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극장 17. 동양극장

by.한상언(한상언영화연구소 소장) 2019-12-24
동양극장 외관 사진
[자료] 동양극장 외관
 
동양극장은 죽첨정 1정목(현재의 서대문구 충정로 1가)에 설립된 연극전용 극장으로 1935년 11월 1일 개관하여 해방 후까지 존속한 극장이다. 

설립자는 무용가 배구자(裵龜子)와 그의 남편 홍순언(洪淳彦)이다. 배구자는 덴카츠(天勝) 무용단 출신으로 동양극장 설립 당시에는 배구자악극단을 이끌고 있었다. 

동양극장은 대지면적 488평에 건축면적 373평의 벽돌집으로 공연을 목적으로 지었기에 무대가 크고 넓었으며 조명실의 배전반과 회전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호리전트’를 비롯해 소위 하나미찌(花道)라는 무대 통로도 있었으며 무대에는 스팀까지 들어올 정도의 최신시설을 갖춘 근대적 연극전문극장이었다. 그리고 극장 뒤에는 소위 가꾸야(樂屋) 라고 하는 배우들의 휴게실 겸 분장실인 목조건물이 있었고 사무실과 연습장은 동양극장 건너편에 있는 건물 2층을 세를 내어 쓰다가 최창학의 별장(경교장) 옆 단층 양옥으로 이사하였다.

동양극장은 시멘트 콘크리트 건물에 왼쪽에는 탑을 세웠는데 이는 도쿄에 있는 다카라즈카극장(寶塚劇場)을 모방한 것이었다. 또한 수용인원은 648석 정도였는데 1층 객석은 의자를 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자를 두지 않던 2층에도 의자를 깔아 관람의 편의를 도왔다. 

1935년 11월 3일 개관 공연은 배구자악극단의 향토방문대공연과 영화로 꾸며졌다. 개관 공연 이후 11월 20일부터 극단 신무대가 동양극장에서 <숙영낭자전>을 공연했으며 이어 도쿄소녀가극단이 공연을 이어갔다. 

외부 극단에 임대를 주던 동양극장에서는 전속 극단을 두기로 하고 우선 동극좌, 희극좌, 청춘좌의 세 극단을 만들어 세 극단이 번갈아 가며 서울과 지방에서 공연과 흥행을 하는 방식을 통하여 안정적인 흥행수익을 창출해 냈다. 

동양극장 내에서 가장 먼저 조직된 극단은 청춘좌였다. 단원으로는 홍해성, 이운방, 황철, 박제행, 심영, 서월영, 김선영, 김선초, 차홍녀 등이 있었다. 1935년 12월 15일 청춘좌는 이운방 작, 심영, 서월영, 차홍녀가 출연한 <국경의 밤>(1막 2장)으로 창단 첫 공연을 펼쳤고 최독견 작, 황철, 박제행, 김선영이 출연한 <승방비곡>(2막 3장)과 구월산인 작 <기아 일개 이만원야>(4경) 역시 공연되었다. 1936년 연초부터는 <춘향전>과 <심청전>과 같은 고전과 <장한몽>처럼 신파극 시대의 대표적 레파토리를 각색한 작품들을 공연하여 창단 초기 큰 호응을 얻었다.

1936년 2월에는 극계에서 활동한지 오래된, 나이 많은 배우들을 모아 동양극장 전속 동극좌가 설립되었다. 단원으로는 변기종, 이경환, 송해천, 하지만, 서옥정, 서일성, 신은봉, 한일송, 김영숙, 박고송, 김동일, 김기성, 이윤옥, 박영태, 배구성, 김양춘, 조왕세, 박충빈, 양재성, 김연실, 홍해성 등이 포진했다. 제1회 공연으로는 2월 14일부터 이운방 각색의 <초패왕과 우미인>(3막), 남궁춘 작 비극 <방화범>(1막) 등이 공연되었으며 그 외 에도 <허물어진 청춘>, <사비수와 낙화암>, <1호 습래> 등이 포함되었다. 
 
[자료] 동양극장 홍보 광고(《국민신보》, 1939.10.29.)

동양극장의 또 다른 전속극단인 희극좌는 1936년 3월에 탄생했다. 당시 조선 내에 이름 난 희극배우들을 망라한 극단으로 남자부원으로 전경희, 김원호, 송문평, 석와불, 손일평, 김종일 등이, 여자부원으로는 김소조, 윤순선, 강정숙, 이정순, 김소정, 윤재동 등이 있었다. 

청춘좌의 신극이 개관 이후 큰 인기를 지속하는 동안 동극좌의 시대극과 희극좌의 희극은 점점 인기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다. 결국 1936년 9월 동양극장에서는 동극좌와 희극좌를 해산하여 호화선이라는 반 뮤지컬 극단을 조직하게 된다. 이는 요시모토흥업의 전속이던 배구자악극단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호화선은 정태성이 프로듀서를 맡은 후 점차 인기를 회복했다. 이에 따라 동양극장은 청춘좌와 호화선이라는 두 개의 극단으로 운영되었다. 
 
그 밖에 동양극장 내에는 전속 극단 외에 영화부도 두었다. 당시 동양극장의 연극은 야간에만 상연되었기에 주간에는 입장료 10전짜리 영화를 상영하기로 하고 그 운영을 영화업자 임수영에게 맡겼다.

연극과 영화 상영으로 크게 성장하고 있던 동양극장은 운영자 홍순언이 1937년 1월 31일 교토에서 체재 중 당시 불과 36세의 나이로 급서하면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가장 먼저 1937년 6월 청춘좌의 인기배우 박제행과 심영, 서월영이 탈퇴하여 중앙무대를 조직했다. 천일영화사가 후원한 중앙무대에 이들 배우들이 가입하면서 동양극장의 단원들은 조금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홍순언 사후 동양극장의 운영은 지배인 최상덕이 맡았다. 최상덕은 배구자의 대리인, 홍순언의 대리인과 최상덕 자신을 주축으로 한 합자회사를 세워 극장을 운영했다. 하지만 서로 간에 갈등을 빚으면서 내분을 겪게 된다. 여기에 자금난이 겹치자 동양극장의 소유권과 경영권은 고세형에게 넘어가고 운영자 최상덕은 동양극장에서 물러나게 된다. 1939년 최상덕을 비롯해 황철, 차홍녀 등 청춘좌와 호화선의 주요 배우들이 운영자가 바뀐 동양극장을 탈퇴하여 극단 아랑을 조직했다. 

최상덕에 이어 김태윤(창씨명 金田泰潤)이 지배인이 되어 동양극장을 운영했다. 그는 탈퇴한 단원들을 대신해 연구생으로 있던 배우들을 전속 극단인 청춘좌와 호화선에 배치하면서 재정비 하게 된다. 재정비된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의 진용을 살피면 우선 청춘좌는 남자배우로 변기종, 이동호, 김승호, 양재성, 이헌, 최대규, 최명철, 김철, 김윤호, 이종철, 한일송이 있었고 여자배우로 지경순, 남궁련, 차경애, 조미령, 윤신옥, 하옥주, 이순, 조선일, 지필순, 이세연, 진현숙, 한은진이 포진되어 있었다. 호화선의 경우는 남자배우 장진, 전경희, 박상익, 송재로, 김만, 정린서, 임춘근, 고설봉, 한창우, 이청산, 유선영, 신좌현, 박제행이 있었으며, 여자배우로는 김선영, 김복자, 이정옥, 김동희, 신옥봉, 정혜순, 채소연, 김련옥, 이백희, 김애순이 소속되었다. 각본진으로는 이서구, 이운방, 송영, 홍개명, 남궁운, 남해림, 김건, 이익, 백수봉이 배치되어 대본을 책임졌다. 

내분을 겪은 동양극장의 청춘좌와 호화선은 다른 극단들을 압도하기 위해 1940년 9월 서로 나누어 공연하던 두 극단의 합동공연을 기획하여 장안의 큰 화제를 몰고 왔다. 1941년 4월에는 소속 극단의 진용을 강화하기 위해 김선초, 김선영, 지계순, 최예선, 이경희, 김진문, 배구성, 김동규 등 극계의 중견 배우들을 동양극장에 입사시켰으며 극장의 인식 개선을 위해 각종 위문공연과 자선공연을 펼치며 동양극장의 위상을 지키는데 노력했다. 
 
[자료] 동양극장 청춘좌 호화선 합동대공연(《매일신보》, 1940.9.17. )

1941년 11월 동양극장은 국민극에 보조를 같이 하고 우수한 연극을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해직속 극단 호화선의 진용을 정비하며 이름을 성군으로 바꾸었다. 작가진도 강화하여 박영호, 박향민, 김영수를 포진시키고 연기진에는 박창환, 유현, 유영애, 서일성, 양진 등을 보강하였다. 성군 1회 공연은 1941년 11월 7일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박영호 작, 김욱 연출, 원우전 장치의 <가족>으로 불건전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시국을 인식하고 국민개로(國民皆勞)의 정신으로 총후국민으로 활동한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성군에서는 <청실홍실>, <백마강>, <이차돈> 등을 공연했다. 이중 1941년 11월 23일 동양극장에서 개연된 김태진 작, 홍해성 연출, 원우전, 김운선 장치의 <백마강>(5막 7장)은 신라와 백제의 싸움을 제재로 스펙터클한 시대물 의상과 장치 그 경비 약 1만여원을 들인 호화로운 무대를 선보였다.

해방 후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인 청춘좌와 성군은 국민극 제작에 참여하며 친일활동에 가담한 이유로 해산되었다. 전속 극단이 사라지게 된 동양극장은 해방 전의 연극상연의 상징과 같은 공간에서 점차 잊혀갔다. 

해방과 함께 전일상사에 위탁한 극장 운영도 1946년 김태윤이 다시 운영을 맡아하였다. 해방 후 주로 영화관으로 사용되던 동양극장은 1975년 폐업했으며 건물은 현대그룹에 매각되어 현대그룹 연수원으로 사용되다가 1990년 철거되었다. 

참고문헌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중앙일보》


 

[자료] 동아일보, 1935.11.03.


동양극장 신축 개장과 배구자 고토(故土) 방문 공연

시내 서대문정에 신축 중에 잇든 극장 문명관은 십일월 삼일에 개장하게 되엇는데 개장과 동시에 명칭을 동양극장이라 하고 개장 피로의 공연은 동 극장과 관계가 깊은 여류 무용가 배구자일행이 약 십일간 레뷰와 연극을 하게 되엇으며 우수한 봉절 영화를 껴서 더욱 성대히 하리라 한다. 배구자일행은 그동안 다년간 동경 대판 등지에서 호성적으로 흥행을 계속해오다가 이번에 여러 해 만에 고토방문공연을 하게 된 것인데 그 동안 이 일행의 예술이 질적으로 많은 향상이 잇엇을 것으로 추측됨으로 일반의 기대가 적지 아니하며 따라서 호성적을 얻을 것이 예상된다 한다.
 


[자료] 동아일보, 1935.12.17.


동양극장을 본거(本據), 신극단 청춘좌결성, 제일회 공연은 십오일부터

종래 조선극계에는 지방순업을 주로 한 극단은 여럿이 잇엇으나 경성에 본거를 둔 극단은 없든바 이번 시내 죽첨정에 신축된 동양극장 안에 극단 청춘좌가 새로 결성되었다는데 주요 간부는 홍해성, 이운방, 황철, 박제행, 심영, 서월영, 김선영, 김선초, 차홍녀 등 제씨이며 제일회 공연은 십오일부터 주야 이회로 하게 되었고 이번 상연 극본은 이운방 작 국경의 밤과 최독견 작 승방비곡 등이라 한다. (사진은 본사를 래방한 동좌 간부 제씨)

 

[자료]  동아일보, 1937.06.16.

"풍문과 사실, 동양극장 주인 홍씨 서거 후 팔린다니 정말인가, 배구자씨의 거취는 어찌 될고“, 
외국인이 조선에 와서 조선에는 무슨 연극장이 잇느냐고 물으면 아무리 생각하여 낸다 하더라도 동양극장을 드는 외에 다시 헤일 수가 없을 것이다. 동양극장은 이와 같이 조선에 둘도 없는 유일한 연극상설의 극장이다. 그런 만큼 풍문도 적지 안타.
동양극장은 극장의 수지가 마저갈 뿐만 아니라 도리어 많은 이익을 본다는 말이 잇는지는 발서 오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 극장이 최근에는 팔린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이익도 적지 안흐며 세간의 평도 그리 나쁘지는 않은데 무슨 이유로 팔린다는 말이 날까? 이 말이 잇자 이원(梨園)에 주의하는 사람의 사이에는 여러 가지 추측도 많고 여러 가지 말도 만타. 말 만흔 동양극장이 수지가 마저간다고 하지만은 실은 손해를 보고 잇지 안나. 그러치 안으면 주인이 수월 전에 서거하엿음으로 경영자에 변동이 잇게 되여 그 사이에 무슨 재미있는 에피소-드나 잇지 안는가.
또는 배구자씨가 모든 것을 다 정리 하고 인퇴(引退)한다는 소문도 잇다. 인퇴하기 때문에 동양극장도 매각할 예정이란 말도 잇다.
또 동양극장을 매각하려는 이유는 순전히 동양극장 관리 측 내부의 문제가 아니라 동양극장을 건축할 때의 소유자 분도(分島)씨와 갈등이 잇어서 그와 분리하기 위한 것이라는 말도 잇다.
그러나 우에 늘어놓은 여러 말과 같이 동양극장은 과연 팔리는가 그것은 허전(虛傳)인가?

△△

동양극장을 말하게 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배구자씨다. 배구자씨가 금년 일월 붕천(崩天)의 통()을 당한 후 씨의 생활은 어떠하며 장래의 기도는 어떠한가동양극장의 연극은 종전대로 계속하여 가겟는가? 무슨 새로운 기획은 없는가. 만약 개량한다면 어떠한 방면을 개량하려 하는가우리는 이제 동극장의 지배인 최상덕씨의 이야기를 들어서 그 사실 여부를 정확하게 알기로 하겟다.
 

사잔 사람은 있어도 팔진 않겠소, 지배인 최상덕씨 담
오전 십일시의 동양극장은 문이 다 열려져 잇다. 동 극장 지배인 최상덕씨는 발을 절으며 전화실에서 나온다. 동양극장 월편(越便) 기획부의 일실이다. 문제의 이야기는 일로 시작된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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