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2014

by.조영각(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2015-06-30조회 5,070
한여름의 판타지아  스틸

일본 나라현 고조시. 장건재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의 배경이 된 공간이다. 장건재 감독은 자전적인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왔다. <회오리바람>은 자신의 10대 시절의 방황과 사랑을 담았고, <잠 못 드는 밤>은 아이를 낳기 직전 앞으로의 삶을 고민하는 부부의 이야기이다. 매우 사실적이면서도 조곤조곤하게 자신의 지나간 삶을 반추하고, 미래를 근심하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영화를 만들어왔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도 비슷하게 시작한다. 단 배경이 낯선 공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 다르다. 흑백으로 진행되는 1부는 고조에서 영화를 찍기로 한 감독의 이야기이다. 감독 태훈(임형국)은 통역 미정(김새벽)과 함께 고조를 돌아보며 그곳의 사람들을 만난다. 카페와 거리 그리고 오래된 집에서 만난 사람들. 여기에는 두 명의 현지인 가이드도 포함된다. 젊은 공무원 유스케(이와세 료)를 제외하고는 모두 나이든 어른들이다. 그들을 통해 고조의 풍경뿐만 아니라 고조의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나 태훈은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들 것인지에 대해선 이야기하지 않는다. 마치 확신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1부의 말미. 학교에서 벽에 걸린 사진을 통해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어린 시절을 본다. 가이드는 사진 속의 어린아이가 자신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장면은 감독의 꿈으로 이어진다. 변화 없는 적막한 공간을 오랜 시간 지켜왔을 사람들의 과거 표정이 작은 사진을 통해 표현되는 장면은 2부에 펼쳐질 로맨스를 암시하는 듯하다. 

칼라로 이어지는 2부는 여행지에서 있을 법한 로맨스이다. 한국에서 여행 온 혜정(김새벽)이 고조에서 감 농사를 짓는 청년 유스케(이와세 료)를 만난다. 둘은 대화를 나누며 조금씩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미묘한 감정이 형성된다. 설레고 흥분되는 하룻밤의 꿈 같은 이야기. 2부의 로맨스는 현재의 이야기이지만, 1부에서 드러난 이야기들과 기묘하게 겹쳐지면서 마치 두 개의 이야기를 보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의도된 착시 효과를 통해 과거와 현재를 공존하게 만들고, 현실과 환상을 겹쳐지게 만드는 영화적 장치는 장건재 감독의 장기이다. 이런 장치를 통해 영화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어냈다. 김새벽과 이와세 료가 1인 2역을 맡으면서 그런 효과는 더욱 증폭되고, 한여름 시골의 나른한 공기 속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데 성공한다.

유스케는 혜정에게 남자친구가 되어달라고 수작을 걸면서 불꽃 축제에 가자고 꼬드기지만 혜정의 정중한 거절로 함께하지 못한다. 하지만 작은 마을에서 벌어지는 불꽃 축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유스케가 본 불꽃을 혜정도 볼 수 있다. 둘은 따로 있지만 마치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한여름의 판타지는 완성된다. 결국 1부의 감독 태훈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작은 사진 속 아이의 표정을 통해 고조에서의 로맨스를 완성해 낸 것이다.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로맨스 영화이기도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함께 그 결과를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창작의 고단함과 함께 요구되는 열정을 보여주는 다른 영화들과는 다르게 뭔지 모를 나른함 속에 찰나의 환희를 맛보는 기쁨을 전달해 준다. 감독은 그 찰나를 담아내기 위해 절치부심했을 것이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이고 판타지이지만, 잘 만들어진 영화의 판타지는 현실을 통해 드러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해준다. 시골 마을의 조용한 풍경과 그곳에 있을 것 같은 사람들의 표정. 배우들의 연기 그리고 기쁨과 아쉬움의 순간이 오래도록 남는 영화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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