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화
Ahn Jong-hwa / 安鍾和 / 1902  ~  1966
본명
안용희 (Ahn Jong-hwa)
대표분야
감독, 배우, 시나리오
활동년대
1920, 1930, 1940, 1950,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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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견우직녀 (안종화, 1960)
춘향전 (안종화, 1958)
천추의 한 (안종화, 1956)
사도세자 (안종화, 1956)
나라를 위하여 (안종화,서정규, 1949)
수우 (안종화, 1948)
인생항로 (안종화, 1937)
역습 (안종화, 1936)
은하에 흐르는 정열(비상) (안종화, 1935)
청춘의 십자로 (안종화, 1934)

주요경력

1922년 함흥부 연극단체 예림회에서 문예부장
예림회 해체 이후 부산으로 가 무대예술연구회에 참여
무대예술연구회가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흡수되면서 영화계 입문
1927년 조선영화예술협회 가담
1928년 조선문예영화협회 조직
1935년 동양극장 전속연출가
일제 강점기 말 어용단체 조선영화협단 조직, 조선영화인협회 임원
친일단체인 황도학회,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1945년 광복 후 조선영화동맹 둥앙집행위원장
영화감독구락부 참가
대한영화협의회 조직 주도
대한영화사 촬영소장
공보처 영화과장
서라벌예술대학 학장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48년 대한영화협의회 부이사장
1949년 문교부 예술위원회 영화위원
1954년 예술원 일반회원
1956년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부회장
1956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의 위원

기타정보

저술내역
<신극사 이야기>(1955)
<한국영화측면비사>(1963)
수상내역(영화)
제6회 서울시문화상 영화부분 수상(1957)/
제2회 영화예술상 30년 유공자 수상(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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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혁신단, 예림회 등을 통해 연극을 배운 안종화는 1920년 신극 <장한몽>으로 데뷔하였다고 한다. 이후 토월회와 무대예술연구회 동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영화와의 인연은 예림회를 이끌고 회령에 순회공연을 갔을 당시 나운규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안종화는 1924년 조선키네마에 들어가 <해의 비곡>(1924)에 출연하며 영화배우로 데뷔하였다. 이후, <운영전>(1925), 암광(1925)에 출연하였으며, 황운이 감독한 <낙원을 찾는 무리들>(1927)에 남궁운, 임운학 등과 함께 출연하였다. 그리고 1927년 조선영화예술협회를 발족하고 신인배우를 지도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김종원; 대중예술인 사전; 동아일보a; 조선일보a).
안종화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은 <꽃장사>(1930)이다. 하지만 안종화는 1927년 조선영화예술협회가 제작하는 <낭군(狼群)>의 감독으로 데뷔하려고 했었던 적이 있었지만, 부정사건 논란이 일면서 촬영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감독 데뷔가 늦어졌던 것이다(동아일보b). 1929년에는 영화평론 기관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최남주, 김영팔과 함께 조선영화사를 설립하고 영화잡지를 발행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c). 그리고 이 조선영화사를 통해서 감독으로 데뷔하였다. 안종화의 첫 번째 작품은 <꽃장사(가화상)>라는 작품이었는데, 최남주 원작의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었다. 주연배우는 최남주와 김명숙이 맡았으며, 조선문예영화협회 졸업생들이 대거 출연하였다고 한다(조선일보b; 동아일보d) 그리고 두 번째 작품은 이우, 김영팔과 함께 엑스키네마를 설립하고 직접 감독을 맡은 <노래하는 시절>(1930)이었다. <노래하는 시절>은 <꽃장사>와 마찬가지로 조선문예영화협회 회원들이 참여하였으며,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안석영의 원작을 시나리오로 각색한 것이었다. 주요 출연배우는 윤봉춘, 함춘하, 김명순 등이었다(조선일보c; 조선일보d; 조선일보e). 이후에도 <청춘의 십자로>(1934), <은하에 흐르는 정열>(1935), <역습>(1936) 등의 감독을 맡았다(동아일보e; 조선일보f; 조선일보g; 조선일보h).
해방 이후에도 안종화는 청춘극장 연출부로 있다가, 건설영화사가 제작한 <수우(愁雨)>를 시작으로 활발한 감독활동을 펼쳤다(경향신문a; 동아일보f). 그리고 1948년 대한영화협의회의 부이사장에 선출되었으며, 1949년에는 문교부 예술위원회 영화위원으로 선출되었다(경향신문b; 경향신문c). 한국전쟁 후에는 공보처 영화과장을 역임하고, 서라벌 예술학교에 나가 후진을 양성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였다(김종원). 이외에도 1954년에는 예술원 일반회원이 되었으며, 1956년에는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의 결성에 참여하여 부회장에 선출되었다(경향신문d; 경향신문e). 1956년 감독을 맡은 <견우직녀>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다(경향신문f). 1962년 8월 21일 사망하였고, 장례는 영화인협회장으로 치러졌다(경향신문g; 동아일보g).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5년 1월 26일 7면.
동아일보b 1927년 12월 26일 3면.
동아일보c 1929년 4월 24일 4면.
동아일보d 1930년 3월 3일 7면.
동아일보e 1931년 6월 26일 4면.
동아일보f 1948년 5월 15일 2면.
동아일보g 1966년 8월 25일 5면.
조선일보a 1927년 4월 19일 석간 2면.
조선일보b 1929년 10월 23일 석간 5면.
조선일보c 1930년 4월 23일 석간 5면.
조선일보d 1930년 7월 2일 석간 5면.
조선일보e 1930년 9월 12일 석간 5면.
조선일보f 1934년 9월 21일 석간 3면.
조선일보g 1935년 8월 11일 석간3면.
조선일보h 1936년 2월 2일 석간 6면.
경향신문a 1946년 10월 8일 4면.
경향신문b 1948년 12월 8일 3면.
경향신문c 1949년 2월 19일 3면.
경향신문d 1954년 4월 8일 2면.
경향신문e 1956년 3월 3일 4면.
경향신문f 1959년 2월 20일 4면.
경향신문g 1966년 8월 23일 3면.
김종원, <<한국영화감독사전>>, 국학자료원, 2004.
<<식민지 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소도, 2006.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본명 용희(龍熙). 1902년 1월 21일 서울의 아흔 아홉 칸이나 되는 대궐같은 큰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 안상홍(安祥鴻)은 종 2품을 지냈고 외가족 역시 호조참판의 딸로 숙부인이라는 말을 들었다. 부친 역시 통화랑(通化朗)이 되어 벼슬길을 밟았다. 월남 이상재가 교장인 서울 공생학교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봉명중학을 졸업했다. 개화의 물결이 휩쓸 무렵 혁신단의 임성구 패에 들어가 소녀 역으로 연극의 맛을 본 후 예림회라는 극단을 조직하여 지방 공연에 나서기도 했다. 함경북도 회령 공연 때 알게 된 무명 청년 나운규와는 그뒤 부산에 창설된 조선키네마 주식회사에서 만나 한 길을 걷게 되는 인연을 갖게 된다. 이후 동경 유학생이 중심이 된 토월회와 무대예술 연구회 동인으로 참여, 신극운동에 나섰으나 무대예술 연구회의 부산극장 공연을 계기로 그 무렵 설립된 조선키네마주식회사에 입사(1924)함으로써 영화인의 행로를 밟게된다. 그 첫 결실로 나타난 것이 조선키네마주식회사의 창립 기념작 <해(海)의 비곡(秘曲)>(1924). 여기에서 주인공 진문기와 그 아들을 동시에 소화하는 1인 2역을 맡았다. 한라산에 등반?다가 추락하여 섬 처녀의 도움을 받은 것을 계기로 그녀와 사랑하게 된 서울 청년 역이다. 이듬해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1925),<해의 비곡>을 연출한 왕필렬 감독의 <암광>(1925)등에 출연한 것을 끝으로 감독으로 전향, 1966년 8월 21일 쉰 네살의 나이로 작고할 때까지 모두 13편의 연출 작품을 남겼다. 영화에 출연하지 않은 몇 년 동안 이경손, 김을한 등과 함께 구태의연한 신파극에 탈피하여 참신한 신인을 길러 낸다는 취지 아래 조선영화예술협횔ㄹ 발족(1927). 그 산하에 연구부를 두고 김유영,서광제,임화 등 주로 카프 계열로 나간 신인들을 양성하는 등 의미있는 활동을 했다. 그의 감독 데뷔작은 조선영화사가 제작한 <꽃장사>(1930)이다. 구체적인 줄거리는 알려진 게 없지만 당시 이 영화의 합평회(신흥영화예술가동맹 주죄,동아일보,1930.3.23~28)에서 거론된 말을 종합하면, 부호의 집 하녀로 있을 때 정조를 유린 당해 쫓겨난 처녀가 공장에서 일하다가 실직된 노동자와 알게 되고 이를 계기로 꽃장사로 나선 그의 희생적인 도움을 받게 된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빈궁에 대한 총체적 투쟁만 존재하였지, 사회적 갈등이 없었던게 문제'(서광제)라는 등의 지적을 받아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했다. 일부 자료에는 이에 앞서 <고향>(1928)이라는 영화를 감독한 것으로 나와 있으나 본인은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그는 같은 해 <노래하는 시절>(1930)에 이어 <청춘의 십자로>(1934),<은하에 흐르는 정열>(1935),<역습>(1936),<인생항로>(1937),<수우>(1937),<나라를 위하여>(1949),<천추의 한>(1956),<사도세자>(1956),<춘향전>(1958),<견우직녀>(1960)등 잇따라 감독작을 내놓았다. 이 가운데 해방전 작품은 모두 자신이 쓴 각본을 내세웠으나 해방후에는 <나라를 위하여> 한 편을 빼고는 남의 각본을 썼다. <노래하는 시절>(윤봉춘,성춘경 주연)은 시골처녀를 괴어내 서울로 올라온 부호가 그녀의 애인에 의해 복수당하고 시골에 내려온다는 내용이고, <청춘십자로>(이원용,신일선 주연)는 가산을 탕진하고 집을 떠난 난봉꾼인 남편의 빚때문에 기생이 된 아내가 돈을 벌어 나타난 남편으로 인해 행복을 찾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조선 일보사가 1938년 11월 26일부터 3일 동안 영화제를 개최하여 일반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기 투표에서 6위를 차지하였다. 1위는 나운규의 <아리랑>이었다. <역습>(복혜숙,이금룡 주연)은 동생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살인을 하고 옥살이를 하게 된 고무공장 직공이 출옥했으나 전과자라는 이유로 아내와 성공한 동생으로부터 외면 당하는 파란만장한 사나이의 일대기이며, <은하에 흐르는 정열>(이경선,신일선 주연)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지점으로 통학하다가 눈이 맞게 된 남녀 학생의 애틋한 러브 스토리이고, <인생항로>(이원용,문예봉 주연)는 뭇 사내들의 유혹을 물리치고 바다로 나간 항해사인 남편을 기다리다가 기쁘게 맞이하는 아내의 의지를 담았다. <수우>(김소영,전택이 주연)는 카바레 마담에게 빠진 밀수배 두목을 개심케하는 아내의 이야기로서 해방후 민주경찰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정책적으로 제작, 무료 공개된 영화이다. 그 뒤에는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히어 굶어 죽은 비극의 왕자 <사도세자>(1956)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안종화는 이에 앞서 같은 해 이만희를 <천추의 한>의 조감독으로 기용하고, <사도세자>에 자객으로 출연시키는 등 연출 수업을 쌓게 했다. 6.25 전쟁 후 공보처 영화과장을 역임하고, 서라벌 예술학교에 나가 후진을 양성했다. 저서로 '신극사 이야기'와 '한국영화측면비사'(1962)등이 있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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