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영화의 음악 반려, 한상기 이준희의 영화사산책 ③

by.이준희(대중음악비평가) 2010-08-10조회 87
김기영

올해 2010년은 유난히도 ‘○○ ○○주년’이 많다. 경술국치, 6?25전쟁, 4?19혁명, 광주민주화운동 등 이것저것 기념할 일이 넘치는 가운데 생각해보면, 영화에도 분명 기억할 만한 거리가 있다. 바로 반세기 전인 1960년에 개봉한 한국영화 역사의 기념비적 작품 <하녀>다. 올해 또 리메이크작이 나와 프랑스를 다녀오기도 했고, 이런저런 덕에 원작이 재개봉하기도 했으니, 실로 풍성한 <하녀> 50주년이다.

작품 자체나 연출을 맡은 김기영(金綺泳) 감독에 관해서는 굳이 구구절절 토를 달 필요가 없겠지만, <하녀>의 음악에는 다시 돌아볼 만한 점이 있다. 긴장과 공포감을 조성하는 데에 조명과 함께 큰 역할을 담당한 것으로 평가되는 <하녀>의 음악은, 1950년대 중반부터 90년대까지 영화음악가로 활동한 한상기(韓相基)의 작품이다. 그런데 김기영과 한상기의 동업은 <하녀> 한 작품에만 머무는 차원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집요한(?) 콤비네이션으로 보면, 한상기를 김기영 영화의 음악적 반려자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1955년 <주검의 상자>로 데뷔한 김기영이 이듬해 발표한 <봉선화>는 한상기의 영화음악 데뷔작이었다. 이후 김기영의 주요 작품으로 꼽히는 <초설>(1958), <하녀>(1960), <현해탄은 알고 있다>(1961), <고려장>(1963), <화녀>(1971), <충녀>(1972), <화녀 ’82>(1982), <육식동물>(1984) 등에서도 음악은 예외 없이 한상기의 몫이었다. 김기영의 마지막 작품 <죽어도 좋은 경험>(1995)의 음악도 한상기의 작품인데, 이것은 한상기의 마지막 영화음악이기도 했다.

김기영프로덕션 멤버로 동인 활동을 하기도 했던 만큼 두 사람의 인연이 각별했던 것은 분명한데, 마지막 작품까지 함께할 정도였던 점을 보면 각별함 이상의 뭔가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지나칠 정도로 고집스럽게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갔던 김기영의 성향으로 보아, 함께 작업할 사람에 대한 입장에서도 그러한 고집스런 성향이 그대로 작용했을 법하다.

1960년에 발족한 한국영화음악작곡가협회에도 창립 멤버로 참여하는 등 당대를 대표하는 영화음악가로 활동했던 한상기는 영화음악 이전에 이미 대중음악 각 분야에서 기량을 발휘한 바 있다. 농업학교를 졸업했지만 음악에 둔 뜻을 포기할 수 없어 일본으로 유학을 갔던 그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 1941년부터 대중가요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은 신진 대중가요 작곡가 한상기에게 그다지 유리하지 않았다.

1941년 말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전시경제 체제가 강화되면서 음반생산은 급속히 위축되었고, 음반을 주요 기반으로 했던 대중가요 역시 제작이 원활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냥 못 만들기만 하면 그래도 나았겠지만, 1942년부터는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부응하는 군국가요를 만들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한상기의 대중가요 작품 수가 별로 많지 않고 그중 군국가요가 몇 곡 있는 것은 이러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일제시대 말기 경제 상황의 악화로 음반이나 필름의 생산?공급이 극도로 저조해지자 대중가요계나 영화계를 막론하고 많은 공연예술 관련자가 공연무대, 특히 악극으로 활동영역을 옮겼다. 한상기 또한 1944년 이후 약초(若草)가극단에 가입해 무대음악을 담당하기 시작했다. 불가피한 시대 상황 때문이기는 했지만, 영화음악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전 전초전을 악극 무대에서 치렀던 셈이다.

광복 이후에도 한상기는 희망악극단, 부길부길쇼, 라미라(羅美羅)가극단 등 공연단체에서 활동했고, 특히 황문평(黃文平)과 함께 조선악극단의 마지막 무대를 지켰다. 나중에 영화음악가로 함께 이름을 날린 황문평과는 이미 악극을 통해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1940년대 전반 최고의 공연단체로 군림했던 조선악극단은 1944년에 단장 이철(李哲)이 갑자기 세상을 떠난 후 차츰 쇠락하기 시작했는데, 1947년에 사실상 마지막 공연이기도 했던 15주년 기념 공연에서 상연된 음악극 <청사초롱>이 한상기 작품이었다.

악극단의 활동이 더없이 활발했던 때가 1940년대 후반이었지만, 화려한 무대 뒤 사정은 열악하기만 했다. 사회 전체가 빈곤에 허덕이고 있었으니 당연히 악극단 경제도 좋을 수는 없었다. 현실적으로 호구책을 찾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한상기는 그 무렵 대중가요, 악극에 이어 새로운 음악활동 무대로 자리를 옮겼다. 바로 군악대였다. 1949년에 새로 창설된 해병대 군악대에 투신한 그는 소령 계급까지 진급하면서 군악대장직을 맡았다.

군대만큼은 그래도 물자가 넉넉한 편이었던(그래서 군수 관련 부정과 비리도 많았지만) 1950년대 중반에 해병대 군악대장 정도면 생활 유지하기에는 분명 안정적인 자리였다. 하지만 그것이 음악에 대한 한상기의 갈증을 해소해주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음악가로서 정체성을 확인하고 다시금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었을까. 1956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가곡집 <박꽃>을 펴낸 그는 곧이어 군복을 벗었다. 그리고 바로 네 번째 음악활동 무대, 영화음악과 만났다.

대종상을 비롯해 웬만한 영화 관련 상은 다 받아본 한상기이지만, 사실 대중의 뇌리에는 그 이름이 남아 있지 않다. 배우에게 밀리고 감독에게도 밀리는 것이 스태프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는 하지만, 나름 곡절 많은 음악인생에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길을 그가 후회하지는 않았지 싶다. 김기영이라는 독특한 동업자를 어디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단 말인가.

한상기의 작품 가운데에는 여전히 적지 않은 사람 입에서 불리는 곡도 있다. “하늘에 우레 소리 땅 위에 아우성~” 해병대 출신이라면 누구나 듣고 불렀을 ‘도솔산의 노래’가 바로 한상기의 작품이다. 이른바 ‘대한민국 3대 조직’ 가운데 하나가 해병대 전우회인 것을 생각하면, 당분간 그 노래 소리가 끊길 리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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