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의시네마테크]쿠엔틴 타란티노 특별전: <저수지의 개들> 번역 후기 저수지의 개들, 1992

by.홍지로(번역가) 2016-03-22조회 4,026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저수지의 개들>을 새삼 소개할 필요가 있을까. 비디오 가게 점원이던 청년 타란티노가 3만 달러짜리 16mm 영화로 만들려던 각본을 배우 하비 카이텔이 보고 공동 제작자로 참여하면서 150만 달러짜리 호화 캐스팅 영화가 되었다는 이야기나, 지난해 시네마테크 KOFA에서도 상영한 바 있는 스탠리 큐브릭의 <킬링>을 모태로 삼아 시간 순서를 뒤죽박죽 섞은 재기발랄함에 대한 상찬이나, 마돈나의 노래를 필두로 온갖 대중문화를 인용하는 바람에 이후 오랜 세월 포스트모더니즘의 선두주자로 낙인 찍혀 버린 운명이나, 경쾌한 노래에 맞추어 신체를 훼손하고 농담을 던지는 발칙함과 잔혹성이 일으킨 논쟁이나, 이후 모든 타란티노 영화를 관통하게 될 윤리의식에 관한 주제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만큼이나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동시에 아무런 뜻도 지니고 있지 않은 제목까지(제발 ‘창고의 개들’이 ‘옳은’ 번역이라는 주장만은 말아주시기를), 지난 24년간 수없이 되풀이되지 않은 이야기가 얼마나 있을 것이며, 또한 그런 이야기를 모른다 한들 이 영화를 보십사 청하는 데에 타란티노라는 이름 넉 자 외에 더 무엇이 필요하랴.

그런즉 여기서는 이번 ‘쿠엔틴 타란티노 특별전’을 맞이하여 새로 번역한 <저수지의 개들> 한국어 자막 번역에 관해 조금만 이야기해 볼까 한다. 괄호 안에 번역가라고 써놓고 번역 이야기는 안 해서 살짝 멋쩍던 차였다.

<저수지의 개들>은 오랫동안 번역해 보고 싶었던 영화였다. 사람들은 타란티노 영화의 번역이 어려우리라고 생각하지만, 시네마테크를 중심으로 몇십 년 묵은 영화들을 번역하는 데에 익숙한 필자로서는 타란티노 영화의 번역이 하워드 혹스나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보다 더 어렵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욕설을 잔뜩 쏟아내면서 입말의 활력을 강조해야 하는 이런 영화는 번역자에게도 보다 많은 자유와 활력을 선사하는 편이라 반갑기까지 하며, 난이도를 상중하로 나누더라도 상에 살짝 치우친 중 정도라고 생각한다. (시네마테크 환경에서 타란티노 영화의 번역이 그렇게까지 어렵지 않을 수밖에 이유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예와 자막 프로그램 및 상영 환경의 특성을 거론하며 이야기하고 싶지만, 본 지면의 성격과 분량과 원고료의 제약이 있으니 다른 기회를 기대해 보기로 한다.)
 
Dick dick dick ...
Dick dick dick ...

타란티노 영화 중에서도 <저수지의 개들>은 오래도록 어둠의 경로에서 배포된 자막들이나 무판권 립핑판 DVD로 소개되곤 했으며, 비교적 최근에 출시된 Blu-ray의 자막도 그다지 이상적이지는 않았기에 개선의 의의도 여지도 다분했다. 일단 기존에 생략되곤 했던 타란티노 특유의 문화적 인용을 되도록 살리고자 했으며(이 영화에 ‘찰스 브론슨’이 두 번, ‘리 마빈’이 한 번 등장한다는 사실을 아시는지?), 기타 어물쩍 넘어갔던 부분들도 글자 수가 허락하는 한 남기고자 했다. 특히 영화를 열어젖히는 저 유명한 마돈나 음담패설에서 극 중 출연을 겸한 타란티노가 성행위 묘사를 흉내 내며 “Dick dick dick dick dick dick dick dick dick.”이라고 말하는 대목은 꽤 오랫동안 번역자들의 난제로 남아 있었는데, 그에 대해 새로운 대답을 제시해 보았다는 점에 관해서 만큼은 약간 자부심도 느끼고 있다. 직접 확인해 주시기를.

거의 모든 외국 영화 번역이 그렇듯, 정작 가장 까다로운 부분은 캐릭터들의 어말 어미를 결정하는 일이었다. 대다수는 서로 반말로 옮겨도 될 테지만, 미스터 화이트(하비 카이텔)는 다른 캐릭터와 다소 연배 차이가 나 보이고 상황이나 관계에 따라 타인과의 거리가 변화하는 캐릭터라 고민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보석상을 털러 모인 범죄자들이 개인 정보를 공유하지 않기 위해 이름까지 가명으로 쓰는 판국에 함부로 존댓말을 쓸 수도 없고. 결국 노골적으로 말투를 바꾸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변화를 가미해 보았는데, 그런 뉘앙스도 음미해주신다면 더없이 기쁘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입장료가 무료이며 관객층 연령대가 높은 편이고 무엇보다도 공공기관인 한국영상자료원의 성격상 비속어를 마음껏 사용할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 번역이 맛을 죽일 정도로 지나친 타협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며, 무조건 ‘fuck’을 ‘씨발’로, ‘dick’을 ‘좆’이나 ‘자지’로 쓴다고 해서 좋은 번역이 되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과격한 표현을 쓸 수 있었더라면 대화의 리듬이 더 자연스러워졌을 법한 대목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미리 양해를 부탁드리며, 직접 보시고 아무래도 이대로는 안 된다, 더 언어를 폭넓게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부디 ‘우리 관객을 과잉보호하지 마라!’ 라고 의사를 표현하여 조금씩 분위기를 바꾸어 주시기를 부탁드린다. 대개의 경우 번역자는 의뢰인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으며, 의뢰인=극장은 관객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만 자유로울 수 있는 법이다.

초기화면 설정

초기화면 설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