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운
Namgung Un / 南宮雲
출생·사망
1904 ~ 1949
대표분야
감독, 배우
활동년대
1920,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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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지지마라 순이야 (남궁운, 1930)
뿔빠진 황소 (김태진, 1927)

주요경력

1903년 10월 강원도 원산 출생
1919년 3.1 독립운동에 참가했다가 6개월 동안 유치생활
1923년 안종화와 함께 예림회 극단을 조직
1924년 부산 조선키네마주식회사 연구생
1927년 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영화부에 참여
해방 후 월북
1949년 사망
주요작품(연극)
<성길사한(成吉思汗)> 희곡, 아랑극단, 1941년 10월
<백마강> 희곡, 극단 성군, 1941년 11월
<동경(憧憬)> 희곡, 청춘좌, 1943년 1월
<아름다운 고향> 희곡, 고협 1943년 7월

영화인 정보조사

출처 : 한국영화인 정보조사

남궁운의 본명은 김태진이다. 배우일 경우는 남궁운을 사용하고, 평론이나 감독으로 활동할 경우에는 김태진을 사용하였다. 원산 단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함흥의 예림회를 따라 간도지방에 순회공연한 것이 그의 첫 무대였다. 영화배우로서의 경력은 부산 조선키네마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안종화의 편지를 받고 부산으로 갔다고 한다(동아일보b; 동아일보f) 계속해서 백남프로덕션, 고려키네마 등을 거쳐 계림영화협회 전속으로 활동하였다. 계림영화협회가 제작한 <장한몽>에 조연으로 출연하였다(동아일보a; 동아일보b). 이후 조선키네마프로덕션에 전속으로 활동하면서 나운규의 <아리랑>에서 현구로 출연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그리고 나운규가 각색과 감독을 맡은 <풍운아>에서는 김창호 역할을 맡았다(동아일보b; 동아일보c)
그러나 남궁운은 조선키네마 내에서 경영자와 충돌하여 주인규, 김상진 등 다른 배우들과 함께 조선키네마에서 탈퇴하였다(조선일보a; 동아일보d). 조선키네마를 탈퇴한 남궁운과 다른 배우들은 극동키네마 제2회 작품으로 황운이 감독한 <낙원을 찾는 무리>에 출연하였다(중외일보a). 1927년 하반기에 남궁운은 조선키네마의 제6회 작품인 <뿔 빠진 황소>로 처음 메가폰을 잡았다. 여기서 남궁운은 원작과 각색을 맡았으며 배우로도 출연하였다(중외일보b). 그리고 서울키노 1회 작품인 <혼가(昏街)>에 특별출연하기도 하였다(중외일보c).
남궁운은 1929년 12월 계급의식으로 파악한 예술운동을 주장하며 창립한 신흥영화예술가동맹에 참여하였다(조선일보b). 1930년에는 김창선, 김형용 등과 함께 이동영화제작단(이후 태양키네마로 개칭)을 조직하여 제1회 작품으로 이적효의 원작 <지지마라 순이야>를 촬영하였다. 광주와 목포 일대를 배경으로 제작된 이 영화의 각색과 함께 두 번째 감독을 맡았다. 이규설, 김도옥, 주삼손 등이 출연하고 백여 명의 엑스트라를 쓰는 등 규모가 큰 영화였다고 한다(조선일보c; 조선일보d). 이 밖에 <개척자><심청전>(1925), <아리랑 2편>(1930) 등에 출연하였다.
남궁은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통제 아래에 있던 영화제작소 동방키노를 조직하여 강호, 나웅, 이규설, 민우양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1933년 ‘연극부대 사건’으로 검거되었다. <연극부대>는 동방키노의 기관지 이름이었다. 연극부대 사건은 동방키노의 인물들이 일본 프롤레타리아 영화동맹과 접촉하며, <영화 구락부(映畵クラブ)>라는 유인물을 연희전문 학생들에게 배포한 혐의로 구속된 사건이었다(조선일보e; 조선일보f; 경종경고비 제1937호).
당시 심훈은 남궁운을 “단아한 성격이 실지 운동보다는 문사형”에 가깝다고 평하였다(심훈). 감옥생활 이후 남궁운은 병을 얻어 고향인 함흥으로 낙향하였다(삼천리). 이후 연극단체인 인생극장 및 조선무태 등에서 활동하였다(동아일보e; 동아일보g). 해방 후에는 조선연극동맹에서 활동하였는데, 1946년 2월에 개최된 전국문학자대회에서 조선연극동맹 대표 자격으로 축사를 하였다(자유신문 1946년 2월 9일 2면). 이후에 월북하였다.

* 참고문헌
동아일보a 1926년 2월 28일 5면.
동아일보b 1926년 11월 9일 5면.
동아일보c 1926년 12월 10일 5면.
동아일보d 1927년 2월 1일 5면.
동아일보e 1937년 12월 8일 5면.
동아일보f 1939년 3월 27일 3면.
동아일보g 1940년 7월 10일 5면.
중외일보a 1927년 6월 11일 3면.
중외일보b 1927년 11월 2일 3면.
중외일보c 1928년 6월 16일 3면.
조선일보a 1927년 1월 19일 조간 2면.
조선일보b 1929년 12월 17일 석간 5면.
조선일보c 1930년 3월 16일 석간 5면.
조선일보d 1930년 3월 28일 석간 5면.
조선일보e 1933년 5월 2일 2면.
조선일보f 1933년 5월 28일 석간 3면.
자유신문 1946년 2월 9일 2면.
「은막에서 사라진 화형배우」,『삼천리』제8권 제6호, 1936년 6월호, 180~184쪽.
심훈,「조선영화인 언파레드」,『동광』 제23호, 1931년 7월호, 56~66쪽.
京鍾警高秘 第1937號 「演劇運動社員竝映畵部隊社員等檢擧ニ?スル件」, 1933년 2월 10일.

[작성: 김영진]
[감수: 김종원]
출처 : 한국영화감독사전
예명 남궁운. 1903년 10월 강원도 원산 출생. 일부 문학사전에는 함경남도 단천 태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나 그의 생활 근거지였던 북한 자료(김태진과 그의 창작활동:소희조,조선예술,1999년 2호)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의원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함흥으로 이주. 그곳에서 보통학교를 마친 후 서울로 가 중학 과정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19년 거족적인 3.1 독립운동 때는 시위 대열에 참가했다가 6개월 동안 유치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3년 안종화와 함께 예림회 극단을 조직. 연극 <희망의 눈물> <등대수>등을 공연했고 이 과정에서 회령 출신인 나운규와 가깝게 지내게 된다. 어려서부터 문학과 예술에 남자른 취미를 갖고 다정다감한 청소년기를 보낸 그가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었다.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를 보고 부산조선키네마 주식회사의 연구생으로 들어간 것이 1924. <운영전>(1925)과 <암광>(1925)에 군중역을 맡아 출연한 것을 계기로 얼굴에 분바르는 배우의 길에 들어서게 된다. 윤백남 프로덕션으로 옮긴 뒤엔 미술을 담당하는 한편 뱃사공으로 출연. 이때부터 남궁운이라는 예명을 갖기 시작한다. <개척자>(1925-이경손),<아리랑><풍운아>(1926-나운규),<낙원을 찾는 무리들>(1927-황운) 등에서 배역을 맡았다. 그에게 보다 큰 감독의 기회가 주어진 것은 이무렵 <뿔빠진 황소>(1927)가 그 출발점이었다. 원작 및 각색,감독,출연을 겸한 이 영화는 일본인 경영의 석탄취인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울분을 담은 것이다. 길삼은 상냥하게 대해주는 단골 주막의 하녀가 카페로 끌려가 웃음을 팔며 타락의 길을 걷게되자 이 사실을 털어 놓기 위해 친구를 찾아가나 재해로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죽게 만든 노동현장으로 달려가 단합을 외친다. 이에 대해 당시 조선일보의 반응(김철수:1927.11.11)은 매우 신랄하다. "처음에는 석탄을 배경한 노동자가 나오므로 노동대자본의 투쟁이 아닌가 하고 흥미를 띠어 기대하였다. 그러나 나의 기대는 공연한 것인 줄을 깨달았다. 첫째로 그런 사진을 상영케 하는 극장 경영자의 심사는 모르나 그보다도 제작자 편의 심사를 추측할 수 없다. (중략) 사진의 기술이 좋지 못하여 흐리고 어두운 것은 오히려 지나쳐 본다 치더라도 자초지종으로 이야기가 동이 닫지 않고 요령부득이오, 나는 관람자 중에도 신경이 둔하여 그런지는 모르지만 '뿔빠진 황소'라는 말 한 마디가 나왔다. 변사가 없는 서양서는 어찌하란 말인지 당초부터 비평할 여지가 없으나 그래도 관람자 중에서 아무 말도 없으면 실로 조선인의 활동사진에 대한 악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조선 사진을 만들려거든 순 조선식이 좋지 아니한다. (중략) 이 사진은 노사투쟁극도 아니요, 협조도 아니요, 무엇인지 어두컴컴한 시간이 스크린에 지나간다. 이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유쾌한 감상은 커녕 분개함을 도와 줄 뿐이었다." 그의 두 번째 연출작은 태양키네마사 이동영화제작단이 돈을 댄 <지지마라 순이야>(1930)이다. 지주의 모략으로 파산에 직면한 중농인 순이의 아버지는 지주의 마음을 사기 위해 딸을 주려 하지만 순이는 사랑하는 정미소 공장의 노동자를 선택한다. 이로 인해 중농의 사정은 몰락을 면치 못하나 순이와 노동자 청년은 절망하지 않고 닥쳐올 시련과 싸워 나갈 결의를 다진다. 출연진은 이규설,전두옥,김정숙이다. 두 작품 모두 고용주와 지주에 맞서는 노동자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프롤레타리아적 경향성을 띤 것이 특징이다. 그는 이때 이미 윤기정,김유영,서광제,강호 등과 함께 카프 영화부에 참여(1927)했다. 그뒤 영화활동은 거의 중단한 채 1940년대까지 희곡작가로 활약. <백마강>(1941),<한 여름밤의 꿈>(1942),<아름다운 고향>(1943)등을 발표하였다. 그 사이 토월회의 신파극에 맞서 연극운동을 벌이던 카프 산하의 신건설이 한설야의 <그 전날 밤>등을 공연하려다가 좌익사상을 전파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핵심 멤버가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는데 그때 김태진도 포함됐다. 해방 후 월북. 1949년 사망했다. (김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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