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세인, 2021

by.듀나(영화평론가) 2022-12-23조회 4,369

언제나처럼 열편의 영화를 골랐다. 작년 말에서 올해 초에 개봉된 아카데미 영화나 영화제 수상작 상당수는 뺐는데,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필자들이 해줄 것이라 믿는다. 나는 그 중 <우연과 상상>과 <나의 집은 어디인가>를 골랐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작년 최고 히트작은 <드라이브 마이 카>였지만 스토리텔링의 도구로서 영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매력적인지를 보여주었던 영화는 <우연과 상상>이었다. 특히 마지막 에피소드인 ‘다시 한 번’는 내 머릿속에 아주 오래 남을 것 같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애니메이션이면서 다큐멘터리이다. 이 기법을 이 영화가 처음 사용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올바르고 정확하게 사용된 영화는 극히 드물다. <나의 집은 어디인가>는 올해 뽑은 네 편의 다큐멘터리 중 하나이다. 그 중 두 편인 <미싱타는 여자들>과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한국사를 소재로 한 한국 영화이다. 그리고 지금이야 말로 한국 근대사를 <삼국지>스러운 관계성을 파는 양복입은 중년남자들 주인공의 유사조폭영화로만 그리는 것만큼 나태하고 부정직한 것은 없고 누군가는 이 따분함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외칠 때다. <미싱타는 여자들>과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그 지루함의 풍요로운 실제로 그런 영화들보다 몇 배는 더 재미있었다.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올해는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충무로에서 나온 대부분의 극영화보다 더 재미있었다. 리스트엔 넣지 않았지만 <성덕>은 올해의 한국 코미디 영화 중 하나였고 <작은새와 돼지씨>는 올해의 한국 로맨스 영화 중 하나였다.)
 

마지막으로 남은 <넬리와 나딘>도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절절한 로맨스이다. 많이들 ‘허구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라고 할 텐데, 사실은 대체로 같은 시공간을 그린 허구보다 더 다채롭고, 허구의 이야기를 쓰는 작가들은 종종 이를 놓친다.

씨네필의 심금을 울리는 영화가 두 편 있었다. <>과 <썸머 필름을 타고!>인데, 망설이다가 <썸머 필름을 타고!>를 골랐다. 영화쟁이의 광기를 보여주는 인물로 <놉>의 앤트러스 홀스트도 멋지지만 <썸머 필름을 타고!>의 맨발만한 캐릭터는 없다. 일본 청춘영화의 대단한 팬이었던 적은 없었지만 이 영화에서는 이 장르가 정말 완벽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제목을 제대로 적었는지?)>는 올해의 SF이다. <애프터 양> 사이에서 잠시 망설였는데, 인형눈을 이마에 붙인 양자경의 얼굴을 보는 순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영화’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완벽성’은 훌륭한 영화에게 필수조건이 아니다. ‘완벽성’과 상관없이 재미있고 좋은 것이 엄청나게 많은 영화들이 있고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도 이에 속한다.
 

이제 한국 극영화가 세 편 남았다. 모두 재미를 기준으로 골랐다. <헤어질 결심>을 제외하면 충무로 영화가 한 편도 없는데, 그건 올해 나온 기획 영화들 대부분이 더럽게 밋밋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심지어 이들은 제대로 나쁘거나 지루하지도 못했다. 실패할 위험부담이 없는 도전이 어떻게 재미있을 수 있겠는가. 이런 영화들은 심지어 실패도 따분하다.

<성적표의 김민영>은 올해의 코미디다. 사실이더라도 한국 독립영화스럽게 실없게 웃기는 영화가 아니냐고 따질 수 있을 텐데, 맞는 말이지만 그 실없고 의뭉스러운 웃음은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정곡을 찌르고 더 웃긴다. 어떤 관객은 이 영화 유머의 ‘충청도스러움’을 지적했는데, 이게 ‘요새 애들’의 유머 감각이라는 분석보다 더 정확한 것 같다. 그리고 훌륭한 코미디 대부분이 그렇듯 그 웃음은 결코 가볍지 않다. <헤어질 결심>은 좋은 고전 영화들이 가진 복잡하고 다층적인 매력을 잔뜩 가진 영화로, 정말로 로맨틱하고, 정말로 어이없고, 정말로 변태스럽고, 정말로 서스펜스 넘치고, 정말로 웃긴다. 하지만 이 불균질적인 매력이, 감독이 박찬욱이라는 대스타였기 때문에 ‘허락되었다’는 의심을 피할 수가 없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도 만만치 않게 재미있는 영화이다. 폭력적인 모녀 관계를 다룬, 유명한 배우는 한 명도 안 나오는 2시간 20분짜리 한국독립영화를 도대체 왜 추천하냐고 묻는다면 나로서는 “재미있으니까.”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정말이다. 올해 나온 한국 극영화 중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만큼 자극적이고 생생한 재미를 가진 작품은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꼭 즐거운 경험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겐 트리거 워닝이 필요하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와의 관계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니까. 하지만 그런 경고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 관객들이 이 영화를 건너 뛰어야 한다는 말은 되지 않는다. 반대로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는 바로 그런 관객들에게 최적화되었다. 그리고 이들 상당수는 (전부일 수는 없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격렬한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며 극장문을 나설 것이다.

제목부터 폐소공포증을 일으키는 영화이다. 이정과 엄마 수경은 서로에게 진저리를 치면서도 같은 아파트에 살며 같은 속옷을 공유한다. 이정은 벌써 20대 후반이지만 어떻게 해야 이 지긋지긋한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아직도 모른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교통사고에서 시작된다. 언제나처럼 마트에서 치고받고 나왔는데, 그만 수경이 탄 차가 이정을 들이받은 것이다. 수경은 차가 급발진했다고 주장한다. 이정은 엄마가 자기를 일부터 치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오싹한 건 후자의 주장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이정은 그런 주장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 이정이 견뎌내야 하는 고통스러운 삶의 원인 대부분은 엄마다.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모성 서사와 여성 서사라는 용어를 끄집어 오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어권에서 이와 관련된 용어는 언급이 꺼려질 정도로 오염되었고 이상할 정도로 납작하게 사용되고 있어 나로서는 쓰고 싶지가 않다. 무엇보다 ‘지금까지의 모성 신화를 깨부순다’나 ‘모녀 서사의 완전히 새로운 길을 개척했다’ 같은 말을 들으면 ‘과연 그런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지 않을 수가 없다. 우리가 익숙한 ‘모성 신화’를 깬 ‘모녀 서사’인 서사 예술은 원래부터 엄청나게 많았고 여성창작자들의 접근성이 높아진 영화 매체에서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중년여성으로서의 엄마를 내세운 영화는 올해만 해도 꽤 여러 편 나왔다.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도 같은 주제를 공유하며 자기 이야기를 하는 수많은 다양한 영화들 중 하나이지, ‘모성 신화 파괴’의 전위를 걷는 작품은 아니다. 그건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다. 스코빌 지수를 따지는 매운닭발집도 아니고, 그렇게 보면 오히려 영화들이 납작해지는 것 같다.

영화가 세게 나가는 것은 사실이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딸을 차로 둘이받았을 수도 있는 엄마가 등장하면 아무래도 관객들은 긴장하게 된다. 영화의 재미를 주는 것 대부분은 바로 그 강한 자극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 강한 감정과 자극의 연속 속에서 캐릭터를 다루는 고유의 방식에서 진짜로 완성된다.
 

김세인 감독은 종종 인터뷰에서 엄마인 수경이 비호감으로 보일까봐 걱정이라는 이야기를 하는데, 어느 정도 진심인지는 알 수 없다. 수경이 심각할 정도로 비호감인 사람인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경은 영화 내내 사람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는 온갖 다양한 행동을 한다. 이정에게는 당연히 끔찍하고 남자친구의 딸에게는 더욱 끔찍하다. 단지 이런 캐릭터를 만들 때 창작자는 딸 캐릭터에 100퍼센트 몰입해서 엄마를 공격하는 함정에 빠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게 김세인의 첫 의도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그 길로 안 간다. 영화는 이정도 수경 못지 않은 비호감으로 만든다. 특히 이정이 친구가 되고 싶어 접근하는 소희에게 이 사람이 어떻게 보일지를 생각하면 공감성 수치 때문에 질식할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이정에게 치우친 채로 영화를 본다. (아니, 딸이 그 꼬라지가 된 건 엄마 잘못이 맞다니까!) 하지만 이정과 수경을 붙여 놓고 일정 거리에서 떨어져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나게 복잡하고 입체적인 캐릭터의 풍경이 부정할 수 없는 사회적 맥락 안에서 펼쳐진다. 영화를 보는 동안 두 사람이 특별히 좋아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불꽃처럼 강렬한 캐릭터들은 존재하기 위해 굳이 우리의 애정이 필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그렇기 때문에 자기 변명과 타협없이 어디로든 갈 수 있고 그 과정 중 관객들에게 엄청난 재미를 선사한다. 영화가 들쩍지근하고 익숙한 타협이나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완벽한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도 김세인이 이 둘, 그리고 이들이 속한 세계를 그릴 수 있는 완벽한 관찰자 시점을 찾아냈음을 의미한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