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양
Chu Jeokyang / 秋赤陽 / 1911  ~ 
본명
추완호 (Chu Wan-ho)
대표분야
배우
활동년대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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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
화륜 (火輪) (김유영, 1931)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30년 쿄토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온 김유영(金幽影)과 서광제(徐光霽)를 중심으로 재조직된 서울키노에 참가하여 장치부를 담당하였다(조선일보a). 서울키노에서는 조명희의 원작 <낙동강>을 김유영의 감독으로 영화화하기로 결정하였고, 추적양은 출연자로 기록되어 있다(조선일보b). 하지만 서울키노는 <낙동강>의 촬영을 중지하고, 조선시나리오작가협회의 시나리오 <화륜>을 제작하기로 결정하였다. 추적양도 <화륜>에 출연하였다(조선일보c).
임화가 <화륜>의 몰계급성을 지적하며 서울키노의 핵심이었던 김유영과 서광제를 비판하는 칼럼을 조선일보에 실었다. 아마 이 일을 계기로 서울키노의 재정비가 진행되었던 것 같다. 1931년 중반 서울키노는 내부에 농촌영화부와 가두영화부를 두는 조직개편을 진행하였고, 농촌영화부에서는 조명희의 <낙동강>을 다시 영화화하기로 하였다. 추적양은 김해웅(金海雄)과 함께 공동감독의 역할을 맡았다(조선일보d; 동아일보a). 하지만 이 영화의 완성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연극활동으로 1932년에는 근로대중의 이익을 위한 극단 메가폰 결성에 참여하여, 서무국과 장치부를 담당하였다(동아일보b).
추적양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통제 아래에 있던 영화제작소 동방키노에서 김태진(남궁운), 강호, 나웅, 이규설, 민우양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33년 ‘연극부대 사건’으로 은신 중에 검거되었다. <연극부대>는 동방키노의 기관지 이름이었다. 연극부대 사건은 동방키노의 인물들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영화동맹과 접촉하며, <映畵クラブ>라는 유인물을 연희전문 학생들에게 배포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었다(조선일보e; 조선일보f; 경종경고비 제1937호).

* 참고문헌
조선일보a 1930년 4월 28일 석간 3면.
조선일보b 1930년 6월 7일 5면.
조선일보c 1930년 10월 8일 석간 5면.
조선일보d 1931년 6월 9일 석간 5면.
조선일보e 1933년 5월 2일 2면.
조선일보f 1933년 5월 28일 석간 3면.
동아일보a 1931년 6월 12일 4면.
동아일보b 1932년 5월 28일 5면.
京鍾警高秘 第1937號 「演劇運動社員竝映畵部隊社員等檢擧ニ?スル件」, 1933년 2월 10일.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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