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사도 이준익, 2015

by.장성란(영화 저널리스트) 2016-10-13조회 3,748
사도 스틸

“이것은 나랏일이 아니고 집안일이야.” 극 초반, 아들인 세자(유아인)에게 자신을 죽이려 했던 혐의를 물으며 영조(송강호)가 하는 말이다. 이는 <사도>의 선언이나 다름없다. 임오화변(壬午禍變, 1762년)의 비극을, 영조와 사도 세자의 치밀한 인간 심리와 뒤틀린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탐구하겠다는 야심 찬 선언 말이다. 그간 여러 영화와 TV 드라마가 임오화변, 조선 왕실의 가장 비극적 사건을 끊임없이 호출해왔다. 하지만, 아비가 새파랗게 젊은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이기까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애증의 우주가 펼쳐졌는지, 그 관계의 복잡·미묘한 속살을 이렇게 인간적으로 해석한 작품은 없었다.

 <사도>는 세자가 뒤주에 들어가 숨을 거두기까지 아홉 날을 하루하루 차례로 보여준다. 그 사이사이, 세자가 태어난 뒤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그려 보인다. 아비와 아들은 원래 서로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데 지금은 같은 하늘 아래 함께 숨 쉴 수 없는 사이가 됐다. 그 안에는 두 사람의 고유한 성격과 왕좌의 무게, 당대의 사회?정치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돌이킬 수 없게 돼버린 부자의 현재가 흐르는 가운데, 둘의 다단한 과거를 살펴보는 형식은 인간관계란 우물이 얼마나 그 속을 가늠하기 힘든 것인지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똑같은 장면에서 영조는 다시 한 번 말한다. “나는 지금 가장으로서 애비를 죽이려고 한 자식을 처벌하는 것이야.”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다. 이 영화의 영조는 고유한 성격을 지닌 개인인 동시에 조선의 왕이다. 음모와 반정, 파벌 간의 알력이 끊이지 않는 궁중에서 일평생 살며, 임금으로서 자신의 말 한마디, 사소한 모습 하나가 어떤 파문을 일으키는지 누구보다 혹독하게 겪어왔다. 필연적으로 그는 왕좌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존재다. 까다롭고 결벽증에 가까운 성격은 타고난 성질이자, 궁중에서 살면서 더욱 그러하게 깎인 것이다. 그건 세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총명하고 활동적이며 자유분방한 기질을 타고 태어났다. 그 총명함을 높이 사던 영조가 자신의 기대와 어긋나는 그에게 실망한 뒤로, 영조는 그에게 신경질을 부리듯 수시로 야단을 친다. 이에 피가 마르던 세자는 숨 막히는 궁궐 생활에 회의를 느끼고 점점 더 엇나간다. 어떤 사람의 ‘꼴’이 완성되고 그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그의 의지 혹은 개성과, 환경적 요인 혹은 불가항력의 운명이 불가분의 함수 관계를 이루는 기묘한 풍경, ‘사도’는 바로 그 지점을 들여다본다. 한국 궁중 사극에서 그 미묘하고 복잡한 소우주를 이렇게도 또렷하게 포착해낸 작품이 또 있었던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어떠한 이야기든 인간관계라는 상호 작용, 그 미시적 세계의 아름다움과 안타까움을 그릴 때 빛난다. 그가 연출한 또 다른 사극 <왕의 남자>(2005)만 떠올려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이준익 감독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영화는 조선 연산군 시대, 연산(정진영)과 두 광대(감우성, 이준기) 사이를 오가는 위태롭고도 애절한 감정을 그린다. 그 감정은 동성애 혹은 우애 혹은 애정, 어느 하나의 말로 규정할 수 없는 복잡?미묘한 것이다. 오히려, 이준익 감독의 사극은 인물과 인물의 관계에 집중하는 대신, 그 시대의 초상과 풍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려 할 때 빛을 잃는다. 임진왜란 직전의 조선을 배경으로 한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이 그러한 경우다.

 <사도>에서 인간의 마음, 그 오묘한 천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제일 요소는 송강호유아인 두 배우의 연기다. 특히, 사도를 뒤주에 가두라는 명령을 내리는 순간, 클로즈업으로 보이는 영조의 얼굴. 거기에는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군주의 결단과 아비의 회한, 자신의 명령에 신하들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살피는 예리함, 그것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 내다보는 명민함이 전부 어려 있다. 진정 놀라운 연기다. <사도>는 임오화변의 두 인물, 영조와 사도의 ‘개인’으로서 조명하고, 그들의 인간적 관계를 파고듦으로써 역설적으로 시대를 초월하는 일반성을 얻는다. 누구보다 서로를 잘 이해하지만 그래서 미워할 수밖에 없는 애증이라는 감정,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틀어진 인간관계, 강압적인 부모와 그 때문에 힘들어하는 자녀…. 이 영화가 그리는 영조와 사도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그 복잡한 질서, 그 영원불멸의 미스터리를 투영하는 거울이 된다.

아쉬운 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개봉 당시 많은 이들이 지적했던 대로, <사도>의 결말은 그 전까지 이 영화가 그려 보인, 오묘한 세계를 스스로 쪼그라뜨린다. 영조와 세자의 그 모든 이야기가 사도의 아들이자 영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소지섭)를 위한 것이었다는 식의 결말 말이다. 영조와 사도 사이에 얽힌 온갖 감정의 실타래, 그 복합적 의미의 여운을 고스란히 비추는 결말이었다면 어땠을까. 조선 왕조의 가장 비극적인 역사에 인간 감정의 현미경을 들이댄 이 영화가 들여다본 그 넓은 세계에 걸맞은 결말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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