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걸작선]나비품에서 울었다 임권택, 1983

by.김경욱(영화평론가) 2018-01-12조회 6,881
나비품에서 울었다 스틸 이미지

1970-80년대 한국영화는 이른바 ‘에로티시즘 영화(에로영화)’의 전성기였다. 권위주의 정권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영화에 대한 검열을 가혹하게 시행했다. 3S 정책에 따라 정치, 사회적 소재를 금지하는 대신 성적인 표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허용을 하자 에로영화가 흥행을 주도하게 되었다. 

1983년에 개봉한 <나비 품에서 울었다>는 송길한 작가가 시나리오를 쓰고 임권택 감독이 연출했지만, 그 시대의 흔한 에로영화 같은 인상을 준다. 제목에서부터 1981년에 흥행에 성공한 에로영화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의 아류작 같기도 하고(두 편 다 ‘우진필름’에서 제작했다), 여기에 에로영화의 대표적인 스타 나영희가 주연으로 등장한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 에로영화 같다. 현주 역의 나영희가 보라색 가운을 걸친 채 설악산의 호텔 베란다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장면이다. 그러나 호텔을 나온 그녀가 ‘학동’으로 가자며 택시를 잡아타면서부터 영화는 ‘로드무비’가 된다. 하지만 이 영화가 끝까지 에로영화처럼 보이는 이유는 ‘그녀’ 때문이다. 영화의 뒷부분에 가서야 현주라는 이름이 알려지는 그녀는 부유해 보이지만 정체가 아주 모호하다. 그녀는 택시운전사 순호에게 “7년 만에 미국에서 돌아와 첫사랑 민섭을 찾으러 간다”고 말하는데, 그녀의 행동거지와 태도는 에로영화의 여주인공과 비슷하다. 그녀는 길에서 만난 부유한 남자와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춤도 같이 추거나, 순호가 노상 방뇨하는 모습을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는다. 특히 그녀가 택시를 타고 가면서 마주하는 풍경이나 사물 그리고 사람들에게 자주 미묘한 미소를 지을 때, 그런 느낌은 더욱 강화된다. 그럼에도 에로영화에서 기대하는 장면이 등장하기까지 관객은 그녀가 순호의 택시를 타고 강원도에서 충청도까지 민섭의 자취를 찾아 헤매는 로드무비를 통과해야 한다. 

그 길에서 우리는 퇴락한 탄광촌과 남루한 마을을 보게 된다. 그리고 순호의 택시에 동승하게 되는 촌로와 스님, 연인들 같은 인간 군상을 만나게 된다. 택시 뒷좌석의 연인들이 서슴없이 애정행각을 벌일 때 바로 옆에 스님이 앉아 있는 아이러니한 장면은 마치 에로영화와 로드무비 또는 상업영화와 작가영화 사이에서 어렵게 줄타기하는 이 영화를 은유하는 것 같다. 이 영화는 임권택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만다라>(1981)를 만든 다음, <안개마을>과 동시에 제작되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이 영화에는 두 편의 흔적 같은 게 있다. <만다라>의 스님들이 깨달음을 얻기 위해 떠돌아다닌다면, 현주는 옛사랑을 찾아 헤맨다. <안개마을>(1983)의 수옥이 애인을 만나지 못해 낙담할 때 깨철과 섹스를 하게 되는 것처럼, 현주는 민섭의 열악한 상태를 목격하고 완전히 실망한 다음 순호와 섹스를 한다.

여기서 임권택이 판타지에 전혀 관심이 없는 감독이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현주와 민섭이 아름다운 재회를 하는 장면은 상상에서만 가능할 뿐이다. 이것은 순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순호는 현주에게 점점 이끌리지만 자신의 처지를 의식해 적극적으로 구애하지 못한다. 그는 현주가 길에서 만난 부유한 남자와 춤을 추자 질투심이 폭발해 몸싸움까지 하게 되는데 일방적으로 얻어터진다. 자신의 계급을 거듭 돌아보게 만드는 순호의 첫 번째 패배. 현주가 창피해하는 순호를 따뜻하게 위로해 주자, 그는 더욱더 그녀에게 이끌려간다.

사실 영화의 이야기는 현주가 민섭의 비참한 상태를 알아챈 다음 포기하고 돌아설 때 마무리되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주의 실패는 에로영화로 넘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마치 그 신호처럼 현주는 첫 장면의 보라색 가운을 다시 걸치며 등장하고, 곧이어 순호와의 정사 장면이 펼쳐진다.

순호가 그녀와 결혼을 꿈꿀 때, 관객은 비로소 그녀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게 된다. 그녀는 남편이 출장을 간 사이 혼자 강원도에 온 부유한 유부녀인데, 남편이 예상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알게 되자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기차를 타고 떠나버린다. 잠들어 있던 순호에게 “즐거웠다”며 작별을 고하는 메모 한 장을 남긴 채. 순호의 두 번째 패배. 임권택은 주인공 모두에게 어떤 판타지도 허용하지 않는다. 

순호는 미친 듯이 택시를 몰고 그녀를 뒤쫓아 가지만, 떠나가는 기차를 보게 될 뿐이다. 그는 택시에서 “요즘 너나없이 지겹게 고독을 말한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데, 이것은 관객에게 주는 정보이다. 현주는 첫사랑의 상실감을 순호와의 섹스를 통해 해소한 것이다. 혼란스러운 표정의 순호는 끝내 고독한 상류층 여자에게 일종의 농락을 당한 사실을 확연하게 알아채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농락이라고 단정하기에는 약간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 현주는 민섭과 연애하던 시절을 회상할 때, 성관계를 완강하게 거절하는 장면을 떠올린다. 그녀가 먼저 순호에게 다가간 이유는 그에게 약간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민섭을 떠나보낸 것 같은 이별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임권택은 전자에 훨씬 더 마음이 기울었을 것이다. 냉혹한 흥행의 게임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던 1980년대의 임권택은 노회한 솜씨로 암시와 모호함 속에 모든 것을 봉합해버린다.

P.S.: 임권택 영화의 음악이라면 <서편제>와 <춘향뎐>이 떠오르는 관객에게, 이 영화의 음악은 신선한 충격일 것이다. 특히 비 내리는 밤, 현주와 순호, 연인 사이인 젊은 여자와 남자가 민박집의 방에 함께 앉아 있을 때, 남자가 기타를 들고 호세 펠리치아노의 ‘Rain’을 부르는 장면은 너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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