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짐승의 끝 조성희,2010

by.김도훈(영화저널리스트, 허프포스트코리아 편집장) 2016-05-30조회 8,249
짐승의 끝 스틸

홍길동이 시골 도로에 길을 잃은 채 서 있는 장면을 보며 이것은 확실히 <짐승의 끝>(2008)의 상업적 연속면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과거와 현재로부터 미래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이 낯선 사람들과 동행하는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조성희의 데뷔작을 떠올리게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은 확실히 조성희의 영화고, 지금 한국 영화계에서 조성희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다. 

물론 단편 <남매의 집>(2008)에 열광했던 당신은 장편 데뷔작 <짐승의 끝>(2010)을 보고 길을 잃었거나, <늑대소년>(2012)과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에 낙담했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조성희의 영화가 점점 데뷔작의 근사한 악몽을 잃어가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오히려 조성희의 영화가 데뷔작의 악몽을 더욱 본격적으로 풀어나가는 중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더 자세히 알기 위해서는 <짐승의 끝>을 다시 돌이켜 볼 필요도 있다. 

 <짐승의 끝>은 부조리한 SF 재난 영화다. 아이를 낳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만삭의 여자는 이상한 남자를 만난 뒤 쓰러진다. 일어나보니 세상은 멸망했다. 그녀는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지만 모두가 이상하다. 밤은 계속된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거대한 짐승의 소리가 들려온다. 이것은 한국영화의 부조리극 속에 던져 넣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고,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키워드로 해석할 수 있는 영화다. 그런데 나는 <짐승의 끝>을 보자마자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초창기의 스필버그 사단의 영화들이 강하게 떠올랐다. 

사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한국 감독으로서 80년대 초중반 스필버그 사단과 당대 할리우드가 만들어 낸 상업영화의 영향력을 받지 않았을 도리는 거의 없다. 어린 시절 B급 SF/호러영화들, 그리고 TV 시리즈 <환상특급>을 보고 자란 세대의 문화적 결과물에는 어떤 동일한 무의식적 인장이 찍혀있다. 그건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당시 스필버그 사단의 장르 영화들을 다시 꺼내보는 순간 당신은 적잖게 놀랄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지금 할리우드가 조 단테의 <그렘린>처럼 화면 바깥의 피비린내가 자욱한 영화를 PG-13으로 개봉할 수 있을까? 스필버그의 몇몇 영화들(특히 <인디아나 존스 2>)은 거의 소년들의 악몽이다. 

<늑대 소년>에서 조성희는 적극적으로 팀 버튼의 <가위손>, 80년대 늑대인간 장르영화 <하울링>과 <런던의 늑대 인간>, 그리고 스필버그의 < E.T. >를 끌어온다. 그가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비밀>에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와 007 영화에 일종의 오마주를 바치고 있다는 것도 거의 분명하다. 그는 이 영화 속 누아르의 관습과 스타일의 표본으로 <말타의 매>를 자주 언급하고 있는데, 나는 어떤 면에서 조성희가 누아르 전성기의 영화들이 아니라 워렌 비티의 <딕 트레이시>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런데 조성희 영화의 재미있는 점은 균열이다. 그는 순진무구해 보이지만 오히려 지금의 블록버스터보다 더 B급으로 음침하고 못된 구석이 있던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관습을 2010년대 충무로 상업영화의 관습과 마구잡이로 버무린다. 그것은 타협처럼 보이지만 타협이 아니다. 균열이다. 그리고 조성희는 두 개의 균열을 지나칠 정도로 매끈하게 이어붙이는 데 강박적인 공은 들이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늑대소년>과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의 비밀>은 80년대 할리우드 영화도 아니고 2010년대의 충무로 영화도 아닌, 홀로 뚝 떨어진 영화가 됐다. 비평가들이 겨우 2편의 상업적 장편영화를 만든 그를 이야기하며 ‘조성희 월드’라는 단어를 애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지금 다시 <짐승의 끝>을 돌아보는 건 꽤 흥미진진한 경험이다. 당시 그는 <남매의 집>의 가능성을 이 첫 번째 장편영화에서 제대로 펼쳐내지 못했다는 비평을 꽤 받았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그런 비평들은 조성희를 아트하우스 영화의 결계 속에서 해석하려고 시도한 탓일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오히려 <짐승의 끝>은 가장 상업적인 대학 졸업영화를 만들어내려는 오락적 결기가 느껴지는 영화다. 이런 음침하고 즐거운 결기를 나는 아마도 극장판 <환상특급>(1983)에서 조 단테가 연출한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봤던 것 같다. 그 에피소드의 제목은 ‘이상한 소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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