 등의 연쇄극을 촬영, 공개하였다. 불행히도, 연쇄극을 촬영하다 교통사고를 당한 김도산은 1921년 7월 26일 사망하였다(동아일보; 이청기; 한국영화감독사전).

* 참고문헌
동아일보 1925년 11월 18일 5면.
이청기, <한국영화의 전사시대 및 발생기의 특성에 관한 연구>, <<예술논문집>> 제6집, 대한민국예술원, 1967.
<<한국영화감독사전>>
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및 DB구축 감수, 2011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 영근. 1891년 서울 충무로 출생으로 미션계인 상동학교를 졸업했다. 일찍이 이인직의 문하생으로서 원각사 시절부터 연극수업을 했으며, 1911년 임성구의 신파극단 혁신단에 가담한 후, 1912년 제 3회 공연부터 출연, 배우가 되었다. 원각사 계열의 예성좌가 해산하자 일부 단원과 이경환, 변기종, 김영덕 등 30여명을 모아 대구의 부호 정인기의 후원으로 극단 신극좌를 창설, 단장이 되었다. 1918년 7월 5일, 황금관 신축 2주년을 맞아 내한한 일본의 지방순회 신파극단 세도나이까이 일행의 기념공연 연쇄극 <불여귀>와 <자기의 죄>등에 크게 자극받아 1919년 10월 27일 단성사주 박승필의 적극적인 지원 아래 연극 속에 영화를 얹은 활동사진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무대에 올림으로써 한국영화의 기점을 장식한다. 이 땅에 영화가 들어온지 22년 만이었다. 이 작품의 구성원을 보면 제작 박승필, 감독 주연 김도산, 촬영 편집 미야카와 소우노스케, 배역진은 주인공인 송산역의 김도산을 비롯, 그의 결의 형제 죽산역에 이경환, 매초역에 윤화, 계모역에는 여장 남배우 김영덕등 모두 신극좌 단원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촬영 편집과 같은 기술부문은 일본인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미야카와는 단성사와 특약관계인 덴카스 소속 촬영기사. 이 작품은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활극조의 신파 연쇄극이다. 청년 송산은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찍이 모친을 여의고 재산을 탐내는 계모 슬하에서 불우하게 자라났다. 우연히 뜻이 맞는 죽산과 매초를 만나 의형제를 맺게 되면서 현실의 장애와 싸우기로 다짐한다. 계모의 흉계가 극심해져 송산의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의동생들이 격분해서 도우려고 하지만 송산은 가문의 위신을 생각해서 참고 견딘다. 이런 가운데 송산은 응징의 결단을 내려야 하는 최후의 날을 맞는다. 김도산은 이 작품의 시도가 성공하자 신극좌에서 잇따라 연쇄극 2부작 <시우정>(1919년,전 8막 30장),<형사의 고심>(1919년,1권)과 가난한 사람을 위해 탐관오리를 척결하는 <의적>(1920년,2권)등을 발표. 이어서 <경은중보>(1920년,7막 37장),<천명>(1920년,9막 38장),<명천>(1920년,1권)등을 연출, 과도기의 흥행계를 이끌었다. 이 모두 <의리적 구토>를 찍은 일본 덴카스 소속 미야카와의 호흡 아래 이루어진 결과였다. 그러나 그는 한강에서 연쇄극을 찍던 중에 낙상 사고와 늑막염까지 겹치면서 1921년 7월 26일 밤 11시 31살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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