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용
Lee Chang-yong / 李創用
출생·사망
1906 ~ 1961
대표분야
제작/기획, 촬영
활동년대
1920, 1930, 1940

필모그래피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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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
풍년가 (방한준, 1942)   
복지만리 (전창근, 1941)   
승리의 뜰 (방한준, 1940)   

주요경력

회령상업학교 졸업 후 조선키네마에서 촬영감독의 조수로 일하며 기술 습득
나운규프로덕션에서 활동
나운규프로덕션 해산 후 일본 교토 신흥키네마에서 기술 연마
귀국 후 유지영의 영화배급소에 들어가 외화배급업무에 종사
1937년 기신양행에서 제작과 배급업무를 본격적으로 익힘
영화배급소이자 제작소인 고려영화협회 창립
1939년 조선영화인협회 이사
1940년 조선영화인협회 평의원, 제작회사통합추진위원
광복 후 조선영화동맹 가담
1946년 국립극장 설치 논의 당시 부극장장으로 발표된 바 있음
1949년 종로4가 제일극장 사장
1961년 8월 27일 일본에서 별세. 같은 해 12월 2일 신흥사에서 추도식 거행

기타정보

기타이름
廣川創用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1925년 윤백남프로덕션에서 니시카와(西川秀洋)의 조수로 일하며 영화계에 입문하였다. 이후 요도 도라조의 조선키네마사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나운규가 감독을 맡은 <풍운아>를 시작으로 <들쥐(야서)>(1927), <금붕어>(1927) 등의 촬영을 맡았다(조선일보a; 조선일보b). 1927년에는 나운규를 따라 나운규프로덕션으로 옮겼다. 나운규프로덕션 제1회 작품 <잘 있거라>(1927)의 촬영을 담당하는 등 나운규와 함께 활동하였다(동아일보a; 동아일보b). 1929년에는 김서정이 감독한 <약혼>을 촬영하기도 하였다(동아일보c).
1930년 심훈의 권유로 일본으로 갔다. 제국키네마의 우즈마사촬영소에 입사하였다. 제국키네마가 신흥키네마로 넘어가자 신흥키네마 기술부로 옮겨가 새로운 촬영술을 익혔다. 일본에서 돌아온 다음에는 영화배급에 관여하였다. 미국 파라마운트사의 조선 대리점인 기신양행에서 영화 배급업무를 익혔고, 1935년 고려영화배급소를 설립하였다. 1935년 조선 첫 발성영화 <춘향전>의 배급권을 획득하였다. 1937년 오덕섭, 이기세와 함께 고려영화협회를 설립하며 영화 제작을 시작하였다. 1938년 전창근이 연출한 <복지만리>를 시작으로 <수업료>(1940), <집 없는 천사(家なりき天使)> 등을 제작하였다. 1940년 조선영화령 발표 이후 추진된 영화회사 통합을 위한 합동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1942년 설립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고문과 촉탁으로 위촉되었다(친일인명사전).
해방 이후, 제일극장을 운영하였다. 1946년에는 한성극장협회에서 이름을 바꾼 서울시극장협의회에서 부이사장에 선출되었다. 참고로 이사장은 홍찬이었다. 1948년에는 대한영화협의회의 이사에 홍찬, 서정주 등과 함께 보선되었다(동아일보d; 경향신문). 한국전쟁 시기 일본으로 건너갔다. 1961년 8월 27일 일본에서 사망하였고, 유진오 등의 발기로 추도식이 서울 신흥사(新興寺)에서 열렸다(동아일보e).

* 참고문헌
조선일보a 1927년 4월 20일 조간 2면.
조선일보b 1927년 6월 30일 조간 2면.
동아일보a 1927년 9월 21일 3면.
동아일보b 1927년 10월 12일 3면.
동아일보c 1929년 2월 21일 5면.
동아일보d 1946년 11월 28일 2면.
동아일보e 1961년 12월 2일 4면.
경향신문 1948년 12월 8일 3면.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2009.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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