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감독] 일제강점기부터 현재까지, 한국영화 촬영감독 계보 한국영화 촬영감독들을 돌아보다

by.배수경(영화사연구소 객원연구원) 2011-05-04조회 83

1934년 조선일보에 실린 박완식의 글을 보면 영화는 “기술의 종합과 기술가의 조직적 활동”을 필요로 하는 예술이며 “생산의 거대한 자본성으로 인한 기업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대목을 볼 수 있다. 이는 동인제로 영화가 제작되던 무성영화 시기를 지나 발성영화가 등장하며 수준 높은 기술적 전문성과 더 많은 자본이 요구되던 때에 나온 견해였다. 이미 1930년대에 영화기술의 중요성과 분화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전문적인 기술을 담보하며 영화제작의 연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기업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일제강점기 최초의 촬영감독 이필우

외국에서 들어온 근대문물인 영화는 기술을 바탕으로 한다. 처음엔 영사기술이 요구되었고 이후엔 촬영기술 그리고 녹음기술 등 연이은 기술의 진보를 필요로 했다. 최초의 조선인 촬영감독이었던 이필우는 정확히 이 궤적을 따라 영화기술을 습득하고 활용했다.

이필우는 먼저 우미관 보조영사기사로 일했고 촬영을 배우고자 일본으로 갔다. 1920년대 초반 일본의 촬영소에서 신인기사로 일하다 1923년 귀국해 연쇄극을 촬영한 최초의 조선인 촬영감독이 되었다. 단성사에서 제작한 <장화홍련전>(박정현, 1924)을 출발로 극영화의 역사가 시작되었는데 1920년대에는 기술 분화가 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촬영감독이 촬영뿐 아니라 때로는 현상, 편집 등을 함께 하기도 했다. 물론 이후 조선영화계가 태동하며 서서히 영화 인력이 분화되었다. 조선에 발성영화 시대를 가져온 광학녹음 방식의 발성영화장치가 개발된 것도 그의 손을 통해서였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인 흥행업자 와케지마 후지로가 투자해, 1930년대 기술개혁과 스튜디오 시대를 열었던 경성촬영소를 만드는 데도 이필우의 기술력이 바탕이 되었다. 경성촬영소는 신진기술자들을 배출할 수 있는 기반이 되어 김학성, 황운조, 양주남, 유장산 등이 경성촬영소의 기술 스태프를 거쳐 촬영감독과 편집기사, 감독 등으로 데뷔해 일제강점기 후반에 영화 기술 인력으로 활동했다.

이필우와 그의 문하생들

한국영화 기술 발전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이필우 문하의 도제로 있던 촬영기사들을 보면 한창섭, 손용진, 이명우, 황운조, 유장산 등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이 조선영화계에 등장한 것을 살펴보면, 한창섭은 1925년 이필우의 도제로 들어가 1926년 <산채왕>(이경손)의 촬영기사로 데뷔한 인물이다. 1930년에 상하이로 가서 <양자강>(이경손, 1931)을 촬영하는 등 상하이 망명파에 속하는 기사다. 손용진도 이필우의 도제로 1927년 연쇄극 <낙양의 길>을 촬영한 뒤 나운규 프로덕션의 <사나이>(홍개명, 1928)로 정식 데뷔한다. 이필우의 문하에 들어오기 전 병원에서 현상 일을 한 적이 있었고, 현상과 프린트로는 그를 따라올 자가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이명우는 이필우의 동생으로 연쇄극을 찍으며 수련기간을 보내고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입사해 1927년 <운명>(김해운)으로 데뷔했다. 이명우는 1935년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을 연출하기도 했는데, 이필우가 녹음을 맡았고 촬영은 이필우와 이명우가 공동으로 했다. 황운조는 경성촬영소 기술부에 들어오며 이필우 밑에서 촬영을 배우고 경성촬영소의 <미몽>(양주남, 1936)을 촬영하며 데뷔했다. 유장산은 이필우와 이명우의 도제로 영화계에 입문해 경성촬영소와 조선문화영화협회 전속 촬영감독으로 활동한다. 유장산의 첫 번째 촬영작품은 <청명심> (야마나키 유타카, 1940)이다. 1924년 이필우가 촬영한 <장화, 홍련전>이 큰 성공을 거둔 뒤 조선영화의 제작과 흥행의 가능성을 발견하자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윤백남 프로덕션과 고려키네마가 설립되는 등 조선영화의 제작이 왕성해졌다. 이런 맥락에서 1920년대에 조선의 1세대 촬영감독들이 이필우의 문하에서 짧은 수련기간을 거치며 데뷔하기 시작했다.

일본유학파 출신의 촬영감독들

이필우 외에도 일본유학파 출신의 촬영감독들은 존재했다. 양세웅은 일본 영화계에서 정식 촬영기사로 활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1924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도아키네마 촬영부에 입사해 1932년 카메라맨으로 승진하고 J.O토키 스튜디오에 들어가 촬영감독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1935년 귀국해 <춘풍>(박기채)을 촬영했는데 이때 경성촬영소 기술부에 있던 김학성이 조수를 했다고 한다. 양세웅은 1930년대 중반 발성영화의 도래와 함께 등장한 세대로 일본에서 활동한 경력까지 있었기에 1930년대 후반에 가장 환영받는 촬영감독이었다고 한다. 편집기사 김영희가 처제이고 양성란이 그의 딸이다.

이필우 이후 등장한 조선인 촬영감독으로는 이창용이 있다. 그는 요도 도라조의 조선키네마프로덕션 기술부에 입사해 <풍운아>(나운규, 1926)에서 가토우 쿄헤이와 공동으로 촬영했다. 이후 나운규 프로덕션에서 <옥녀><사랑을 찾아서> 등 여러 작품을 촬영하며 나운규의 기술적 파트너로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촬영술을 익히기 위해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2, 3년 후 귀국했는데 이후로는 고려영화협회를 설립해 경영하며 영화배급과 제작 분야에 종사했다.

국내파 촬영감독들

국내에서 수련한 촬영감독 이신웅의 수련과정은 불분명하나 1930년 아성키네마에서 <회심곡>의 촬영을 맡으며 촬영감독으로 데뷔해 30년대 후반에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의 문하에서 임병호가 도제로 수련하며 <신개지>(윤봉춘, 1942)등에 촬영조수 생활을 거쳐 <제주도 풍토기>(1946)로 촬영감독으로 데뷔했다. 배성학은 임병호의 문하로 들어가 5년여의 수련과정을 거치고 1956년 <벼락감투>로 데뷔했다.

김학성은 이필우, 이명우, 이창용, 이신웅, 손용진, 양세웅 등에 이어 등장한 조선인 촬영감독이었는데 이필우의 기술을 근간으로 1931년 설립된 경성촬영소의 도제를 거쳐 일본유학을 통해 촬영감독이 되었다. 발성영화 제작 전후에 집단적으로 등장한 영화인 2세대의 전형적인 경로를 밟은 기술 인력이었다. 경성촬영소에 입사해 <바다여 말하라>(이규환, 1935)에서 이명우의 조수로도, <춘풍>(1935)에서 양세웅의 조수로 도제 시절을 거친 뒤 다시 촬영을 배우러 일본으로 건너가 1939년 일본촬영기술협회 시험에 합격하며 정회원이 되고 일본영화 세 편을 촬영한 뒤 귀국해 반도영화사에서 제작한 <성황당>(방한준, 1939)의 촬영으로 조선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30년대 기술 인력의 세대교체

1930년대 후반으로 가며 최남주의 조선영화주식회사나 이창용의 고려영화협회 등 조선에 대규모 스튜디오들이 만들어지고 일본 영화계에서 수련한 젊은 인력들이 등장하며 조선의 영화기술 분야는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필우는 신진세력들과 갈등을 겪다 밀려나기도 했고 그의 문하에서 출발한 손용진이나 한창섭과 같은 촬영기사들이 30년대 후반에서 광복까지의 시기에 활동이 부진한 것으로 보아 1930년대 후반부터 기술 인력의 세대교체가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1940년대 초반에는 조선이 일제에 의해 전쟁동원체제로 재편되고 어용단체인 (사)조선영화주식회사가 만들어지며 민간의 영화 활동이 중지되었다. (사)조선영화주식회사의 핵심적인 기술 분야는 주로 일본 영화인들에게 돌아갔지만 <조선해협>(촬영 이명우)의 촬영보조를 맡은 유장산의 구술에 의하면 이 작품으로 한국기술진의 우수성을 보여주어 이후 법인조영에서의 영화제작은 조선인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시 영화인들이 영화 일을 할 수 있는 곳은 (사)조선영화주식회사밖에 없었기에 이명우, 양세웅, 김학성, 양주남 등 영화기술자들의 활동이 이곳에서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영화촬영기사들은 이필우와 그의 문하에서 시작한 부류, 조선에 체류하던 일본촬영기사의 문하에서 출발한 부류가 있었고, 일본의 스튜디오에서 데뷔하고 조선으로 옮겨온 부류로 나눠졌다. 이들을 영화촬영기사 1세대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1세대 문하나 일본의 촬영소에서 수련하고 1930년대 후반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부류들이 2세대를 이루고 있다.

촬영감독들의 전쟁나기

광복 이후는 촬영기자재와 시설들이 부족한 가운데 연쇄극, 무성영화, 미군부대에서 나온 리버셜 필름을 사용한 컬러영화 등이 함께 등장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미군정에 의한 뉴스영화와 기록영화의 상영과 제작이 활발했던 까닭에 이필우, 이명우, 유장산, 김학성, 양세웅, 임병호, 홍일명 등의 촬영감독들은 미 502부대의 <리버티뉴스>와 기록영화들을 촬영했다. 이 시기에는 국내 기록영화 작품도 많이 만들어져 이신웅의 문하에 있던 임병호는 <제주도 풍토기>(1946)로 촬영 데뷔를 하기도 했다.

6・25전쟁기에는 정부기관과 군에 촬영대가 설치되어 현역 영화인들에게 생활기반과 활동할 터전이 만들어졌다. 촬영감독들은 국방부 촬영대와 공군촬영대, 육군본부 촬영대, 해군촬영대 등 군과 미 공보원, 대한민국 공보처 등에서 활동했다. 진해로 내려간 미공보원에는 이필우, 임병호, 임진환, 배성학이 있는데 이들은 <전진대한보>와 <리버티뉴스>를 만들었다.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에는 김덕진, 김강윤, 김종환, 김학성, 홍일명, 심재홍, 양보환, 이성춘, 변인집이 있었고 이들은 <국방뉴스>를 촬영했다. 현재 6・25전쟁기에 제작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전쟁기록영화 <정의의 진격>(1954)은 촬영당시 김학성과 이성춘이 큰 부상을 당하기도 한 작품이다. 대구에 있던 공군 촬영대에서는 정인엽이 <출격명령>(홍성기, 1954)을 촬영하기도 했고 해군에서는 이필우를 중심으로 촬영대를 두었다. 전쟁기의 부족한 시설과 여건에도 불구하고 험난한 현장에서 촬영감독들이 촬영을 멈추지 않았기에 기술의 연속성이 이어질 수 있었다. 6・25전쟁기 미공보원과 국방부 등에서 활동한 촬영감독들은 1950년대 한국영화 성장기의 기술계를 이끌고 간 주인공들이고, 1960년대 한국영화 르네상스기의 기술변화를 가져오는 데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

195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 성장기의 촬영감독들

6・25전쟁 후 1950년대 중후반에는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늘어나며 영화기술에 대한 체계화와 개선이 요구되었고, 전문적인 영화촬영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일제강점기 경성촬영소와 최남주의 조선영화주식회사의 기술설계를 맡아 했던 이필우는 1957년 할리우드식 스튜디오 시스템 건설을 목표로 이승만 정권의 후원을 받은 안양촬영소의 기술설계를 책임진다. 그리고 1회 작품으로 한국 최초의 시네마스코프 영화 <생명>(이강천, 1959)의 녹음을 맡았다. 촬영은 김학성이 맡아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처음으로 웨스트렉스 녹음시스템을 이용한 대작이었음에도 최신식 기재를 다루는 데 무리가 있어 녹음은 기술적으로 실패했고, 한국 최초의 촬영감독이자 녹음기사인 이필우는 이 작품을 끝으로 은퇴하게 된다.

개척기에 기술 기반을 다졌던 이필우의 은퇴는 새로운 기술과 산업이 움트기 시작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6・25전쟁기를 거치며 유지된 영화촬영 인력은 1950년대 후반의 기술기반을 구축하고 1960년대 보편화될 시네마스코프와 컬러촬영 등의 변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물론 1950년대 중후반 영화산업이 성장함에 따라 새로운 촬영인력들이 영화계로 계속 유입되었다. 유재형은 정인엽의 문하에서, 정광석은 김영순과 이성휘의 문하에서, 이유동과 서정민은 홍일명의 문하에서, 안창복은 임진환과 임병호의 문하에서 수련을 거쳐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활동한 촬영기사들이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에 등장한 기술 인력들의 문하에서 도제식 수련과정을 거친 뒤 활동한 부류 외에 1950년대 당시 민간영화사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국방부 영화과와 같은 군 계통에서 활동한 이력을 바탕으로 촬영감독이 된 전조명과 같은 경우도 있다. 1950년대 말이면 한국영화 제작편수가 100편이 넘는 규모로 증가하며 성장하는데 이에 걸맞게 영화촬영 인력 또한 증가해 1958년 기술자협회 영화촬영분과 회원은 50명을 넘었다.

1960년대 젊은 촬영감독들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1950년대 후반에 유입된 젊은 촬영인력들은 1960년대의 기술변화를 이끌었다. 시네마스코프와 컬러화면을 구현하기 위해 고가의 아나모픽렌즈를 대체해 수공으로 시네마스코프 렌즈와 컬러자동현상기를 만들었다. 1970년대에는 장석준이 입체영화와 70mm 영화제작장비를 만들기도 했고, 유재형이 카메라 렌즈를 깎아 테크니스코프를 만들어 부족한 자본과 기자재를 임시변통으로 극복하는 융통성을 발휘했다. 외국의 정식 기술과 자재가 들어오면 수공으로 제작한 기재들이 사라지는 과정이 반복되었지만 기술의 변화를 촬영기사들이 자체 개발로 따라가려는 시도와 열정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이석기・손현채의 문하에서 홍경표가, 장석준의 문하에서 유영길, 그리고 그 문하에서 김성복으로 이어지듯 촬영기사들의 도제식 수련은 계속 이어졌고 촬영감독협회의 기준에 따른 인준으로 도제를 통해 수련한 촬영기사들의 데뷔 자격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며 김형구, 박현철과 같은 유학파 촬영감독들이 등장하며 이러한 인준 절차에서 벗어나서 데뷔하는 경로가 생겼다.

촬영감독의 계보와 한국영화의 성장

한국영화는 일제강점기와 광복, 6・25전쟁, 전후 재건기를 거치며 성장해왔다. 정치, 사회, 문화적 단절을 겪으면서도 이필우에서 시작된 영화촬영감독들의 맥은 꾸준히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본과 설비를 필요로 하는 영화제작의 산업적 특성으로 인해 일제강점기 (사)조선영화주식회사와 광복 후 미공보부 그리고 6・25전쟁기에는 군과 미 공보원, 대한민국 공보처에 이르기까지 영화촬영감독들은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환경이면 어느 곳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적 시각에서 보자면 때로는 문제적일 수 있을 행보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영화의 생존과 전문성이 더 중요했을 것이다. 그러한 입장으로 인해 영화촬영기술은 끊기지 않고 전수되어 토착적인 적응력을 갖추며 현재까지 이어질 수 있었을 것이다. 영화촬영감독의 방대한 계보 가운데 작은 부분만이 언급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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