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극장 4. 단성사

by.한상언 (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2019-06-03
단성사 사진
사진 1. 토키영화관으로 신축된 단성사


단성사는, 연예계를 발전시키고 그 수익으로 교육을 장려하는 동시에 자선 사업을 할 목적으로 지명근(池明根), 박태일(朴太一), 주수영(朱壽榮) 등의 한성 상인들이 발기하여 1907년 파조교(罷朝橋) 인근에 세운 극장이다. 개관 초기의 모습은 알 수 없으나, 신파극을 연행하는 데 적절치 못할 정도로 무대가 좁아서 임시로 내부를 수리하기 위해 영업을 정지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다른 극장들처럼, 경영 미숙과 전황(錢荒)으로 인한 곤란으로 단성사의 경영자와 소유자는 자주 교체되었다. 단성사는 경영 상태 정상화를 위해 파노라마식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했는데 승전무(勝戰舞), 승무(僧舞), 전기호접무(電氣胡蝶舞), 환등, 활동사진 등이 공연되었다.

1913년 안재묵(安在黙)이 단성사의 운영권을 획득하며 대대적인 신축을 단행한다. 1914년 1월에 신축 낙성된 단성사는 총 건축비 1만 1천 원의 2층 건물로, 외관은 서양식으로 장식했고 내부는 일본식 극장 구조를 따랐다. 정원 1,000명 규모의 객석은 1, 2등석(2층 객석 및 박스석)에 다다미를 깔아 신을 벗고 입장하도록 했고, 1층의 하등석에는 장의자를 깔아 앉아서 볼 수 있도록 했다.

호화롭게 신축한 단성사는 1915년 2월 18일 화재를 당해 벽만 남은 채 소실되었다. 상등석 옆방에서 차를 팔던 안성범(安聖範)이 연극이 파한 후 화롯불을 끄지 않고 퇴근했는데, 이것이 다다미에 옮겨 붙어 극장 전체를 태운 것이었다. 화재의 원인을 제공한 안성범은 안재묵의 아버지로, 결국 실화죄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았다. 

 

사진 2. 화재 직후 단성사(《매일신보》 1915년 2월 19일자, 3면)

김연영(金然永)에게 돈을 빌려 극장을 신축했던 안재묵은 이 화재로 파산, 단성사의 소유권은 채권자 김연영에게 넘어갔다. 김연영은 내부를 수리하여 1915년 5월 단성사를 재개장했으나, 그 시설은 화재 전보다 열악할 수밖에 없었다. 

1917년 2월 김연영은 황금유원의 소유주인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에게 단성사를 매각한다. 다무라는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전환하기로 하고, 광무대를 운영하던 박승필(朴承弼)에게 그 운영을 맡겼다. 단성사의 관객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므로 이들을 대상으로 활동사진관을 운영하는 데는 조선인 경영자가 적합했다고 여겼던 것이다. 

단성사의 활동사진관 전용 허가를 신청한 지 수개월 만인 1918년 6월, 드디어 경기도 경무부로부터 허가 지령이 떨어진다. 이에 종로경찰서는 단성사가 활동사진관으로 부적절하다며 신축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아 허가를 내주었다. 박승필은 1918년 8월,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 창립 9주년 기념 공연을 마지막으로 기존의 건물을 헐고 1만 원의 예산을 들여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단성사를 개축한다. 


사진 3. 1918년 활동사진관으로 다시 지어진 단성사(《매일신보》 1918년 12월 21일자, 3면)

활동사진관으로 재탄생한 단성사는 수만 원의 보증금을 내고 일본의 영화회사 텐카츠(天活, 天然色活動写真株式会社)와 특약을 맺어 필름을 확보했으며, 조선인 변사 중 가장 큰 인기를 끌고 있던 서상호(徐相昊)를 변사주임으로 한 5~6인의 변사진을 구성했다. 또한 활동사진관 운영의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경성고등연예관과 우미관에서 실무를 맡아 왔던 영사기사 박정현(朴晶鉉)과 손을 잡았다. 박정현은 1918년 단성사로 건너와 지배인(감독)으로서 실무를 책임졌으며, 박승필 사후에는 직접 단성사를 이끌었다. 

박승필은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이용하는 동시에 공연장을 구하지 못해 경영이 곤란하던 양대 신파 극단, 즉 임성구의 혁신단과 김도산(金陶山)의 신극좌를 후원하는 데도 활용했다. 이 두 극단은 단성사 전속 극단 역할을 수행하며, 서울 공연과 지방 순회를 번갈아 공연했다. 이와 관련한 박승필의 회고를 인용해 보자.

 

신극운동을 발뎐식키려 틈틈이 배우 량성에 주력하엿스니 한 비극(悲劇)과 검극(劍劇)으로 장안에 일흠을 치든 림성구(林聖九)며 말 잘하고 모험극(冒險劇) 잘하기로 유명하든 김도산(金陶山) 가튼 명배우도 모다 박씨의 문하에서 나온 것이다. 세상에는 림성구라면 모르는 안악네가 업고 김도산이라면 모르는 청년이 업지만은 그들의 배후에 박승필 씨가 잇슴을 아는 사람은 적엇슬 것이다. 이와 가티 박씨는 구극과는 새이가 멀어지고 신극에만 주력하게 되엿다. 라서 신극흥행(新劇興行)을 서울에서만 치지 안코 전 조선적으로 진출하려 림성구 군을 중심으로 혁신단(革新團)을 조직케 하고 김도산 군을 중심으로 신극좌(新劇座)를 조직케 하야 혁신단과 신극좌가 서로 교체하여 지방을 순회하게 하엿다.”1

활동사진관으로 개관한 직후 단성사는 텐카츠로부터 키네오라마[필자 주: 특수 기구를 이용하여 여러 가지 환영을 보여주는 무대 장치] 기술을 도입하여 장치하고, 1919년 5월부터 변사들을 출연시켜 제주도에서 일어난 살옥(殺獄) 사건을 소재로 <탐라의 사몽(詐夢)>이라는 변사극을 공연했다. 그러나 곧 변사극보다는 전문 신파 극단에 의한 전기응용신파극[필자 주: 전기(電氣) 장치를 동원하여 효과를 내는 무대극]이 나으리라 판단, 신극좌와 혁신단로 하여금 전기응용극을 만들기로 하여 우선 신극좌의 좌장 김도산을 일본에 보내 키네오라마 기술을 배워 오도록 했다. 그리고 흩어진 혁신단도 재조직하여 키네오라마를 이용한 전기응용극을 시작하도록 한다.


단성사 전속 극단으로 서울과 지방을 번갈아 가며 공연하던 신극좌와 혁신단은 전기응용극에서 더 나아가 차례로 연쇄극을 제작한다. 첫 작품은 신극좌의 <의리적 구토(義理的 仇討)>, 이어 <형사의 고심(刑事苦心)>과 <시우정(是友情)>이 만들어진다. 

사진 4. 연쇄극 <의리적 구토> 광고(《매일신보》 1919년 10월 26일자, 3면)

1919년 10월 27일부터 상연된 <의리적 구토>는 원래 5일만 상연하기로 했으나 큰 인기에 힘입어 11월 18일까지 무려 25일이나 계속 상연되었다. 수지를 맞추기 위해 파격적으로 비싼 가격에 상연됐음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성공한 것이다. 이 연쇄극은 최초의 한국영화로 인정받고 있다. 

연쇄극의 황금기를 지나 무성영화 시대가 시작되자 단성사에서는 촬영기사 이필우를 초빙하여 <장화홍련전>(1924)을 직접 제작한다. 나아가 영화 제작자들이 영화 제작을 할 수 있도록 자금을 지원했는데 이를 통해 금강키네마, 원방각사 등이 조직되었으며 나운규와 같은 걸출한 영화인이 영화 제작을 할 수 있었다. 

1930년대 토키영화의 상영이 본격화되자 단성사는 이에 발 빠르게 대처한다. 1930년 설날을 맞아 조선 최초로 토키영화를 상영했고, 나아가 토키영화관으로의 전환을 꾀했다. 더불어 신무대라는 전속 극단을 두어 연극 공연에 대한 여전한 관심을 이어갔다. 

1931년 1월 단성사를 이끌던 박승필이 사망한다. 전술한 대로, 이후에는 박정현이 운영자가 되어 단성사를 이끌게 된다. 박정현은 토키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할 수 있도록 단성사 신축을 결정한다. 1934년 신축된 단성사는 650석 규모로 이전보다 객석이 대폭 줄었으나, 토키 상영용 영사기를 비롯하여 냉난방 시설과 각종 설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신축 후 단성사는 지속적으로 경영난에 봉착한다. 단성사 보다 조금 늦게 신축된 약초극장, 명치좌, 황금좌 등은 단성사보다 객석도 많았고 시설도 좋았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영화 의무상영제도가 실시되자,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하던 단성사와 남촌의 일본인 극장들 사이의 프로그램 차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여기에 서양영화의 대여 비용까지 증가하면서 단성사의 경영난은 피할 수 없었다. 이에 연극 극장으로 전환 등 자구책이 강구되었으나,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외화 가격이 폭등하면서 경영난도 가속되었다. 부채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박정현 등의 단성사 운영진은 결국 파산했으며, 1939년 그 운영권이 명치좌를 운영하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에게 넘어간다. 이시바시는 단성사를 명치좌의 2번관으로 두었으며 이름도 대륙극장이라 바꾸었다. 

해방 후 이름을 되찾은 단성사는 줄곧 한국영화사를 상징하는 장소로 존재하다가 2001년 철거, 2005년 멀티플렉스로 재건축된다. 그러나 이 역시 경영난으로 부도 처리되었고, 2015년 영안모자가 인수하여 현재 단성골드쥬얼리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1) 「각 방면의 성공 고심담 (8) / (2) 흥행계의 노장 박승필 씨」《중외일보》1929년 11월 2일자, 조간 3면

참고문헌
이순진, 『조선인극장 단성사 1907~1939』, 한국영상자료원, 2011.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주)박이정, 2018.



[자료] "신축 낙성한 단성사", 《매일신보》, 1914.01.17.

경셩 즁부 동구안에 잇, 연극쟝 단셩샤를 헐고, 로 짓, 이젼에 여러 번, 한바, 작년 월에, 를 시작, 임의 집 건츅은 다 맛치고, 구력 안에 부 슈졍, 젼혀 맛칠 터이라 간 수가, 륙십팔 간에, 가 삼십이 간이오, 관람쟈의 뎡원이, 일쳔 명이오, 뎐긔 등이, 합 일오십 , 안은 일본 졔도, 밧갓 졍면은, 셔양 졔도인일이등셕은 젼부 다다미를 랏고, 하등셕도 쟝교의에, 안져 보게 되얏스며 기타 여러 가지 구죠와 쟝식이, 조션의 연극쟝으로젼도에 뎨일이 되겟스며, 구력 졍월 초하로날브터, 의 연쥬회로, 첫 번 무를 연다더라, 총 건츅비 일만 일천 원

 
[자료] "단성사가 팔려", 《매일신보》, 1917.02.18.

경셩에 다만 한아 잇조션인 측의 연극쟝이라동구안 단셩샤그 소유주인 김연영(金然永)으로브터 황금뎡 거 황금관 쥬인 뎐촌 모의게 팔쳔오원의 가으로 도되야 십륙일에 금젼 여슈지 맛추엇 연극댱은 활동사진 젼문으로 곳쳐서 조선인 관람자를 흡슈기로 위주야 죵이것을 경영 우미관과 경리라더라.


[자료] "단성사의 개축, 활동사진을 한다", 《매일신보》, 1918.06.21.

됴션의 연극장 즁 한아 되동구 안 단셩샤작년 봄에 황금관 쥬인 뎐촌이란 사이 팔쳔오원에 가지고 활동사진을 영기 위야 광무박승필 씨에게 경영쟈의 권리를 위임야 그 일홈으로 당국에 쳥원고 허가되기를 긔다리던바 다소 년 월을 지여 지나간 십삼일부로 경긔도 경무부로부터 소관 경찰셔에 허가 지령이 왓슴으로 죵로경찰셔에서일 활동진의 흥주 되박승필 씨를 불너다가 신긔 셔댱으로부터 장쥬의 건에 세히 일너준 후 그 지령을 주엇다 지금의 단셩사 집으로영사적소가 못됨으로 확댱기 위야 일만 원의 예산으로 그 안을 모다 헐고 다시 지은 후 오구월부터 시작되리라 목하 설계가 맛치 로 곳 역에 착수 이 뒤부터신구파 극장은 아죠 업셔진 모양이라더라.


[자료] "본관 신축 낙성 후 대갈망 중의 모범적 활동사진은 금일부터 대대적 영사", 《매일신보》, 1918.12.21.
동구안 단셩사를 여러 천원의 거으로 사드린 후 본목뎍바와 갓치 세샹에 모범뎍 활동사진을 영야써 일반 관람에 졔공기로 작뎡얏던 결과 그 뒤 모든 범과 계획이 쥰비되야 슈만의 거과 슈삭의 공졍으로 오날단샹사신츅얏도다 이젼혀 영리를 위야 금거히 쥰비것이 안이오 다만 활동사진의 영쇼문이 퍼지이를 라 경향의 활가 졔씨의 갈망이 졀졍에 다을 외라 겸야 녯것을 것을 요구 것이 현(現代思潮)임으로 본 관주가 미리 이를 닷고 급셩 공로 이에 쥰공을 맛치엿슴니다 본관은 본쥬지가 타관에 비야 현져히 다른 뎜이 잇즉 만흔 돈으로써 참신긔발됴흔 사진을 가져다가 아모죠록 일반의 호평 즁에셔 영업도 발뎐코져  주지임으로 디 유명활동사진쥬식회사 몃 곳과 임의 특약을 고 수만원의 보증금을 붓치엿스니 이를 보더라도 가히 본관의 로심초을 아실 일이라 안이라 활동사진에 야 본 관주항샹 유감히  갑 만코 용 죠흔 진을 영 때에 변의 셜명이 불충분야 일반 관람시는 니의 불만족과 불평의 셩이 남을 라 역시 진의 가치도 업셔지일이 잇셔셔 본 관주의 삼슉고熟考로 활동게의 호평잇고 갈... 안이 구변으로뎨일류되셔상호徐相昊군을 특이 초빙야 변쥬임으로 뎡고 텬연표졍과 그럴듯익살 잘부리와 희로락을 긔묘 합 오륙인이 잇셔 일 밤 무우에셔 일거일동에  셜명은 참으로 본 관주의 안이오 장보아가시 로 평판이 잇오리다 겨울밤은 졈졈 길고 눈이 나와셔 에 가득이 싸인 실상 젹막이 없슬 별별 겨울에  감상이 만단으로 일어날 본관에 오시고 보면 란로몸을 듯하게 야 주고 셜 갓흔 하얀 포장에참 쳐음보긔긔괴괴 진이 다 빗치일 적마다 여긔가 졍말 락쳔디인가보다  감샹이 유연히 발실 터이요 야반에 소견거리이 우에 더 업슬 줄로 니다 敬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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