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필
Park Seung-pil / 朴承弼 / 1875  ~  1932
대표분야
제작/기획
활동년대
1910,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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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 :
장화홍련전 (김영환, 1924)
국경(國境) (김도산, 1923)
학생절의 (임성구, 1920)
의적 (김도산, 1920)
경성전시의 경 (, 1919)
시우정(是友情) (김도산, 1919)
고종인산실경(高宗因山實景) (, 1919)
형사의 고심 (김도산, 1919)
경성교외전경(京城郊外全景) (, 1919)
의리적 구토(義理的仇討) (김도산, 1919)

주요경력

1908년 한성전기회사 소유주인 미국인 골브란에게 광무대 임대, 운영
1913년 일본인 소유 극장 연기관을 임대하여 광무대로 간판을 바꾸고 운영
1927년 일본인 다무라 미네에게 단성사 임대
1918년 12월 21일 단성사 확장 공사 후 개관
1924년 단성사에 촬영부 설치 후 영화 제작
광무대 설립 및 대표(1908)
단성사 사장(1914)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박승필은 한국영화를 최초로 개척한 인물 중에 하나였다. 박승필은 1908년 광무대라는 구극(舊劇)극장을 세웠다. 당시 광무대는 유일한 구극극장이었기 때문에 고전음악, 광대 줄타기, 기생의 가무재담, 검무 등이 행해졌으며,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등 구극이 상연되었다. 유명한 명창인 송만갑, 김창환, 이동백 등이 광무대의 전속배우로 있었다고 한다(이청기; 중외일보b; 동아일보a).
1918년에는 단성사를 인수하여 경영하였다. 소유주는 일본인 다무라 미네(田村ミネ)였고, 박승필은 경영을 책임지는 구도였다(중외일보c). 단성사를 통해 박승필은 한국 영화의 시작을 만들게 된다. 그는 김도산의 연쇄극 촬영제의를 받아들여서 5천원을 제공하였고, 일본인 촬영기사를 초빙하였다. 박승필의 후원 속에서 1919년 한국 최초의 연쇄극인 <의리적 구토>가 제작된 것이다. 그리고 최초의 실사기록영화인 <대경성전시의 경(景)>과 <경성교외전경>도 제작하여 단성사에서 공개하였다. 이후에도 단성사 내에 촬영부를 두어 <장화홍련전>(1924)을 제작하고, 나운규프로덕션에 재정적 지원을 하는 등 영화에 관한 투자를 계속하였다(이청기). 이 영화는 제작·각본·감독·촬영·편집 등 일본인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의 손으로 완성했다는 데에 영화사적 의미가 있다. <장화홍련전>의 경우 제작·각본·감독·촬영·편집 등 일본인에 의존하지 않고 만들었다는 데에 영화사적 의미가 있다(김종원).
그의 영화에 대한 관심은 대단하였다. 단성사에서는 활동사진 촬영부를 두기로 했는데 그 이름을 금강키네마로 하였다. 박승필은 삼 개월에 한 편씩 일 년에 네 편의 영화를 제작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계획 아래서 금강키네마의 제1회 작품으로 <낙화유수>(1927)를 제작하였다(중외일보a). 광무대와 단성사를 운영한 한국영화의 개척자는 1932년 1월 4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동아일보b). 영결식은 단성사 장으로 8일 오전 9시 단성사 광장에서 거행 되었다.

* 참고문헌
중외일보a 1927년 8월 18일 3면.
중외일보b 1929년 11월 1일 3면.
중외일보c 1929년 11월 2일 3면.
동아일보a 1931년 7월 2일 5면.
동아일보b 1932년 1월 5일 3면.
이청기, 「한국영화의 전사시대 및 발생기의 특성에 관한 연구」,『예술논문집』, 대한민국예술원, 1967, 229~248쪽.
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및 DB구축 감수, 2011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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