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천
Kim Hyo-cheon / 金曉天 / 1935  ~ 
본명
김치한 (Kim Chi-han)
대표분야
감독, 제작/기획, 시나리오
활동년대
1960, 1970,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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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색동저고리 (김효천, )
일본대부 (김효천, 1989)
인간시장2, 불타는 욕망 (김효천, 1985)
사약 (김효천, 1984)
동반자 (김효천, 1984)
이혼법정 (김효천, 1984)
정념의 갈매기 (김효천, 1983)
인간시장, 작은 악마 스물 두 살의 자서전 (김효천, 1983)
종로 부루스 (김효천, 1982)
혈우천하 (최현민,김효천, 1982) (uncredited)

주요경력

1979년 (주)동협 영화사 사장

기타정보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김효천은 한국해양대학 출신으로 4년간 상선에서 마도로스 생활을 했다. 영화를 좋아 했던 그는 이후 시나리오 작가로 영화계에 입문하여 <공포의 8시간>(1962), <전쟁과 노인>(1962), <천동>(1963) 등 50여 편의 시나리오를 썼다(한국영화감독사전, 주간한국). 통속 멜로드라마 <그래도 못잊어>(1967년)를 연출하면서 감독으로 데뷔했고, <슬픔은 파도를 넘어>(1968), <팔도기생>(1968), <첫날밤 갑자기>(1969) 등 통속적 멜로드라마를 몇 편 더 연출한 이후에는 주로 활극을 연출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1982년까지 연출한 작품은 44편인데, 이 중 <목가>(1967) 등 4편을 제외한 40편이 액션영화일 정도로 액션영화에 정통하였다. <팔도사나이>(1968)는 13만 8천명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했고 ‘명동’ 시리즈, ‘협객 김두한’ 시리즈도 흥행했다(동아일보b).
<김두한>(1974)을 감독한 이후 영화사를 차려 제작을 했으나 여의치 않아 동남아 진출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성공을 거두지 못해 이후에는 홍콩에 거주하며 요식업을 하기도 했다. 1979년 귀국하여 영화사 동협(東協)을 차리고 <오사카의 외로운 별>(1980)을 제작·연출했다(동아일보a, 주간한국). <오사카의 외로운 별>은 50여명의 스태프와 배우가 2개월간 일본에서 촬영한 작품으로(매일경제), 영화 속 군중장면에서는 2천명의 일본인 엑스트라를 동원하기도했다(동아일보a). 김효천은 동협영화사의 사장으로 있으면서 수십 편의 외화를 수입하고 110여 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한국 음식점을 경영했다(한국영화감독사전).

* 참고문헌
《주간한국》, 한국일보사, 1981년 9월 6일 발행, 116쪽.
동아일보a 1980년 6월 28일자 5면.
동아일보b 1982년 8월 4일자 12면.
매일경제 1980년 5월 17일자 8면.
한국영화감독사전
(http://www.kmdb.or.kr/actor/mm_basic.asp?person_id=00007349&keyword=김효천)

* 《주간한국》은 한국영화 디지털정보서비스(KMDS) 검색.

[작성: 김성희]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은 김치한(金致漢). 1935년 4월 17일 경상북도 대구 출생. 계성고, 한국해양대 항해학과 졸업했다. 한때 항해사 노릇을 했던 그는 아무런 연고 없이 감독이 된 희귀한 케이스에 속한다. 우연히 어떤 아역 엄마의 주선으로 감독 데뷔를 했다. 그는 원래부터 배우가 되고 싶었는데 감독으로 방향을 바꾼 케이스이다. 부잣집 아들인데다가 호방한 성격의 그는 싸움도 잘 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연출한 영화의 격투 장면은 사실적이고 박진감 있는 걸로 정평이 나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액션 영화 감독인 그의 데뷔작은 데뷔작은 <그래도 못잊어>(1967년)이다. 착실한 월급쟁이 남자가 난산 끝에 자신의 아내가 죽어버리자 그 충격으로 정신착란을 일으키다가 결국에는 죽은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거리를 방황한다는, 지극히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였다. 훗날 액션 영화를 줄기차게 연출한 감독의 데뷔작이라도는 믿기지 않을 영화였는데, 그의 자작 시나리오인 이 영화에는 김혜정, 최무룡이 출연했다. 이후 그는 <슬픔은 파도를 넘어>(1968),<팔도기생>(1968),<첫날밤 갑자기>(1969)등의 통속적 멜로드라마를 몇 편 더 연출했다가 드디어 활극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극히 몇 편의 예외를 제외하고, 그가 1969년 이후 연출한 영화의 대부분은 액션 활극물이다. 1969년에만 <안개 낀 상해>,<팔도사나이>,<마지막 왼손잡이>,<명동출신>등 총 7편의 영화를 연출한 그는 이듬해 무려 10편의 액션 활극물을 연출하면서 전성기를 맞게 된다. 박노식이나 장동휘를 주인공으로 한 이 당시의 영화로는 <팔도검객>,<명동백작>,<개 같은 사나이>,<암흑가의 25시>,<돌아온 방랑자>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잘 알려진 것은 <명동 노신사>이다. 장동휘,윤정희,박노식,허장강,이대엽,독고성,문오장 등 액션 스타가 출동한 이 영화는 그의 자작 시나리오로서, 해방직후의 혼란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남로당인 덕팔의 접근을 거절한 것 때문에 자신의 누이동생과 어머니를 잃은 강룡은 덕팔의 원수를 갚고자 군에 자원하게 된다. 덕팔이 공비로 입산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는 덕팔 일당을 소탕하지만, 그의 동료들을 잃고 만다. 이 시기 그의 콤비 작가는 누가 뭐래도 이두형 작가였다. 이런 경향의 액션 활극물을 연이어 연출하던 그를 다시 인식하게 만든 영화는 <소장수>(1972)였다. 소장수 만석이 소값 대신 옥순이라는 처녀를 얻어 같이 살면서 임신하게 된다. 그런데 소값 흥정을 하던 만석이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게 되면서 도망을 가 버린다. 홀로 남은 옥순은 소를 몰고 가다가 어느날 순사보조원에게 겁탈 당할 뻔하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던 만석은 이 광경을 보고 오해하고 만다. 그 오해의 파장으로 투전에서 옥순을 잡힌 만석은 그녀마저 잃어버린다. 세월이 지난 훗날 만석은 옥순을 찾지만 그녀는 이미 죽은 후였고, 단지 그녀의 아이가 있었다. 만석은 아들의 뒤를 따라 정처 없이 떠난다. 인생의 페이소스가 진하게 풍겨나는 이 영화로 그는 제 18회 아시아영화제 비극상, 제 9회 청룡영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는 이 영화에서 한과 정을 주제로 하여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받았다. 1972년부터 김희라 주연의 액션 영화 <우정>(1972),<두 사나이>(1972)등의 영화를 연출하던 그는 1974년에 이대근을 주연으로 김두한 이야기를 연출하기 시작했다. <실록 김두한>이 그것이다. 독립군 김좌진의 아들인 김두한은 나관중의 밑에서 애국혼을 배운 후 신마적을 꺾어 조선 최고의 협객이 된다. 그런데 야마구찌는 자객을 보내 그의 부하와 애인을 살해한다. 결국 김두한은 그의 복수를 하고 형무소로 간다. 한국 영화의 불황기에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하면서 <협객 김두한>(1975),<김두한형 시라소니형>(1981) 등의 비슷한 영화를 연출하기도 했다. 그의 액션 영화는 시원시원하고 박력이 넘치는 게 특징이다. 연출 외에도 그는 <전쟁과 노인>(임권택,1962),<천동>(정승문,1963)의 시나리오를 저술했으며, (주)동협 영화사의 사장으로서 수십 편의 외화수입과 110여 편의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감독일을 잠시 접은 후 홍콩에서 사업을 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현재는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한국 음식점을 경영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최근에도 정신대 문제를 다룬 영화를 연출하려고 했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1970년대 초중반 한국 액션 영화의 대표적 감독이다. 흥행에서도 많은 성공을 거두었고 박노식,허장강,독고성,김희라,이대근 같은 스타를 적절히 활용한 감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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