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키워드로 읽는 김기영

by.김형석(영화저널리스트, 전 스크린 편집장) 2018-03-20조회 1,316
김기영

하녀
식모 혹은 가정부로 불러도 무방하겠다. 때론 호스티스였고 노동자였다. 산업화 시기 남한, 김기영 감독의 주인공은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이루던 그녀들이었다. 그들은 중산층 가족 안으로 들어와 전쟁을 벌이고 가부장제를 붕괴시키며 파국으로 치닫는다. 감독은 이 이야기를 평생 반복했고, 이은심·윤여정·이화시·나영희 등 예사롭지 않은 신인 여배우들이 그 나름의 톤으로 변주했다. 하녀, 충녀, 화녀…. 한국영화가 지속되는 한 영원히 기억될 이름들이다.

불구
<하녀>의 딸(이유리), <고려장>의 구룡(김진규), <>의 정선(이화시), <수녀>의 진석(김정철)까지 모두 성치 않은 다리를 가졌다. 그 범위는 확장되어 <고려장> <수녀> <느미>에는 언어 장애를 겪는 여성이 등장하며, 많은 남자는 임포텐츠 증세를 겪는다. 특이한 건 그들이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 종종 ‘병신’이라는 노골적인 단어로 비하되어 비인간적인 상황을 드러내며 급기야 <육식동물>에선 “산송장”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한다.


찬장을 열었을 때 툭 떨어지는 쥐는 김기영 감독의 영화 세계를 가장 잘 표현한다. 낯설고 불길한 그 느낌! 그러면서 ‘번식’과 ‘생존’의 테마로 연결되고(<고려장>은 대표적), ‘인구론’의 관점에서 영화를 바라보게 만들며, 그의 캐릭터들은 결국 복작대며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쥐 같은 존재’라는 걸 환기한다. 쥐띠 해에 만들어진 <충녀>는 가장 공포스러운(신체 내부로 들어오다니!) ‘쥐 영화’.


쥐 이전에 닭이 있었다. <죽엄의 상자>나 <양산도> 같은 초기작부터 아예 양계장이 등장하는 <화녀> <화녀 82> <바보 사냥>까지 김기영 감독은 40년 동안 꾸준히 닭을 등장시켰다. 집단 사육되어 알을 낳고, (수컷은) 병아리 때 죽어 술안주가 되며, 즉시 잡혀 털을 뽑힌 후 백숙이 되는 닭을 통해 그는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 

계단
김기영의 공간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조물은 계단이다. 그것은 중산층의 상징이며(2층집) 계급의 차이를 드러내고(2층의 하녀 방과 1층의 안방), 죽음의 장치이며, 온갖 사건의 배경이다. <하녀> <화녀> <충녀>는 계단을 빼곤 설명할 수 없는 영화. 특히 <화녀>에서 명자(윤여정)가 거꾸로 끌려 내려오는 장면은 충격적. <화녀 82>에선 쿵쿵거리는 소리가 더 크게 증폭된다.

기계
열심히 기계를 돌려 무엇인가를 생산한다는 것은 김기영 감독이 활동하던 시기 한국 사회의 지상 과제였고, 그의 영화는 시대정신을 반영한다. <하녀>의 방적기와 재봉틀에서 <화녀>의 양계장(닭은 알 낳는 기계)과 분쇄기, 그리고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와 <바보 사냥>의 뻥튀기 기계와 <느미>의 벽돌 공장까지. 그러나 노동자들은 결국 노동에서 소외되고 마니, 어쩌면 김기영 감독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를 한 영화에 담아낸 건지도 모르겠다.

무당
김기영 영화의 괴력은 초월 의지에서 나오며, 강렬한 퍼포먼스와 함께 등장하는 무당 캐릭터는 상징적이다. <고려장>과 <이어도>에 등장하는 그들은 음모의 중심에서 공동체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강력한 존재. 그 운명적 힘은 <하녀>에선 불타는 나무로 형상화되기도 하는데, 가부장과 하녀가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비 오는 밤, 벼락이 내려친다.

아기
가족의 형성에서 가장 원초적 모티프인 출산. 하지만 그의 영화에서 아기는 결코 불가침의 영역이 아니다. 강렬한 임신 욕구를 보여주는 하녀들의 이야기 속에서 아기는 <충녀>처럼 미스터리한 존재로 등장하고, 어떨 땐 황당한 죽음을 맞이하며, 울음 소리는 불길하게 화면을 감돈다. 

섹스
김기영의 섹스 신은 기괴하다. 그 그로테스크한 느낌은 독특한 콘셉트에서 나오는데, 그저 남자의 등짝을 보여주는 데 급급하던 당대의 관습과 비교하면 진정 파격이다. <충녀>와 <육식동물>의 알사탕 섹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의 뻥튀기 섹스, <이어도>의 접시 소리 섹스, <수녀>의 죽부인 에로티시즘…. 여기에 기묘한 체위가 결합되고 판타스틱 미장센과 페티시즘이 더해져 어떤 의식과도 같은 섹스가 완성된다.

미장센
실내 장면에서 김기영 감독은 깊은 심도를 만들어내며, 유리나 창틀이나 문을 통해 이미지를 왜곡한다. 스테인드글라스 같은 옵티컬 효과도 빼놓을 수 없으며, ‘프레임 내 프레임’ 효과 역시 즐겨 사용한다. 이것은 그의 이야기에서 자주 나타나는 액자 구조와도 연결된다.

네크로필리아
한 걸음 더 나아가, 김기영 감독은 전무후무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바로 네크로필리아. 그런 점에서 <이어도>는 충격 이상의 충격으로, 여자는 아이를 가지기 위해 시체와 관계를 맺는데 감독은 절대 우회하지 않고 적나라하게 그 과정을 보여 준다.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의 해골, <렌의 애가>의 섹슈얼 판타지도 같은 연장선상에 있다. 참고로 김기영 감독은 프로이트의 탐독자였다.

문어체
내면의 욕망을 가장 극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듯한 특유의 문어체는 김기영 영화의 시그니처와 같은 서사 방식이다. 마치 선언하듯, 혹은 다짐하듯, 인물들이 뱉어내는 어마어마한 대사들. 아직도 그 목소리들이 귓가를 맴도는 듯하다. “의지다! 살아 있는 의지야!”(<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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