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배출된 2호 남배우 한림

by.김종원(영화사연구자) 2019-10-15
<불멸의 밀사>에 출연중인 한림 사진
[사진] 영화 <불멸의 밀사>(1947, 서정규)에 출연한 한림(사진 제공: 김종원)

한림(韓霖)은 <자유만세>의 김승호에 이어 해방 후 두 번째 배출된 영화배우이다. 1947년 4월 21일 우미관에서 상영된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가 그 발판이 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의 이야기이다. 바로 이 16밀리 무성영화에 한림이 주연을 맡은 것이다. <자유만세>와 마찬가지로 애국심을 자극하는 내용의 특성상 전국적인 학생 단체 관람이 가능했다. 

그런데 한림은 이에 앞서 김소동 감독의 <목단등기(牧丹燈記)>(1947)로 먼저 나올 뻔했다. 다음의 기사가 이를 말해 준다. 

  “해방 후 첫 걸음을 내는 전혀 새로운 신인이다. 작품에는 내월 공개 예정인 <목단등기>,  또 제작 중에 있는 <불멸의 밀사> 등 함남 원산에서 출생하여 일본에 가서 일대 상경과를    마친 인텔리, 신장 5척7촌 어깨가 긁고 남성미의 넘버원! 지금 세상이 요구하는 남성에 딱 들어맞는다.(중략) 33세라면 늦은 감도 있지만 성격배우로서 등장하려는 씨의 배우생활은 아직도 장구하다. <목단등기> <불멸의 밀사> 양 작품의 주연인 씨는 조선의 획기적인 16밀리 탄생과 아울러 씨 역시 새로운 연기인으로서 탄생한 것은 16밀리 발전과 더불어 씨도 발전이 약속된 것 같다. 주로 연출자 김소동씨와 일을 하여 왔고 금후도 역시 김씨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고 한다. 김씨와 관계는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어 예술 방면에 전적으로 지도를 받아왔고 일상 존경하고 있다고 한다.” 
- 홍병삼, 「신성(新星)을 차저서(3)」 , ≪예술통신≫, 1947.12.7. - 
 
1946년 ‘영화과학연구소’를 설립한 김소동이 벼른 끝에 첫 작품으로 선택한 <목단등기>는 한을 남기고 죽은 처녀 귀신(이정순)이 성불하기 위해 한 남자(한림)와 동침한다는 내용의 괴기물로, 중국소설 전등야화(前燈夜話)에서 소재를 빌려 왔다.(김소동, 「나의 이력서(47) 영화편력 절정기」, ≪한국일보≫, 1982.5.20) 

김소동이 녹음기사와 함께 직접 만든 녹음기로 도전한 이 데뷔작에 아직 검증되지 않은 세 살 아래의 신인을 기용한 배경에는 전공학과는 달라도 동경의 일본대학 후배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시골청년(현인)이 청운의 꿈을 펼쳐나가는 음악영화 <푸른 언덕>(1948, 유동일)의 보조 역할을 했으나 8년 가까이 영화와 멀어졌다. 

 <백치 아다다>로 존재감 드러내다

활동을 재개한 것은 사극영화 <단종애사>(1956, 전창근)의 사육신 중 한 명인 하위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몇 달 뒤 출연한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가 집중적으로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며 그에 대한 관심도 자연히 높아졌다. 그 첫 반응이 시사회장으로부터 나왔다. 미국공보원 영화과장 데일. E 하스( 「한국 최고작 ‘백치 아다다’」, ≪동아일보≫, 1956.11.22.)는 “한국 농촌생활은 물론이려니와 극적 씬, 희비극의 교차 및 인간생활을 파고 들어간 현실주의적인 감각이 가득 찬  영화로서 확실히 한국영화 최우수 작품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고 했고, 작가 이봉구( 「신영화, 이상심리의 표현 ‘백치 아다다’의 예술성」, ≪조선일보≫, 1956.11.23)도 “오랜만에 보는 향토적인 서정과 날카로운 화면 정리와 이동에서 오는 정감이 영화를 성공케 한 바탕이 되어 주었다”며 “이 가운데서도 한림, 장민호의 연기는 페이소스하면서 박력이 있었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영화평론가 이청기(「신경지의 발견, 영화 ’백치 아다다‘의 예술성」, ≪조선일보≫, 1956.11.26) 역시 “대담한 터치로 아다다의 생태를 해부하고 내면세계에 파고들어 내면의식의 흐름을 극히 감각적인 수법으로 추구한 작품”이라며 한림의 연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수룡 역의  한림은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으나 생리적 조건 탓인지 머슴 성격으로는 지나치게 유약한 인텔리전스가 풍겼다”고 아쉬움도 곁들였다. 

 
[사진]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에 출연한 한림, 왼쪽은 나애심(사진 제공: 김종원)

한림은 그 뒤에도 <마인>(1957, 한형모)을 비롯한 <아리랑>(1957), <돈>(김소동), <형제>(김성민), <길 잃은 사람들>(이상 1958, 김한일), <외로운 사람들>(박충현), <언제까지나 그대만을>(이상 1959, 권영순). <지상에서 맺지 못할 사랑>(김성민)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을>(이상 1960, 이봉래) 등 13편에 출연했으나 <백치 아다다> 경우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외로운 사람들> 등 한 두 편을 빼고는 거의가 조연급이었다. 그 가운데는 <돈>의 김순경과 같은 단역급도 있었다. 역할에 대한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사진] 한형모 감독의 <마인>(1957)에 출연한 한림, 앞의 여배우는 이빈화

한림은 1914년 12월 26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한정국(韓正國)이다. 일본대학 산업경영과를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비애, 실연이 담긴 감상적 인정극을 하고 싶어 했으나 그 희망이 얼마나 관철됐는지는 회의적이다. 간헐적으로 채운 12년의 배우생활 동안 대한영화배우협회 창립(1955년 4월16일)에 참여한 일 외에는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다. 프랭크 보재이즈 감독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1937)를 본 후 그 주인공인 샤를르 보외이에를 좋아하게 됐다는 한림은 젊은 시절엔 주량이 거의 무한대, 담배는 ‘전매국 굴뚝처럼 코에서 연기가 나올 정도’의 애연가였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영화계와 절연 상태에서 1994년 7월 28일 팔순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 영화 <돈>(1958, 김소동)에서 단역인 순경으로 출연한 한림

1. <불멸의 밀사>의 감독에 대해 『한국영화총서』를 비롯한 국내의 모든 저작물이 김명순 감독으로 기재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1947년 1월 14일자 ≪예술통신≫ 2면 「영화 ‘불멸의 밀사’ 남한 로케 견문기」에는 분명히 서정규(徐廷奎) 감독으로 명기돼 있다. 필자가 유족으로부터 받은 당시의 앨범 사진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이 영화를 제주극장에서 단체 관람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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