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쇠사슬을 끊어라 이만희, 1971

by.강소원(영화평론가) 2017-10-26조회 2,663
쇠사슬을 끊어라 포스터 이미지

1930년대 만주 벌판을 무대로 항일 투쟁에 나선 독립투사들의 이야기에 만주에서 악명 높은 세 악당이 호출된다. 영화에서 한 번도 이름이 불리지 않는 정체불명의 도적(장동휘), 독립군의 청부를 받은 철수(남궁원), 일본군의 밀정으로 알려진 달건(허장강). 그 어떤 신념도 신의도 없이 오직 자신의 이윤을 좇아 만주 벌판을 종횡무진하던 무법의 국외자들이 독립투사들의 명단이 숨겨져 있는 티베트 불상을 찾아 나선다. 이만희 감독의 1971년 작 <쇠사슬을 끊어라>는 만주 활극이라는 장르의 시효가 거의 끝난 시기에 등장하였다. 돌이켜보면 감독 자신의 황금기도 저물어갈 무렵이었다. 시효를 다한 장르를 붙잡고 2년 만에 귀환한 이만희는 전에 없이 낙관적이며 유쾌한 세계를 펼쳐 보인다. 이만희 영화에 대한 나의 협소한 이해를 전제한 채 말하자면, 내게 <쇠사슬을 끊어라>는 이만희의 가장 재밌는 영화이자 (조금 특수한 의미에서) 그의 사적이며 급진적인 영화로 기억되었다. 

대체로 <쇠사슬을 끊어라>의 재미는 순수한 엔터테인먼트를 지향하는 액션 활극이라는 점에서 기인되지만 사실 이 영화의 액션 설계는 그리 정교하지 않다. 대충 뚝딱뚝딱 이어붙인 듯 성기고 다소 무성의하기까지 한 액션 신들은 때론 의도치 않은 반응(가령 감탄 대신 웃음)을 불러오는 반면, 극적 국면에 맞추어 도적과 철수가 번갈아 가며 달건의 뺨을 후려치거나 귀와 코를 물어뜯는 식의 난장 같은 결투가 소소한 즐거움을 안겨준다. 게다가 가죽 재킷과 호피 무늬 코트, 붉은 스카프, 양복, 트렌치코트 등 국적과 시대뿐 아니라 계절조차 초월한 의상과 웨스턴 공간에 말과 마차는 물론 지프차, 오토바이, 심지어 스키까지 온갖 탈 것들이 등장하는 ‘무국적’적이고 무정부적인 설정들이 흥미로운 구경거리를 이룬다. 어쩌면 이만희는, 당대 만주 활극에 따라붙던 조롱 섞인 비평적 수사인 ‘무국적’이라는 성격에 매혹되어 뒤늦게 이 장르에 몸을 실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6, 70년대 이 땅에서는 불가능한 어떤 것을, 무국적의 상상적 공간에서 펼쳐 보일 가능성을, 만주 활극에서 찾은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특정 시대나 국가에 귀속되지 않는 무정부주의적인 주인공들에게서 이만희의 어떤 꿈을 엿보았던 것만 같다. 

내가 아는 이만희의 영화들은 인공적인 공간 안에서 비극적 숙명을 맞이하는 인물들을 담은 깊은 우울과 도저한 체념의 산물이다. <쇠사슬을 끊어라>의 놀라움은 그런 이만희의 세계와 완전히 절연된 시공간이 안긴 인상과 이만희 특유의 존재론적 그늘이 말끔히 거둬진 명랑한 인물들에게서 왔다. 특히 세 주인공들이 압권이다. 김지운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이 많은 부분 차용한 것으로 알려진 이 영화에는 명백히 착한 놈은 아닌데 나쁜 놈이라기엔 사악함이 부족한, 그저 이상한 놈들만 셋이 나온다. 도적과 독립군의 청부업자와 일본 밀정 사이에서 도덕적 우열을 가리는 것은 무의미하다. 서로 배신을 일삼지만 결코 노하는 일이 없는 그들은 언뜻 우정을 쌓는 듯 보이지만 실은 언제나 적이다. 무엇보다 그들은 국가나 민족, 정의나 신념이라는 개념 저 너머의 존재들이다. 당대 관객들이 이 이상한 인물들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들은 아무런 회의도 각성도 없는 인물들이라는 점에서 한국영화사에서 희귀한 존재들이다. 이만희는 자기 시대로부터 멀리, 이 땅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이 무정부주의적인 인물들을 성립시킨 후 기어이 그들을 긍정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이 세계는 치명적일 수 없다. 아무도 죽지 않고 심각한 부상을 입는 이도 없는 이 세계는 일제 강점기 항일 투쟁의 역사적 장으로서가 아니라 국경도 민족도 정체성도 없는 상상적 공간으로 구축되었다. 서사의 정교함이 떨어지는 대목들도 문제가 되진 않는다. 이를테면 서사적 절정인 불상을 찾는 과정은 납득할 만한 설정 없이 압축적으로 처리되고, 불상이 일본군의 손에 넘어간 즈음(영화의 중반) 서사는 종결되기를 억지스럽게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이만희에게 중요한 것은 서사적 디테일이나 향방이 아니라 서사적 국면에 따른 인물들의 반응이었던 게 아닐까. 그렇기에 이 이야기의 큰 줄기는 뻔한데, 각 국면에 처한 인물들의 반응만은 우리의 예상대로 전개되는 법이 없다. 그리고 그 반응이 이 영화가 품고 있는 무정부주의적인 활력과 전복적인 쾌감의 요체가 된다. 

결말에 이르는 과정도 그렇다. 독립군과 일본군의 격렬한 전투가 펼쳐지는 와중에 (예상치 못하게) 그들은 “나완 상관없는 일”이니 “몸이나 녹이자”며 전장 한가운데 캠핑이라도 나온 듯 모닥불을 피워 마주 앉는다. 이 터무니없이 한가하고 낙관적인 장면을 거쳐 (예상대로) 마침내 독립군의 손에 불상을 건네고 나면, 이제 그들에겐 (장르적 형식의 일부로서) 떠날 일만 남았다. 이 무법의 국외자들이 선택한 것은 앞선 신에서 표명된 것(“한국, 한국인”)과는 달리 국적과 민족이 지워진 저 너머의 세계다. 그곳엔 밤 대신 태양만이 영원하리라 믿으며. 저 멀리 붉게 물든 지평선을 향해 달려가는 세 국외자들의 뒷모습에는 이만희의 동경 어린 시선이 투영되어 있다. 태양은 이미 지고 있었지만, 이만희의 이 희귀한 낙관만은 결코 빛을 잃지 않는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